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혁명가 김원봉
허영만 지음 / 가디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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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인 광복절은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해방 기념일입니다. 일본은 1905년 대한민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들어냈으며 1910년 대한민국과 일본을 한일합방하는 경술국치 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 35년 동안 국권을 빼앗기며 식민 지배를 받았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패배가 광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 독립운동을 한 선조들을 잊으면 안 된다.

그중에 한 사람이 약산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최근에 영화 암살과 드라마 이몽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만화가 허영만 화백도 그 일에 동참하여 독립혁명가 김원봉의 일대기를 만화로 등장시켰다. 독립혁명가 김원봉은 어떤 종교나 정부 자본을 앞세운 그 어떤 지배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아나키즘)에 영향을 받아 폭력의 형태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온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본에 저항하였으나 체계적인 무장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 국민당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는 광저우 황포 무관학교에 입학한다. 그 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이어나간다. 국민당군 장교로 임명된 김원봉은 중국 국민혁명에도 참여한다. 1938년에는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여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한국광복군 대장 및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활동한다.

일제강점기 시대를 총망라하여 최고의 현상금인 320억 원의 주인공은 바로 김원봉이다. 그만큼 일본 입장에서 자신들의 식민 지배에 최고로 방해되는 인물인 동시에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중심적인 역할과 성과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이끌어낸 인물이었던 것이다. 의열단장과 조선 의용 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하며 김구 선생과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며 존경을 받았지만 광복 후에는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남한에서는 북한의 인물로서 역사에서 배제되고 북한에서는 공산정권의 방해세력으로 여겨지며 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안타까운 독립운동가 이자 독립혁명가이다. 이념의 전쟁 역사 속에서는 그를 지워버렸지만 대한민국 독립에 그의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정신은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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