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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뮤지컬 '레베카'의 원작자인 대프니 듀 모리에는 서스펜스 여제로 불립니다. 얼마 전 현대문학에서 출간한 <인형>은 대프니 듀 모리에가 25살 이전에 집필한 단편 13편을 모은 소설집으로, '눈 부시게 화려한 모음집'이라는뉴욕타임스 북리뷰를 받았습니다. "작가가 될 운명인 아이는 불어오는 모든 바람에 예민하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그녀의 심리묘사와 필력은 독자를 사로잡기 충분합니다.
13편의 단편 소설은 저자의 집필 순서대로 구성하였다고 하는데, 제일 처음에 수록된 <동풍>에는 세인트 힐다 섬의 원주민들에 그녀의 순수하면서도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담아냈어요.
"그들은 섬 이외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했고, 탄생과 죽음과 계절의 변화 이상의 중요한 사건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삶은 격한 감정이나 깊은 슬픔에 휩쓸린 적이 없었으며, 그들의 욕망은 한 번도 빛을 발하지 못한 채 영혼 깊숙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삶에 만족한 아이들처럼 맹목적으로 행복하게 살았고, 결코 어둠 너머의 무언가를 찾으려 들지 않았다. 안온함에 깃든 무지 속에서도 행복은 절대 요란하거나 의기양양한 것이 아니라 평화롭고 고요한 것이라고 내면의 어떤 감각이 그들에게 경고했다."
이어서 본 도서의 제목인 <인형>은 19세에 집필한 작품으로 갇힌 새장과도 같았던 삶을 그로테스크하게 풀어냈는데 추후 <레베카>의 드 윈터 부인의 원형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너무도 끔찍한 공포와 너무도 크나큰 절망으로 가득 차, 두뇌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간혹 있다. 그런데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이렇게 철저하게 고독한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적는다고 도움이 될까? … 내 두뇌에 스민 독을 토해 내자.
왜냐하면 나는 독에 물들어 잘 수도 없고, 눈을 감아도 저주받은 그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
단지 꿈이었다면, 곪아 터진 상상에 불과하다고 웃어넘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무욕의 상징인 사제의 양면성을 비판합니다. "그대가 겪고 있는 상황을 그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쁨과 슬픔을 모두 알도록 세상에 던져놓으셨다는 겁니다. 우리의 기쁨이 죄악이었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눈물과 고통으로 치러야 할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니까요."
그 외에도 단편 단편이 짧은 호흡에도 불구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그녀의 필력은 과연 독보적었습니다. <집고양이>에서는 아버지의 집착적인 사랑과 그런 아버지의 사랑을 질투했던 어머니와 함께했던 유년시절을 녹여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어가는 시점에 어른이 된다는 것을 저자 듀프니 듀 모리에는 하나의 저주이자 공포로 받아들였는데 작가가 느꼈던 공포와 고통이 비판적인 시각을 키워 다양한 작품의 등장인물로 탄생하여 그녀의 사회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짧은 단편에서도 여운을 남기는 캐릭터의 재치와 감정 표현은 대프니 듀 모리에 작품을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단편집 <인형>은 장편의 호흡이 엄두 안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재미있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