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 1
백신애.최진영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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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를 이어주는 작가 정신의 새로운 시리즈, '소설, 잇다'의 첫 번째 도서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사랑'을 소재로 한 백신애 작가의 세 작품과 최진영 작가의 작품 한편이 수록되었다.

 

시대 불문 인생사 살아가는 근원이 '사랑'이라서 일까. 과도기 상황에서의 신여성 작가와 현대 작가는 백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여성 그리고 사랑에 대한 담론이 가능하다니. 소설에는 요즘 잘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단어가 보이기도 하지만, 백 년 전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 지루함이 없었다. 다만, 남녀의 관계에서 여성의 입지가 현재와는 차이가 있을 뿐.

 

우선, 첫 번째 「광인 수기」에는 현모양처의 삶을 살아온 며느리에게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챙겨야 한다며 타박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현재도 간간이 목도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가부장적인 시대적 배경과 더불어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미친 여성으로 몰아가는 상황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자는 이를 해학적으로 승화시켰고(차마 옮겨 쓰기는 애매한 문장이라 패스), 사랑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찰나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랑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찰나가 연장해가는 것이니까

이 순간 아무리 사랑하지마는 다음 순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지요. "p.47

 

「혼명에서」는 신념의 중요성을 깨우쳐준 S라는 연정의 상대가 갑작스러운 죽으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이혼녀를 그려낸다. 사회에서 당당해지기 위해 '신념'을 강조하는 동시에 우연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상에 우연이란 것이 없어요. 피차 또박또박 제가 지나야 할 코스를 밟아온 결과로 서로 그 코스가 한데 교차되었던 것에 불과하니까 그것은 가장 자연적 결과입니다. 만일 이것을 이름 지어 우연이라 한다면, 그 우연이 또한 인간 일생을 좌우하는 중대한 계기가 될 수 있어요. 때로 인간이란 우연에 좌우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p.88

 

「아름다운 노을」 가족의 대를 잇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재혼 예정인 여인은 청첩장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린다. 과부 화가를 흠모하는 소년과 사랑에 대한 여인의 욕망을 그려내며 괴로움의 근원이 무엇이었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울지 말아요. 사람의 삶이란 괴로움인 것이에요. 괴로움이 즉 삶이란 말이지요." p. 114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시대를 넘어 이어가는 여성들의 사랑 실험이라는 카피처럼, 백신애의 소설 3편의 여성들은 하나같이 눈물이 많지만, 점점 과감해진다. 현모양처의 삶이 당연한 시대상에서 일탈을 꾀하고, 이혼녀에 대한 사회의 인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딸이 가독을 이어가는 설정이나 혼인을 앞두고 10대 소년에게 마음을 둔 욕망 등 다소 파격적인 신여성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윽고 최진영 작가는 '사랑'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가간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초반부에 여성이 범죄의 타깃이 되는 다소 어두운 배경으로 시작하며 긴장감을 고조시켜 페미니즘 소설로 전개를 예상케했다. 저자는 100여 년 전 백신애의 소설 「아름다운 노을」의 주인공이었던 30대 순희와 10대의 정규를 이어받아 40대 순희와 20대 정규로 재해석한다. 전통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에만 포커스를 맞춘 여성과 여성의 러브 라인으로.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건 바로 이런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 것. 비슷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 나에게 기쁜 마음을, 심심한 마음을, 힘든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 그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을, 외롭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망하고 계속 망할 뿐이라는 평범한 삶을 기꺼이 살아갈 수 있다." p. 229

 

 

21세기를 살아가고는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도, 남녀 간의 역할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프레임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누군가에게 귀속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 있는 사랑을 하며, 삶을 괴로움보다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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