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나무
한주미 지음 / 민들레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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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영화감독 베르히만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화니와 알렉산더]를 보면 의붓아버지인 주교가 엄격한 금욕과 규율로 알렉산더를 억압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교는 자신이 철저하게 공정하고, 올바르며, 정의롭고, 거짓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게도 이를 강요하는데 배우 아버지 밑에서 자유롭게 성장했던 알렉산더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주교는 알렉산더를 윽박지르고, 체벌하며, 아이를 다락방에 감금하기까지 하는데... 영화를 보면서 자꾸만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몸담고 있는 교육현장에도 수많은 의붓아비들이 영화의 주교처럼 아동들을 컴컴한 다락방 속으로 내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던 거 같다.

슈타이너와 발도르프 학교에 대해서 나는 잘 몰랐다. 그저 입소문으로만 자발성을 중시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노래하는 나무]는 나처럼 발도르프나 슈타이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참 편한 지침서가 되는 것 같다. 저자가 직접 체험한 발도르프 학교에 대해 간간이 사진을 넣어 수필처럼 쉽게 써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문제가 교육 과정 속의 낡은 지식과 그것을 전달하는 낡은 기술, 그리고 열악한 환경 때문이라는 나의 생각도 이 책을 보고 난 이후 많이 달라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아동의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다. 그것은 지식을 아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의 자발성까지 의미한다. [머리로 검열하지 말고 손의 감각을 믿을 것], ['도'하나를 치더라도 그 음의 아름다움과 느낌을 가질 것], [공간 속에서 몸의 리듬을 느낄 것] 등. 신체 감각의 자발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발도로프에서는 예술교육을 중시한다. 데생과 직조, 유리드미, 조소, 인형만들기, 노래부르기는 슈타이너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듯하다. 감각의 자발성은 관계의 자발성으로 이어져 축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학생들의 결정을 교사는 그 과정이 훌륭하다며 존중해준다. 발도르프 교육을 유럽에서처럼 우리 나라에서 하기에는 무리가 많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몇 가지를 깨달았다.

우리 나라 공교육의 문제가 아동, 학생들을 불신하고 미성숙하다고 바라보는 시선 속에 있다는 것. 베르히만 영화의 주교처럼 아동을 자기 입장에서 깍고 다듬으려는 욕심 속에 있다는 것. 교사와 학생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 사랑하는 사이처럼 사심이 없고, 이해가 깊고, 장난스럽고 때로는 놀려주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 엄숙하고 무겁고 서로에게 기대와 욕망이 없다는 것. 교사 스스로 명상이나 독서를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이 스스로 예술적인 안목을 길러내지 못하는 데에 있다는 것.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지만, 국가가 강요하는 교과과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학생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행여라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이 든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세계를 배울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감사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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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손석춘 / 개마고원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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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의 신문 읽기의 혁명.

고등학교 국어과 교과서에는 '다매체 시대의 언어활동'이라는 단원이 들어 있다. 이 단원에서는 신문과 광고,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언어활동을 이해시키려는 국어과 교육과정 개발자들의 의지가 녹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뭔가 아쉽다는 느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교과서를 지필하는 이들이 신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의 특성 및 편집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고, 신문 기사를 단순히 기능적인 입장에서만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과서라는 한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점, 정치적 당파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 등은 이번 국어교과서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

손석춘의 '신문 읽기의 혁명'은 출판된지 상당한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국어과에서 신문읽기를 가르치기 위한 매우 적합한 부교재인 듯 싶다. 글쓴이가 오랜 동안 기자 생활을 한 경험을 살려서 신문 편집, 취재는 물론 신문과 정치권력과의 관계 또한 신문과 자본의 관계 등을 자료를 활용하여 매우 자세하고 꼼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각 중앙 일간지를 비교 검토하면서 편집이 얼마나 신문 읽기에서 중요한지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 잘못된 기사와 편집이 우리 사회에서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공고하게 하고 독재 권력에 부침하게 되는지도 꼼꼼하게 펼쳐보이고 있다.

