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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꽃이 피면 시드는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고결하고 아름답고 후각을 마비시킬만큼 진한 향기를 지녔다고 할지언정. 화려하게 피어나지만 썩어서 흙이 되는 운명을 어떤 살아 있는 것이 피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의 숙명. 사라져야 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숱한 매장의 풍습이 만들어지고 그 두려움을 위로하기 위해 레퀴엠이 만들어지고 한이 서린 만가가 불려지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런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시련을 당한 욥은 그것을 하늘의 축복이라 생각했다. 오랑시의 파눌루 신부도 역시 신의 섭리이자 축복이라고 믿고 페스트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죽음을 통해 신의 영광과 섭리를 드러낸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느낌. 리외와 타루는 죽음의 운명을 달리 받아들인다. 어차피 떨어질 시지프 산의 바위지만 밀어올리는 순간의 의지는 인간적이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죽음을 의지적으로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삶의 외피가 철저히 차단된 채 자신의 욕망과 의지만이 순수하게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내용이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감상하는 데에 조금 벅찬 느낌이었지만 인간의 본원적인 조건에 대한 생각을 넓힐 수 있는 소설이었다. 물론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 많은 무리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작가는 시지프의 신화와, 이방인, 그리고 페스트를 통해 신이 지배하던 인간에 대한 관념을 한 차원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지 않았나 싶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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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전집 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날 갑자기 사랑하는 자식들이 죽고, 함께 했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열심히 키우던 가축들은 병에 걸려 쓰러지고 자신도 기와장으로 피부를 긁어도 시원치 않을 가려움증에 시달리게 된다. 성서에 나오는 동방의 의인 욥의 이야기이다. 욥은 한번도 불행한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늘의 축복이라 생각하며 자신에게 내려진 재앙을 신앙으로써 극복해나간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뮈는 욥과 견줄 만한 인물을 찾아낸다.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 허망한 고역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시지프는 욥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러나 카뮈는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욥과는 달리 결과가 어찌되었든 순간순간 적극적인 의지를 지닌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을 시지프로부터 찾아낸다.

카뮈는 이미 <이방인>에서 시지프 산을 오르내리는 것 같은 반복된 일상을 통해 인간존재의 허무함을 제시해준 적이 있다. 결혼, 우정, 사랑, 출세, 장례와 같은 삶의 외피야말로 헛된 욕망에 불과하며, 그런 까닭에 주인공 뫼르소는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발적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다. 언젠가 굴러 떨어질 일상에 애착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마저도 뫼르소에게는 무덤덤한 장례절차일 따름이었다. 뫼르소가 단 한 순간 생의 의지를 느끼는 것은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감방 안에서였다. 모든 삶의 외피가 사라지고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의지.

카뮈는 <이방인>의 뫼르소를 오랑이라는 도시로 옮겨 놓는다. 삶의 모든 가식적 행위들이 일시에 그 의미를 잃고 정지된 순간. 페스트라는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오랑의 시민들은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의 참담한 심정을, 온갖 악마의 저주를 견뎌야 하는 욥의 시련을 겪게 된다. 사랑하는 연인이 죽고, 가족이 죽고, 신의 사제도 페스트 앞에서 견디지 못한다. 심지어는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의 목숨도 페스트는 예외없이 앗아간다. 만약 동방의 의인 욥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떠했을까.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라면, 혹은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를 거듭하는 죄인이었다면. 작가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열거한다.

