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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마취 상태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9
이디스 워튼 지음, 손정희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평점 :
뉴욕 상류층의 삶을 살아온 이디스 워튼이 상류 사회의 모순을 지적했던 책 『순수의 시대』를 재밌게 봤던 터라 국내 초역본 《반마취 상태》는 또 뉴욕 상류층의 어떤 이야기를 다루었을지 궁금했다.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언제나 맨퍼드 부인의 좌우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인 관점이 그녀를 저버리는 때가 있었고,
부인은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은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디스 워튼, 반마취 상태 中 p.11
리타가 아이를 출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반마취 상태》는 출산의 고통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폴린은 마취제를 사용하는 분만 방식인 반마취상태 분만을 사용하는 가장 사치스러운 병실에 며느리를 집어넣는다. 아이를 낳는 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시적인 일이어야 한다는 폴린, 그러나 그녀는 산아제한 위원회 회장이다. 아들 부부의 이혼을 저지하기 위해 부활절 휴일을 시더리지에서 보내자는 덱스터의 제안에 폴린은 행복한 경외감을 느끼지만, 가족 간의 엉킨 매듭은 풀기 만만치 않다.
반마취 상태는, 산모들의 산고를 줄이기 위한 의료 행위지만, 1920년대 화려했던 뉴욕 재즈 시대에 길 잃은 상류층들이 불안함과 지루함을 잊기 위한 메타포로 쓰인다. 그래서인지 완벽해 보이는 뉴욕 상류층가의 맨퍼드 가 구성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하나씩 결함이 있다.
주인공 폴린 맨퍼드는 산아제한 위원회 회장으로 변호사 남편 덱스터 맨퍼드와 딸 노나 그리고 전 남편 와이언트 사이에 짐 와이언트가 있다. 폴린은 바쁜 삶 속에도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집착하고, 덱스터 맨퍼드는 일 중독자로, 스스로의 안락과 편의 외에는 무관심한 남편이다. 딸 노나는 유부남과의 애정 라인이 있다. 삶의 목표를 상실한 며느리 리타는 익숙한 것에 금방 싫증을 내는 젊은이를 대표하고, 아들 짐은 이혼을 원하는 아내 때문에 불안해 방향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폴린은 《반마취 상태》에서 눈에 들어온 캐릭터다. 이기적인 탐닉을 이타 주의로 위장한 채 이타적인 사회활동을 끊임없이 하는 상류층 여성 폴린 맨퍼드는 마치 두 가정을 책임지는 여인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낙천주의가이지만, '모든 것을 위한 시간이 있는 법이다.'라는 좌우명으로 살아가는 그녀답게 빼곡한 스케줄로 살아가는 독자적인 재력을 갖춘 여성이다. 소설에 모순이 가득하지만 밉지 않은 캐릭터다.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어머니 폴린에게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제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며 차라리 수도원에 들어가 생을 마무리하는 게 낫다'라고 소리치는 노나는 가족의 갈등을 해소하면서 어린 소녀가 여인으로 성장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인생의 모든 엉킨 매듭들이 풀 수 없게 치명적으로 얽혀 있었다.
이디스워튼, 반마취상태 中 p. 257
'인생의 모든 엉킨 매듭들이 풀 수 없게 치명적으로 얽혀 있었다'라는 문장은 맨퍼드가를 관통하는 문장이면서도 우리네 인생사를 한마디로 표현한 문장처럼 느껴진다.
'뉴욕의 하루의 끝은 누구나 피곤해 보인다'라 묘사한다. 그러나 100여 년 전의 상류층 뉴요커의 삶은 현대인의 일상과 닮았다. 폴린의 루틴과 비교하면, 빼곡한 일정 채우기에 중독된 우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매일 밤 잠들기 전 이완 운동을 하고, 영적 치료에 중독된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명상하고 요가하며 저녁 시간을 마무리하는 모습과도 무척이나 닮았다. 인간의 본성은 사회적 관습처럼 빠르게 변하지 않기에 서두르지 말고, 유쾌하고 다채로운 일상에서 안정감을 얻기를 바라는 것 같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듯, 행복해 보이는 가정의 민낯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여성들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반마취 상태》는 허무함과 공허함 속에서도 일상을 버티게 해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을 잘 그려낸 것 같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친절하고 단순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인생이 쉬울까 생각했다.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