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사과 외 - 2001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혜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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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의 [잘익은 사과]. 예전에 그녀의 우리들의 음화가 생각난다. 경쾌하게 읽혀지지는 않았지만 복합적인 은유가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선 듯한 느낌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뭔가 나의 생활하고는 좀 동떨어진 듯한 느낌. 아니면 그간 사실주의 소설의 문법에 익숙해진 나에게 도시적 감수성이 잘 와닿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김혜순 시인이 소월시 문학상을 받았다는 데에는 적잖이 놀라웠다.

소월이라면 새롭고 도시적인 색채라기보다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로 우리의 민요적 선율을 활용해 절창을 일구어낸 시인이 아니던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랄지. '잔디 잔디 금잔디'랄지. 그런 소월을 기린 문학상에 김혜순이라니. 조금은 낯설은 느낌이었다. 김혜순이라면 차라리 정지용이나 이상 쪽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시집을 막상 펼쳐보고 첫 작품 [잘 익은 사과]를 보고 나서는 그녀가 소월시 문학상을 받은 이유가 이해가 갔다. 그녀가 가진 도시적 환유의 문법이 이제는 그야말로 잘 익은 포도주처럼 완숙해져서 목을 꽉 조이던 낯설음의 무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쩐지 삶에 기대어 있다. 잘 익은 사과 속에는 '백 마리 여치', '자전거 바퀴', '정미소의 나락'처럼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고스란히 실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고 있다'는 예리한 관찰력을 통해 삶의 마지막 언저리에서 한가롭고 덧없는 세상살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를 비롯하여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 [플러그가 빠지면] 등에서는 굳이 환유를 쓰지 않고도 현실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시인을 볼 수 있다. 이제 그녀는 한편으로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가, 한편으로 '비판적 허무주의자'가 되었다가 한편으로는 문학적인 '상징'을 통해 미이라처럼 자신을 한없이 숨기기도 한다. 김혜순 시인은 '상징과 구체성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현실비판과 현실에 대한 애정을 몇 개의 단어 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것이다. 시를 읽어가면서 한풀씩 돋아나는 그녀의 예리한 관찰력과 문학적 기법에 다시 한 번 감탄해 본다.

소월시 문학상에는 이밖에도 나희덕, 고재종, 고진하, 송재학, 이문재 등 중견 시인들의 작품이 한데 모여 있어 한국 현대시를 조망하는 데 여러 가지 도움이 되었다. 시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더 없이 훌륭한 텍스트였었다.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사적인 데에 치중하거나 너무나 사소하고 일상적인 평이한 문법은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았나 싶다. 더 다양하고 시원스러운 작품들이 보다 젊은 시인으로부터 한없이 분출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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