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송진
에느 리일 지음, 이승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스칸디나비아 최고의 서스펜스,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글래스키상
수상작<송진>은 사랑과 광기에 얽힌 그로테스크한 삶의 진실을 어린 소녀의 천진난만한 시각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아빠가 할머니를 살해하던 날, 하얀 방은 완전
깜깜했다."
송진의 화자 '리우'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은 물론 사망신고된 여자아이다.
리우의 집은 쓰레기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온갖 고물과 잡동사니들이 쌓여있고, 엄마는 살이 너무 쪄서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며 침대에 누워
지낸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쓰는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엄마는 살이 찔수록 말수가 줄어들었고 끝내 거의 말을 하자 않게 되었다.
리우는 쌍둥이 남동생 카알과 대화하는데, 카알은 갓난아기 때 이미 죽었는데
리우에게만 보이는 '보이지 않는 친구'다. 아빠 옌스는 아들을 잃은 이후에 리우에 대한 집착이 커져 리우를 집안에 가둬놓고 싶어 한다. 리우를
학교에 보내자고 하는 어머니의 의견에 어머니를 살해하고 리우를 사망신고한 채 곁에 둔다. 옌스는 잘생기고 촉망받던 소년이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쓰레기까지 집에 쌓아두는 저장강박증 환자로 변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커졌다. 아버지로부터, 형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아들까지 자신을 떠난 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떠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엄마는 말야. 우리 가족의 삶을 동화 같다고 해야 할지, 공포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쩌면 양쪽 다일 것 같지 않니? 다만 바람이 있다면 너만큼은 동화 같은 삶이라고 생각해줬으면 한다는
거야."
옌스는 딸에게 어둠이 고통을 대신 가져간다고 가르쳐주었다. 그 말이 전부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밤이 되어 내려앉은 어둠이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 안아주면 평소보다 훨씬 편안함을 느꼈다. 기억 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던 그 느낌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관 속에 누워 자신을 꼭 안아주었던 아빠의 손길, 목덜미에 전해지던 따사로운 숨결, 갓 손질한 신선한 나무
냄새. 그건 이해와 믿음, 안전을 의미했다.
"왠지 몰라도 함께 있으니 더 좋은 것 같았다. 우리 셋이 함께. 쌍둥이
남자 형제랑 여동생, 그리고 나. 모두 죽은 사람들끼리. 단, 셋 중에 사망신고가 된 건 나 하나였다."
"엄마한테 말하고 싶어요."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속삭였다. 단단하고
시커먼 돌멩이 같은 아빠의 눈동자가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도 없었다. 반짝이지도 않았다. 전혀 아빠의 눈동자 같지 않았다. 그냥 싸늘한
돌멩이 같았다. "안 돼." 아빠의 대답이었다. "넌 여기 있어. 아빠 금방 돌아올 테니까."
리우가 심하게 왜곡된 현실 속에서 사랑받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세상을
어린아이답게 순수한 눈길로 바라보며 비극적인 서사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고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짓게 된다. 아이는 올바른
것을 보고 밝게 자라야 하는데, 어둠이 편안함과 선량함을 의미하고, 빛이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함으로 여기는 이곳의 생활. 긴장감과 불안함이
고조되며 진행되는 서사는 북유럽의 단순하면서도 깔려있는 우울한 기운을 내뿜는 게 아닐까. 자신을 틀에 가두려고 하는 아빠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리우의 성장통이 미묘하면서도 재미를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