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타 이슬라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남진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르반테스의 땅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스페인 국민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 스페인 비평상 수상작인 《베르타 이슬라》는 타인에 의해 한순간에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버린 두 남녀의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아

 

《베르타 이슬라》는 '한동안 그녀는 남편이 진짜 자기 남편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최소한 자기 인생에서는 자신의 역할이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던 베르타는 학창 시절부터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느낀 토마스와 결혼한다. 그러나 정상 궤도에 놓인 인생을 살던 토마스가 정부와의 하룻밤을 보낸 어느 날, 갑자기 살인 사건 용의자로 몰리며 한순간에 감옥에 가거나 침투 요원의 길을 가느냐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며 이들의 삶은 생각지도 못한 제3의 인물에게 맡겨진다.

 

출중한 재능으로 선택된 사람이 '우주에서 추방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톰의 어둠의 시간, 거짓과 은폐로 조각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베르타의 섬세한 심리가 압권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비밀'을 지키며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두려움과 슬픔을, 남편의 부재 시간이 길어지며 시신 없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베르타의 내적 갈등은 부족함 없던 한 인간의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면서도 가정을 지키는 강인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토마스 네빈스는 제임스 롤럴드로 그리고 데이비드 크로머-피톤의 신분으로 살다가 20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베르타에게 돌아가길 원한다.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잃어버린 20년에 분노하지만, 그를 짓눌렀던 위협은 존재한 적도 없었으며, 진짜 인생과 나란히 진행되었던 가짜 인생 모두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고 비로소 소설 한 편이 끝났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토머스는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 그러나 저자는 설령 우리의 삶이 다 결정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사건을 똑바로 바라본다면, 덫에 걸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이 덫에 빠지는 것 또한 자신이 선택한 결과이기에 타인을 비난할 수 없다고 담담히 말하는 그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었다.

 

베르타는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톰을 볼 때마다 변하는 그의 모습에 혼란스러워도 이해하려고 노력한 기다림의 존재였다. 반면, 토마스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로, 'And in short, I was afraid' 두려움에 지배당한다.

 

남녀 사이의 사랑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12년 만에 돌아온 톰을 마주한 베르타는 12년간 그녀에게 유령이었던 톰을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베르타와 토머스처럼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인연도, 서로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는 사실을 묵직하게 전한다.

 

베르타는 '섬'이라는 뜻의 자신의 이름처럼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며 비밀을 간직한 채 30년간의 관계를 간극을 좁혀나가면서 소설을 마무리한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각자만의 내밀한 슬픔을 안고 있다.

하비에르 마리아스, 베르타 이슬라 中 p.739

 

《베르타 이슬라》는 순수 문학이라고 하지만, 섬세한 심리 묘사와 스피디한 전개 덕분에 한편의 스릴러를 읽는 기분이 든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세상을 보여주며 선택받은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인지, 우리는 선택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또한 책 속에 발자크, 엘리엇 등 문학 작품들이 등장해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의 지적 호기심까지 충족시키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살아있지만 죽음과도 같은 침묵의 삶을 그린 《베르타 이슬라》에서 베르타의 시간이 기다림이었다면, 저자의 후속작 《토마스 네빈슨》은 불운의 남녀의 잃어버린 20년을 어떤 시간으로 그려낼지 기대된다.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 눈에는 띄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만드는 법이지. p.84

 

충분히 아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결코 투명하지도 매끄럽지도 않고 활짝 열리지도 않을, 그리고 언제나 구겨진 채 안개에 싸여 있는 것은 완벽하게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그에게는 투명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 p. 335

 

대부분은 그저 자기 삶에 뿌리내린 채 아무 질문 없이 그냥 살아가. 자기에게 닥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안고 말이야. 이것이 삶의 규범이야. p.7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