파눌루 신부. 페스트가 인간의 죄와 도덕적 타락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서 시민들에게 회개를 부르짖는다. 코타르. 살인의 죄를 저질렀지만 오히려 활발하게 오랑 시를 거닐며 페스트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말기 암환자에게 교통사고가 뭐가 그리 큰 대수인가.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오랑시에 억울하게 갇힌 신문기자 랑게. 그는 어떻게든 부인에게로 가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 가장 큰 생의 목적이 된다. 그리고 의사 리외와 여행객 타루. 페스트가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면서도 페스트에 저항하는 자들. 어차피 죽게 될 운명에 놓인 환자마저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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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철학사상총서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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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들이 꽤 많은 부문을 할애해서 써나갔던 유태인의 항목을 보면, 계몽 자체가 지닌 파시즘의 징후는 확연히 드러난다. 서구 유럽에서 유태인은 골치 아픈 존재였다. 크리스트교의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유지시켰고, 자신의 고유한 삶의 질서를 고수하려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문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며 유통업에 종사하게 된다. 유럽이 자본주의화되면서 상인은 수공업자나 농민들의 정치적 표적으로 변하였고 살아남기 위해 유태인은 정치권력에 빌붙을 수밖에 없었다. 사냥이 끝나고 개를 잡아먹듯, 유태인은 독일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민중의 엄청난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의 질서를 버리지 않았으며 그것은 지배질서의 '보편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훼손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시 한번,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자유다. 그렇지만 오늘 이후 너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 극단적인 보편성의 추구. 반성되지 않은 자기 유지, 파시즘.

이밖에도 이 책은 문화산업이 지니고 있는 파시즘과 자본주의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고 이는 한편, 계층간의 갈등 및 산업사회에서 여성의 문제, 육체에 대한 정신의 지배 등 현대사회에서 제기해야할 문제들을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 50여년 전에 초판이 나왔음에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닌 현대적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포스트 모던한 시대라고 해도 합리적 이성과 보편성의 극단적 추구는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사회에 주는 교훈도 크다. 보편성의 추구 및 공공선을 위한 목적으로 유럽에서 '유태인'이 학살되었다면, 아메리카에서는 '인디언'과 '마야족'들이,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이, 한국에서는 '빨갱이'들이 학살된 것을 상기해보라. 그것은 반성되지 않은 주체가 객체를 자기화하려는 잘못된 미메시스와 잘못된 계몽의 기획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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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철학사상총서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서구의 근대를 상징하는 계몽의 기획에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 책의 초판본이 쓰여진 것은 1944년. 곧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인류 역사상 유래 없는 대규모의 전쟁을 수행하며 유태인을 학살하던 시기이다. 합리적 이성과 인류의 보편적 이상을 추구하는 독일이 어쩌다가 가장 야만적인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을까. 또 수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하게 되었을까.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시기에 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일들이 행해지게 되었을까. 이 책은 아마도 이와 같은 시대적인 맥락 하에서 출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들은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계몽의 개념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우선 계몽은 '미지의 것, 불안한 것, 설명 불가능한 자연, 공포의 자연'을 '합리적인 것, 설명 가능한 것, 과학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모든 불확실한 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명백하게 밝혀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곧 계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사유는 수학적 사고와 동일시되며, 모든 존재들은 수학의 대상으로서 물화된다. 곧 다음과 같은 명제, '세계에는 과학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존재란 없지만 과학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가 성립하게 된다. 모든 것이 주체를 중심으로 설명이 가능한 보편적 현상이 되지 않으면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조차 없는 나락에 빠지고 마는 셈이다.

저자들은 이와 같은 '계몽' 개념에는 이미 신화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신화 역시 인류가 '불완전한 자연, 공포의 자연'을 인간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따라서 20세기는 '계몽의 신화'의 시대다. '계몽'이든 '신화'이든 물론 그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메커니즘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자기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유일한, 또는 제 1의 기초가 된다. 저자들의 분석은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쥐스틴느의 줄리엣의 분석을 통해 더 명확한 근거를 드러내준다.

저자에 의하면 계몽에는 이미 파시즘의 징후가 노정되어 있는 듯하다. 계몽은 달리 말한다면 일종의 잘못된 미메시스다. 저자들은 올바른 미메시스는 주체가 객체(자연)에 동화 혹은 조화를 이루기 위해 객체를 존중하며 닮아가려는 노력이지만 잘못된 미메시스는 그 반대다. 주체가 객체를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 주체의 성격을 객체에게 주입하려는 행위가 곧 잘못된 미메시스다. 이 과정에서 주체의 반성적 사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체는 옳은 것이며, 객체는 변화해야할 대상이다. 깨달음을 얻고 보편성의 기준을 지닌 주체는 독단적인 보편성의 기준(?)을 타자에게 혹은 자연에게 강요한다. 받아들이든지, 말든지는 자유다. 하지만 오늘 이후 그대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방인이 될 것이다.

