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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불의 향기
이진 지음 / 북치는마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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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허균은 조선시대 자유분방한 호색한이지만 천하의 두려워할 바는 백성이라는 호민론을 주장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소설 <허균, 불의 향기>는 비록 혁명가로는 실패하고 죽었으나, 소설가로 살아남은 허균에 대해 재조명한다.
<허균, 불의 향기>는 광해군 10년, 허균이 역모의 세력으로 모함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시작한다. '조선은 신분제도에 의해 양반과 천민 출신의 여성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면 '서얼'이라 하여 출셋길에 오르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아이는 어미의 신분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에 허균은 새로운 조선을 위한 개혁을 준비한다. 그러나 '이용당하는 자는 이용하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이상을 꿈꾸는 자는 권력에 굶주린 자를 이기지 못한다.'라고 했듯이 함께 동참했던 이이참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역적으로 몰리게 된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이 다른 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오, 타고난 성품에 따라 사는 것은 인간의 도리다. 그 도가 인간 세상에서 잘 실행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널리 펴는 게 바로 정치다. 하늘이 정해준 자리를 감히 벗어나려는 자, 남이 받은 것을 탐내어 세상의 질서를 헤치려는 자, 그런 자들의 충동질에 휘둘리는 자, 이런 모든 어리석음을 바로잡는 것이 또한 정치다." 허균의 절친은 허균에게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라고. 이로움은커녕 재앙을 불러온다고. 병 마개를 막아두듯 입을 막아 지키는 게 몸을 편안케 하는 최고의 비법이라고 충고했었다. 그러나 감춘 걸 들춰내고, 숨긴 걸 찾아내고, 묶인 걸 풀어헤칠 때 온몸에 짜릿짜릿 흐르는 전율을 느끼는 허균은 타고난 성정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는 어쩌면 황망하게 빼앗긴 내 소리를 대신 외쳐 줄 누군가를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소설 <허균, 불의 향기>의 화자는 목이 잘려나간 후의 허균이라는 점이 신선하고, 이미 죽음으로 내몰아놓고도 허균의 머리와 딸에게 집착하는 이이첨의 악역이 허균의 원통함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추격전의 액션은 소설의 가독성을 높이고 멜로, 연민, 가족애 등 독자가 좋아할 요소들이 빠지지 않아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특히 죄인이 스스로 죄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국문이 제대로 열리지도 않은 상황에 사형을 집행했다는 점은 허균의 죽음이 정치적인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에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다. 빼앗긴 권리를 찾으려는 자들에게 품을 열어주는 사회는 없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지금 현재에도 변함없다. 현재 대한민국은 비록 양반 제도는 아니지만 새로운 계급이 존재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 흙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학력과 인생의 출발선이 달라진다. 그와 더불어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꾀한다던 정부는 제 식구 감싸기와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고, 지식수준이 변했다 한들 한번 맛본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세력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조선의 허공을 배회하던 허균의 탄식이 아직 대한민국에도 맴돌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