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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죽이거나 - 나의 세렝게티
허철웅 지음 / 가디언 / 2023년 7월
평점 :
세렝게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죽거나 죽이거나》는 포식자 사자와 먹이 누의 끝없는 생존 사투를 치밀하게 그려냈다.
마사이어로 '끝없는 평원'이란 뜻의 세렝게티는 우리나라의 강원도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이처럼 살아있는 정글 세렝게티는 그리 크다고 볼 수 없지만, 얼핏 평화로워 보이나 보이지 않는 서열이 확실한 가혹한 '약육강식' 초원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다.
《죽거나 죽이거나》는 아기 사자가 세상의 빛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덧없는 죽음을 보며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도 죽음을 맞는 이들에게는 잠깐의 적막과 침묵 정도만 베푼다는 것을 나는 아직 몰랐다."라고 회고한다.
"저들은 우리보다 한 걸음만 빨리 달리면 살 수 있다.
우리는 저들보다 한 걸음이 더 빨라야 목숨을 이어갈 수 있지.
이 한 걸음을 위해서 저들은 저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쓰는 거다."
절뚝거리는 늙은 사자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는 하이에나 떼의 모습을 보며 마치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최상위 포식자 사자도 나이가 들면 하위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정글의 법칙은 언제든 치고 올라오는 경쟁 사회라 더 이상 안전지대가 없는 우리네 세상과도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인다.
"마지막으로 제 이웃과 형제인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우리 종족은 서로 돕지 않으면 삶과 죽음이 수시로 교차하는 세렝게티에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사냥꾼들이 덤빌 때는 나이 든 어른들께서 젊고 어린 이들의 앞에 나아가 스스로 운명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것이 자비심 없는 세렝게티가 우리에게 허용하는 순리일 것입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은 버려두지 말고 힘을 나누어 돌봐주십시오. 그것이 세렝게티의 질서를 더욱 받드는 일일 것입니다. 마라강을 건널 때 한곳으로 몰리지 말고 넓게 흩어져서 한꺼번에 강을 건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의지해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우리의 생존은 각자가 알 수 없는 이들의 땀과 희생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서로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지금의 우리를 분명히 다른 내일로 이끌 것입니다. 앞으로도 세렝게티는 우리 모두의 것이며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p.296
'죽거나 죽이거나'의 세상에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저자는 정치판에 오래 머무른 까닭일까. 천적의 관계인 사자와 누의 시선을 교차하며 사냥하는 자와 사냥감의 숙명에 대해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 세렝게티의 어둠 등 야생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또한 불멸과 소멸의 장에서 연대의 힘을 강조하는 발언은 마음이 뭉클해진다.
치열하게 살아가되 승자도 패자도 없는,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세렝게티를 바라던 사자의 우두머리가 아버지처럼 마지막 숨결을 거두며 마무리되는 《죽거나 죽이거나》. 생생한 먹이사슬의 현장에 다녀온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