계몽은 특수하고 개별적이고 그래서 설명 불가능한 자연과 현상을 보편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지식과 학문적 체계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떠맡아왔다. 프랑스의 백과전서파인 달랑베르를 보라. 모든 현상을 백과사전으로 유형화시키고 체계를 세우지 않았던가. 극단적인 보편성의 추구. 그러나 그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파시즘의 징후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칸트가 말하듯이 계몽은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때, 곧 공공선을 위해서 활용할 때 성립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공선이란 무엇일까. 애국일까, 인류의 개량일까, 유태인 학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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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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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7개의 봉인]에는 십자군에 참여했던 안토니우스 블로크라는 기사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블로크는 대담하게도 '죽음'을 향해 체스를 두자고 제안하면서 게임이 끝날 때까지 자기 목숨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유예 받은 시간 동안 교회당에서, 혹은 화형 당하는 마녀에게서 인간 구원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지만 결국 어떠한 확신도 얻지 못한 채 '죽음'에 이끌리고 만다. 죽음과 나이듦에 대한 공포를 뛰어넘어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일까.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피하려는 기사 블로크를 보며 '소멸/낡음'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며칠 전에 후배의 여자친구로부터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책을 선물 받았다. 제목은 들어봐서 익숙했지만 정작 내용은 잘 모르고 있었던 책. 차츰 차츰 읽어가는 동안 이 책이 죽음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사뭇 놀랍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는 죽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까뮈의 [페스트]에서 느꼈던 누구도 예외 없는 죽음이랄지, 유태인 학살처럼 폭력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랄지 그것도 아니면 또 테러와 같이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죽음 등 예기치 않은 죽음의 모습들이 순간순간 지나쳤다. 그중 기억에 남는 죽음이란 몇 달 전 읽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볼 수 있었던 스콧 니어링의 '스스로 곡기를 끊고 맞이하는 죽음'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 모리 교수는 루게릭 병을 앓는 사람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걸렸다는 이 병은 근육을 마비시켜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으로 매우 희귀하다고 알려져 있다. 일흔살의 고령인 모리 교수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이나 늙음 자체를 타자화해서 자신만은 비껴갈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 까닭일까, 예정된 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데에 당황스러워 한다. 중세의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을 기억하라'는 어구는 아마도 죽음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낯익은 것으로 만들어 태연하게 받아들이라는 교훈일 것이다. 모리 교수는 자신이 죽어갈 것임을 깨달은 뒤에 고민하기 시작한다. 더욱 더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곁에 놓인 죽음과 더불어 삶의 의미를 탐구할 것인지.

젊어서 30년대의 경제공황을 몸소 체험하고 난 모리 교수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보며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 또 다른 사람의 땀으로 돈을 받지 않으리라'는 원칙을 세운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오든의 시구절을 가장 좋아하던 이 노 교수는 역설적이게도 죽어 가는 동안 삶에 대한 성찰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그의 제자인 미치 엘봄은 우연히 자신의 옛 스승이 방송사에서 인터뷰하는 내용을 듣고 찾아오는데, 그의 방문은 화요일마다 꾸준히 이어진다. 미치의 옛 스승 모리는 '나이 드는 것은 단순히 쇠락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장이다, 죽게 될 것을 '이해'하고 그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을 살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그는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모리의 생각에는 자연과 인간이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가로놓여 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사람들이 죽음을 두고 소란을 떠는 것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 아마 기사 블로크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진정한 구원을 찾아 이곳 저곳 헤매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행동이었는지 사뭇 깨달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것. 죽어가는 동안에도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를 잊지 않는 것. 주위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따뜻한 마음을 남기는 것. 그것이 곧 구원이고, 스스로를 남기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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