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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삶 ㅣ 클래식 라이브러리 2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평점 :
아르테 클래식 라이브러리 두 번째 도서 《평온한 삶》은 『연인』으로 유명한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초기 대표작으로 국내 최초 소개되는 소설이라고 한다.
프랑스 남부 뷔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설 《평온한 삶》은 제목과는 달리 제롬과 니콜라의 싸움으로 시작한다. 사건의 발단은 소설의 화자 프랑신이 남동생 니콜라에게 삼촌 제롬이 아내를 범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제롬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된 것이다.
제롬에 대한 분노는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벨기에에서 프랑스 남부의 시골 뷔그의 농장으로 쫓겨온 배경에 제롬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신 베르나트는 가족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설상가상으로 남동생의 아내와 동침하는 삼촌이 사라져야 가족이 살아간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롬의 죽음은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남동생 니콜라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1부가 끝난다.
2부는 삼촌과 남동생의 장례를 치르고 프랑신이 뷔그를 떠나 홀로 바닷가에서 상념에 젖어드는 이야기다. 그녀는 니콜라의 죽음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연인 티엔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상처를 짚어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나는 지금의 나와 천 배는 다를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나 혼자서 그 천 가지 다른 모습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이 모습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으로 약 서른 해, 서른 번의 10월과 서른 번의 8월을 더 살아야 한다. 나는 그 이야기의 함정에, 그 얼굴과 몸, 그 머리가 파 놓은 함정에 영원히 걸려들었다.
<평온한 삶> 中 p. 108
권태가 남았다. 매번 바닥까지 내려갔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권태의 밑바닥에는 늘 새로운 권태를 만들어 내는 샘이 있다. 권태를 통해 살아갈 수도 있다. 나는 때로 새벽에 잠이 깨서 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사물을 부식시키는 힘이 너무 강한 흰색의 빛 앞에서 밤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바다가 퍼트리는, 너무 순수해서 숨 막히게 만드는 습기 찬 상쾌한 기운이, 이어 새소리가 방으로 들어온다. 그럴 때, 말할 수 없다. 그럴 때, 새로운 권태를 발견한다. 전보다 더 멀리서 온, 하루가 더 담긴 권태다.
<평온한 삶> 中 p. 143
마지막 3부는 다시 프랑신이 뷔그로 돌아오며 마무리된다. 제롬과 니콜라의 죽음으로 뷔그를 떠났던 프랑신이 바닷가에서 물에 빠져 죽은 남자 때문에 다시 뷔그로 돌아오게 되는 장면도 우연은 아니다. 연이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자기 때문이라는 타인의 시선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독백은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수치심의 무게가 얼마나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권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권태롭다. 언젠가 권태롭지 않은 날이 오겠지. 머지않았다. 나는 필요조차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평온한 삶이 오고 있다.
<평온한 삶> 中 p. 174
'나는 나의 권태의 궁전 속에서 권태를 벗 삼아 지낸다.'라는 문장을 곱씹어 보게 된다. 평온과 권태는 어찌 보면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복잡하고 정신없는 나날에는 평온한 일상을 꿈꾸지만, 또 별다른 일이 없는 나날에는 무료하고 권태롭다고 말하니 말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 추와 같다.'라고 이야기했나 보다.
평온한 삶이란, 권태로운 일상을 받아들이고 불안을 덜어낼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온전한 안락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