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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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는 책이 있다고 했던가. 과거에 스쳐 지나갔던 책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10여 년 만에 읽게 되었다. 모리미 도미히코가 말하는 책의 우연이 이런 건지. 풋풋한 청춘의 로맨스에 유머와 감동이 더해진 판타지 소설이다.

 

무언가를 배웠다는 기분이 드는 밤의 여로 중 이백 씨가 건넨 한 마디,

마치 몸을 감싸주는 주문처럼 느껴져 소리 내어 말해 본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순정 만화의 주인공같이 순진무구한 여대생과 주변을 맴돌지만 용기 내지 못하는 다소 찌질한 선배의 로맨스 판타지를 사계절에 녹여냈다. 밤의 여로 중 변태 아저씨한테 성추행을 당하는 검은 머리 아가씨의 봄날을 시작으로, 헌책 방에서의 여름, 대학 축제의 가을, 그리고 전염성 강한 감기가 들끓는 겨울에 이르기까지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스토리 전개는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리송한 판타지의 두 주인공 곁에는 수상쩍은 것의 그늘에는 거의 등장하는 유카타 차림의 남자 히구치, 검은 머리 아가씨를 변태 아저씨로부터 구해준 하누키, 자칭 헌책 시장의 신이라며 박람강기의 면모를 발휘하는 소년,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할아버지지만 극악무도한 고리대금업자로 엄청난 부를 일군 이백 씨, 변태 아저씨 도도까지 운명의 실로 엮인 듯 돌고 돈다.

 

흠모하는 여학생의 가슴을 주무르는 변태를 눈앞에서 보면서도 차마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되려 그 변태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가 하면, 자신을 욕보였음에도 행복이 무엇인지 물으며 살아야 인생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도도 씨의 조언과 그 사건으로 하누키와 히구치의 도움을 받았기에 자신은 도움받았다고 여기는 장면은 실소를 머금기도 한다. 뭔가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엉뚱하게 사건을 전개해 나가는 면에서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는 건, 일본 특유의 정서가 반영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청춘의 봄날 검은 머리 아가씨의 마음을 감싼 한 마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술을 찾아 밤의 여행에 나섰던 여대생에게 시간이 무한하지 않으며 허비하며 살아가기엔 결코 길지 않다는 걸 얘기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로맨스 판타지 소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은 가벼우면서도 '일기일회'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우리의 인생에서 한번 찾아오는 기회가 우연의 스쳐 지나감이 될지, 아니면 운명의 만남이 될지는 자신이 하기에 달렸다고 말이다. 과연 내 삶에 운명의 실로 맺어진 사람들은 누구일까 떠올려보게 되는 유쾌한 소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헌책방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심해어들 파트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가르쳐줬어. 나는 여기 있으면 책들이 모두 평등하고 서로 자유자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 그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만들어내는 책의 바다는 사실 그 자체로 한 권의 커다란 책이야."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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