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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평점 :
고대 서사시부터 현대시까지 책 한 권으로 시의 연대기를 만난다는 건 매력적인 경험이다. 첫 번째 챕터를 읽으면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는 부제가 더욱 와닿는 책 <시의 역사>는 시의 의미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시란 무엇일까?
시와 언어의 관계는 음악과 소음에 견줄 수 있다.
기억에 남고 가치를 부여받도록 특별히 지은 언어라는 뜻이다. p.11
<시의 역사>는 시의 역사를 연대표로 정리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인 기원전 20세기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 메가 서사시』부터 시작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거쳐 제프리 초서, 셰익스피어, 바이런과 블레이크의 낭만주의를 지나 괴테와 릴케 그리고 푸시킨, 에밀리 디킨슨, 보들레르 등 시대의 대표 시인의 시를 통해 매력적인 시의 역사를 훑어본다.
처음에는 자칫 지루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었는데, 첫 번째 장 신과 영웅과 괴물이라는 챕터로 소개하는 길가 메가 서사시를 읽으며 기우였음을, 아니 되려 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몇 해 전, 마동석이 길가메시 역으로 나오면서 화제가 되어 읽어 보았는데, 다소 난해한 부분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저자의 깔끔한 해설이 더해지니 길가 메가 서사시를 한층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는 시의 역사라는 책장을 자꾸 넘기고 싶게 만들었다. 셰익스피어나 괴테처럼 많이 접한 작품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잉글로 색슨 시나 거웨인 시인 등 다소 낯선 작품도 적절하게 인용하여 부담 없이 읽으며 이해할 수 있고, 새로운 작품을 만나는 재미도 더해진다.
저자는 <시의 역사>에서 시의 지혜는 우리에게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는 죽지 않고 인간 수명의 한계를 훌쩍 넘어 오래도록 살아남는다고 지적한다. 시인이 우리에게 만물은 재로 돌아간다고 말할 때마저도 시는 재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는 시대를 거듭하며 죽음과 사랑에 대한 주제로 우리의 곁에 있다. 그러나 시는 함축성이 큰 문학이기에, 난해하기도 해서 다른 작품에 비해 손이 덜 가는 게 사실이다. 시인이 시에 담고자 했던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상을 알아야 한층 수월해진다.
내가 <시의 역사>의 책장을 주저함 없이 넘길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당시의 종교나 세계관 등 적절한 배경지식을 함께 녹여내 에세이처럼 작성한 저자의 필력 덕분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시의 역사>는 두께감이 있지만, 깔끔한 문체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재미가 더해져 속도감 있게 읽히는 책으로 영미 문학의 대가라는 명성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기억에 남고 가치를 부여받도록 특별히 지은 언어 '시'에 대해 조금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책장에 꽂혀있던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손이 가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