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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사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평점 :
봄의 정령 같으면서도 어딘가에 갇혀 있는 듯한 표지는 존재에 대해 운명적인 삶의 비망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커버가 주는 호기심만큼이나 <비행사>는 읽은 페이지가 늘어날수록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는 책이었다.
작가는 서문에서 세상에는 빅 히스토리와 스몰 히스토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흔히 역사라고 하는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사라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사적인 이야기의 일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한다.
소설<비행사>는 순간순간 존재하는 사소한 일상의 기록으로 전개해 나간다. 1부는 액체 질소 속에서 80여 년을 냉동된 상태로 있다 해동된 생물학적 연령이 30대인 플라토노프의 시각으로 기억과 신체를 회복해가며 삶을 묘사해나간다. 흡사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가 떠오르는 대목이었는데, 이때부터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면서 몰입도가 높아지고 서사가 빨라진다. 주인공 인노켄티 플라토노프는 옛 연인 아나스타샤가 떠오르고 외부 활동이 가능하다는 의사 가이거의 소견에 그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게 된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 인지능력마저 상실했지만, 그녀를 쏙 빼닮은 손녀딸 아나스타샤 나스챠에게서 아나스타샤를 발견한다. 이윽고 아나스탸샤가 죽으며 둘은 연인으로 발전해 봄날을 맞이하는 듯하며 1부가 끝난다.
2부는 인노겐트가 일기 쓰는 것이 실험 대상처럼 느껴진다며 거부하자 가이거와 나스챠 세 사람이 각각 기록하며 다각도로 입체적 시선으로 전개해 나간다. 초반부는 각자의 이름으로 나누고, 이름 없이 괄호로 메모를 이어나가다 구분 없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저자가 서문에 제시했던 말처럼 개개인의 사적인 이야기가 모여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플라토노프는 매스컴에 오르며 유명 인사가 되어가고, 유명세에 힘입어 광고 섭외가 줄을 잇는다. 수십 년 동안 냉동상태로 살아온 그에게 냉동식품 광고는 비극을 희화하는 데 그를 회복시키는 주치의 가이거가 슈레클리히라 느낀 것처럼 끔찍하기 그지없음을 보여주며 남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에티켓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플라토노프와 나스챠에게 아이가 생기면서 이 둘의 앞날에 행복만 기다릴 것 같아 보이지만 회복 후 6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주인공 인노켄티의 몸에 이상반응이 생기고, 쇠락하는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며 독자의 마음을 조이게 한다.
딸아이의 이름을 정하려다 출산 예정일이 성 안나의 축일이자 성주교 인노켄티의 축일이라는 우연은 안나라는 이름이 아나스탸샤와 나스챠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인노켄티의 부활을 암시하는 듯하나 인노켄티는 자신의 건강 상태가 악화돼감에 따라 딸과 함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에 딸을 위해 자기 인생을 묘사하는 글을 써 내려간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잠깐 동안의 이별이라며, 누군가를 간절히 만나고 싶으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 위로하지만 현실은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개별적인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섬세한 심리묘사로 매혹시킨다.
러시아 최고의 현대문학에 수여하는 '빅 북 어워드' 수상작 <비행사>를 읽는다면, 러시아의 움베르트 에코라고 불린다는 저자 예브게니 보돌라스킨의 아성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1910년대의 상테 페테르부르크와 현재를 교차하며 전개해 시간여행하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로맨스와 역사가 적절히 녹아들어 몰입시킨 그의 필력은 애정 하는 작가 리스트에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소소한 행복의 기억들을 모아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