중앙 일간지를 비교, 대조하면서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논조를 살펴보는 것도 학생들에게 신문을 읽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 같다. 너무 늦게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후회스럽기만 하다. 앞으로 학생들에게 보다 더 정확하고 가치 있는 신문 읽기 방법을 일깨워줄 수 있을 것 같고, 더불어 안티조선운동이나 최근 한나라당과 MBC, 한겨레와의 갈등도 학생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 신문의 수준이 얼마나 낮은가를 새삼 깨달았으며 하루 빨리 기자의 정신, 편집의 정신이 올곧게 되살아나 신문의 수준이 높아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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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 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 평전 프로그래시브 에듀케이션 클래식 2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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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친지 다섯해가 지나가고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막 교편을 잡았을 때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또 어떤 사람을 길러내겠다는 교육적 소신도 갖추지 않고서 아무런 반성없이 혹은 단순하고 무지한 열정만으로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했던 부끄러운 일들이 기억난다. 성급한 젊음이 행여 푸른 새싹을 짓밟아버리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면 가슴은 한없이 저려온다.

박홍규님의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스페인의 자유교육의 선구자 프란시스코 페레의 평전은 타성과 억압, 폭력으로 만연된 우리교육의 모습을 반성하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었다. 교직을 단순한 직업으로 삼고, 밥벌이 이상으로 생각하기 힘든 시절, 교사는 나쁜 버릇이나 행동이 개선되길 바란다는 선한 명분으로 아이에게 폭력을 들이대는 시절, 국가의 도덕성이나 집단의 도덕성에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없이, 부당한 국가권력에 저항도 없이 무작정 중앙정부가 승인한 교육과정을 고스란히 전달해야만 하는 시절. 페레는 쓸모없는 백과전서식 교육으로부터, 의자로부터, 종교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킨다.

스페인하면 프랑코 정권과 더불어 생각나는 것이 극우 파시스트들이다. 페레가 살아 교육활동을 벌인 것도 또한 파시스트와 교회가 스페인을 장악해들어가기 시작한 때였다. 페레는 우연히 자신에게 희사된 재산을 전부 '모던스쿨'을 개교하는 데에 투자한다. 그는 교육과정 속에 정부를 비판하고 스페인을 지배하는 카톨릭을 비판하고 과학과 합리, 그리고 자유를 가르치게 된다. 결국 스페인 정부로부터 반란수괴라는 엉뚱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가 보여준 교육운동의 성과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페레의 교육철학은 매우 현대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아이를 자유롭게 할 것, 남녀를 평등하게 교육할 것, 위생과 청결을 유지하며,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며, 상벌이 폐지되고, 체벌이 없는 교육, 무엇보다도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교육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2000년대에도 여전히 현대적이며,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이는 섬머힐로 페레의 철학을 이어간다.

사람들을 만날 때 정말 당황스러운 질문 중에 하나는 '학생들을 때려보았느냐'는 말이었다. 그만큼 우리 교육 현장에서 폭력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니 입가가 쓰다. 학생 때 아이를 잔인하게 체벌한 것을 마치 전과를 크게 올린 군인과 같이 늘어놓을 때 정말 역겨웠던 기억이 있다. 행여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을까. 교사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깨달음과 생각의 씨앗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싹을 뽑아내는, 폭력을 휘두르는 깡패같은 존재가 국어 선생 나가 아니었을까...

지식을 돈을 주고 팔아먹는 매판 지식인. 페레의 치열하고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 과연 '무엇을 가르쳐야 하며, 또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또 어떤 학생들을 길러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해준 좋은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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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1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성규.허정애 옮김 / 범우사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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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에서 보여주는 미래 사회의 정신적 모토는 '공동사회, 동일성, 안정'이다. 세계는 포드 기원으로부터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며 다양하고 복잡한 인종, 계층, 성차이, 지역간 불균형 등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과학기술은 놀랄만큼 성장하며 이제 인간은 어머니 뱃속이 아닌 인공 수정란을 통해 태어난다.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이는 수정란을 통해 수적으로 알맞게 출생하여 배양과정 동안 행동특성이 단계적으로 습득된다.

