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가가 있다. 박완서 작가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박완서 타계 10주년을 맞아 출간된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가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지만 따스한 느낌이 드는 여우눈 에디션으로 돌아왔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작성한 660편의 에세이 중에 36편을 엮은 에세이로 그녀의 소소한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있다. 그녀는 타고난 이야기꾼답게 일제강점기와 6·25 그리고 근현대사를 살아온 그녀의 일상을 에세이에 녹여내 담백하면서 따스한 문체로 풀어 나간다.
하늘의 별이 된 그녀의 글이 아직도 사랑받는 것은 그녀의 꾸밈없는 미소처럼 글에 녹아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랬다. 위로가 필요할 때 우연히 펼쳐들었던 <나의 아름다운 이웃>의 담담한 문체에 매료되어 <그 많던 상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남자네 집> 등 잔잔하게 위로하는 그녀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박완서 작가의 삶을 압축해 놓은 듯 어린 시절부터 노년의 박완서를 두루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라 박완서를 기억하는 이라면 호기심이 갈만한 책이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을 수 없다면 꼭 한번 시험해 보기 바랍니다."p.134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안녕" p.141
"어렸을 적에 늙은 사람을 보면 저렇게 늙어서도 사는 재미가 있을까 의심했었는데
사는 재미란 죽는 날까지도 있게 마련인가 보다. "p.177
"딸의 일을 위해서 내 일을 희생하느냐 마느냐로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일을 갖기 위해서 딴 여자를 하나 희생시켜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느낌은 매우 맥 빠지고 낭패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나는 나의 일을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저자는 뭐니 뭐니 해도 가정을 잘 지키고 아이 잘 기르는 게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쪽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p.201
죽을 때까지 현역 작가로 남는다면 행복할 것 같다던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다. 사실 일제 치하에서 공부한 신여성의 삶을 산 성공한 인생이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남편과의 사별 그리고 아들을 먼저 앞세운 여인으로 결코 녹록지 않은 인생이었다. 그러나 죽고 싶은 순간을 견뎌낸 그녀의 아픔이 글에 스며들어 많은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을 테니 작가로서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지 않을까 싶다.
마치 할머니와 도란도란 담소를 나눈 듯한 기분이 드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마음이 따스해지는 에세이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지금 내게 주어진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고 행복하게 살아나가기를 바라본다.
행이나 불행이란 잣대로는 잴 수 없는 내 유년기의 완벽한 평화는, 그러나 언제고 거길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상실의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요람 속의 평화처럼.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