알파는 고등정신능력을, 엡실론은 막노동과 잡일을 담당하는 부류로 고정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인한 고통과 번민, 인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 등은 소마정을 통해서 진정되며 부모나 가족은 극히 혐오스러운 원시집단으로 규정된다. 뿐만 아니라 세익스피어나 성서 등 인류문화의 고전은 금서로서 절대 보아서는 안될 책으로 묶여진다. 동요는 발생하지 않으며 불안과 긴장 역시 사라진 멋진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와같은 안정된 공동사회에서 내부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알파급 버나드가 수정란에 있는 동안 불순물이 들어와 성장과 의식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버나드는 공동사회, 동일성, 안정이라는 정책에 회의를 느끼며 인간적인 자유에 대한 연민에 빠지고 만다. 그는 문명과는 대척되는 원주민 거주지역을 여행하고 싶어하며 레니나와 함께 그곳을 여행하게 되고 원주민 거주지에서 때어난 베타급 인간 새비지를 문명 속으로 데려오기에 이른다. 새비지는 처음부터 문명인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가 마침내는 구경거리로 전락하게 되고 문명생활에 적응하지 못한채 고립된 삶을 마감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문명의 진보에 대한 허망함을 풍자적으로 그려놓고 있다. 또한 현대사회의 '동일성, 안정'을 모토로 한 막강한 국가권력, 혹은 민족주의의 파시즘적 담론에 진지하게 흠집을 내려 했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첨단 정보시스템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속깊은 사생활까지 감시할 수 있는 기술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유전자 지도가 조만간 작성되어 앞으로 세계는 우성형질을 지닌 또다른 인류로 점차 개량되어질지도 모른다. 만약 생물학적인 개량이 불가능할 경우 기계를 활용한 인간개량도 서슴지 않고 이루어질 수도 있다. 우성형질을 지닌 소수의 인간이 다수의 열성 유전자를 지닌 이들을 지배, 통치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인류 진화의 꿈! 그러나 그 멋진 신세계가 과연 현재의 인류에게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지 유토피아가 될 것인지는 아직 그 구체적 전망이 서지 않았다. 이와같은 상황 파악이 이루어지지 못한 가운데 과학기술과 정보시스템이 계속 첨단화될 경우 그 오용 가능성은 한층 더 커질 것이며,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반성과 성찰 없이 진보만을 추구하는 오만한 과학기술사회에 제동을 건 빼어난 작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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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사과 외 - 2001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혜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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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 [잘익은 사과]. 예전에 그녀의 우리들의 음화가 생각난다. 경쾌하게 읽혀지지는 않았지만 복합적인 은유가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선 듯한 느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뭔가 나의 생활하고는 좀 동떨어진 듯한 느낌. 아니면 그간 사실주의 소설의 문법에 익숙해진 나에게 도시적 감수성이 잘 와닿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김혜순 시인이 소월시 문학상을 받았다는 데에는 적잖이 놀라웠다.

소월이라면 새롭고 도시적인 색채라기보다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우리의 민요적 선율을 활용해 절창을 일구어낸 시인이 아니던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랄지. '잔디 잔디 금잔디'랄지. 그런 소월을 기린 문학상에 김혜순이라니. 조금은 낯설은 느낌이었다. 김혜순이라면 차라리 정지용이나 이상 쪽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시집을 막상 펼쳐보고 첫 작품 [잘 익은 사과]를 보고 나서는 그녀가 소월시 문학상을 받은 이유가 이해가 갔다. 그녀가 가진 도시적 환유의 문법이 이제는 그야말로 잘 익은 포도주처럼 완숙해져서 목을 꽉 조이던 낯설음의 무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쩐지 삶에 기대어 있다. 잘 익은 사과 속에는 '백 마리 여치', '자전거 바퀴', '정미소의 나락'처럼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고스란히 실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고 있다'는 예리한 관찰력을 통해 삶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한가롭고 덧없는 세상살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를 비롯하여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 [플러그가 빠지면] 등에서는 굳이 환유를 쓰지 않고도 현실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시인을 볼 수 있다. 이제 그녀는 한편으로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가, 한편으로 '비판적 허무주의자'가 되었다가 한편으로는 문학적인 '상징'을 통해 미이라처럼 자신을 한없이 숨기기도 한다. 김혜순 시인은 '상징과 구체성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현실비판과 현실에 대한 애정을 몇 개의 단어 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것이다. 시를 읽어가면서 한풀씩 돋아나는 그녀의 예리한 관찰력과 문학적 기법에 다시 한 번 감탄해 본다.

소월시 문학상에는 이밖에도 나희덕, 고재종, 고진하, 송재학, 이문재 등 중견 시인들의 작품이 한데 모여 있어 한국 현대시를 조망하는 데 여러 가지 도움이 되었다. 시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더 없이 훌륭한 텍스트였었다.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사적인 데에 치중하거나 너무나 사소하고 일상적인 평이한 문법은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나 싶다. 더 다양하고 시원스러운 작품들이 보다 젊은 시인으로부터 한없이 분출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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