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9
제럴드 머네인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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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에세 시리즈로 만났던 세계문학 작품들은 읽고 나서도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고 스토리와 읽었을 때의 느낌이 오래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어떤 작품들이 소개되는지 눈여겨보곤 한다. 


다와다 요코나 이디스 워튼, 찬쉐, 버지니아 울프를 제외하면 시리즈에 소개된 다른 작가들은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 이번에 읽어본 #평원 의 저자 제럴드 머네인 역시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작가를 소개하는 화려한 문구들이 호기심을 돋웠다. 책 표지의 작가 사진을 보면 깐깐하고 고집이 센 사람처럼 보이는데, 호주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고 있고 현재는 아주 외딴 시골에 은둔하며 글을 쓴다고 한다. 


‹ 평원 ›에는 평범한 평원 주민과 땅으로 부를 쌓은 대지주들, 그리고 지주들에게 인정과 투자를 받고자 하는 외부인들이 등장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역시 평원을 영화로 담기 위해 이곳을 탐험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이 있을 뿐 이야기는 영화에 평원이 어떻게 담기며, 그 영화가 성공하거나 망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지주들이 평원에 대해 각자 떠들어대는 장면이나 외부인이 투자 받으려고 하는 사업의 설명들을 읽어가다 보면 과연 평원은 어떤 곳인지, 실재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된다. 


광활한 대평원, 땅을 통해 벌어들인 부를 안고서 대지주들은 가문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디자인 같은 것들을 논한다.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들은 왠지 평원 정신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평원’이란 장소를 삶에서 다다를 수 있는 곳과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어떤 곳에 비유하여 묘사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평원의 존재와 위대함을 알지만 자신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전혀 알려지지 않은 평원’을 이해하려는, 정의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정의하려는 모습이 외딴 시골에 은둔하며 사는 작가 자신의 모습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평원은 어떤 비유의 표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매끈하게 정리되지 않아 약간 애매했다. 호주 외곽과 내륙,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속에서 탐험하는 듯한 느낌을 남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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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점 보이지 않습니다 - 삶의 감각으로 이야기한 장애의 세계
앤드루 릴런드 지음, 송섬별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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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작가의 회고록으로, 한 권의 시각장애 실험 일기와 같지만 저자가 시력과 실명 사이에서 세상을 탐구하는 법을 여러 분야에 걸쳐 다루고있다. 


미국 사회 속 시각장애인들의 연대와 갈등의 역사, 점자와 음성해설, 보르헤스나 제임스 조이스 등 시력을 잃은 작가들의 집필 이야기, 시각장애인이 겪는 편견들, 복잡한 정체성 등, 비시각장애인 독자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더듬어가듯 읽게된다.


이러한 앤드루의 탐구생활과 함께 그가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일상 이야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예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의 친할아버지도 중도실명인이었기에,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거동, 식사와 세면 등을 도와주시던 기억을 아주 오랜만에 떠올려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뿌옇게 흐려진 눈과. 손의 감각에만 의지해서 접어주시곤 하던 사탕껍질 인형도 생각나고.. 그래서인지 ‘실명인에게 무엇보다 크나큰 상실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이라는 문장을 읽으며 코끝이 찡해졌다.


눈멂은 출발이라기보다 도착이라는 말을 보며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지 않을지, 서서히 진행되는 눈멂이라면 차라리 실명인을 원하게 될지, 그 마음이 어떨까 헤아려보는 지점들도 많았다.


책에서는 특히 앤드루가 자신의 실명, 눈멂을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고 감동적이다. 슬픔과 두려움을 지나 자신의 정체성을 눈멂이 어떻게 바꿀지 ‘알고 싶다’는 말에서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이 느껴졌다. 순수한 시각적 기쁨은 잃어버리게 되겠지만 눈멂 속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은 어떠한 감각으로 다가오게 될지 기대하며 마음을 열고 그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릴런드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시각장애를 단순히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시각의 한계를 넘어 다차원적인 경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눈멂이라는 더 넓은 세계로 떠나는 의도적인 여행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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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계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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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에 벌벌 떨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 

13개의 짧은 단편으로 이루어진 200여 쪽의 얇은 책 한 권. 

단숨에 읽히지만 굉장히 마음이 무겁고, 처연한 심정이 되어버린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집이라는 울타리 아래 존재하는 은폐된 폭력을 까발리는 글을 

마주하는 내내 목이 메고 속이 타는 듯 끔찍한 심정이 되었다. 


언제나 영화나 문학보다 현실이 더 지독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활자로 마주하자 그게 아니라고 믿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되는 한 편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직시해야 할 지독한 현실이라는 것.


단연코 올해 읽은 가장 대담하고, 압도적이다. 

그 방학 때 생리가 시작되었다.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생리대 사용법을 가르쳐준 건 나르시사였다. 나르시사는 또한 우리에게 그 피가 의미하는 것은 남자의 도움을 받으면 이제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어처구니없었다. 아기를 만드는 것과 같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을 어제는 할 수 없었는데 오늘은 할 수 있다니. 거짓말하지 말라고, 우리가 말했다. (…) 나르시사는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이제 진짜로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우리를 계속 붙들고 말했다.

"이제 여자가 된 거야." 나르시사가 말했다.
"인생은 장난이 아니야."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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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문고본)
과달루페 네텔 지음, 최이슬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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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부커상 후보 도서로 선정된 작품이라면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멕시코가 배경이지만 책에서 다루는 사회문제나 30대 여성들의 고민은 우리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은듯.. 특히 임신을 두고 고민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크게 공감되었다.


자유로운 비혼 여성 라우라, 뒤늦게 출산을 선택한 알리나, 홀로 아이를 키우며 고군분투하는 도리스. 입장이 모두 다른 30대 세 여성들이 겪는 저마다의 고충에 차례로 이입되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누구도 그들에게(혹은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하는 여성들에게) 옳고 그름을, 잘잘못을 강요할 수 없고 비난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면서 결혼 및 출산, 육아가 아닌 다른 결정을 내리는 여성들의 삶이 증가하는 만큼, 서로 의존하고 돌보는 형태도 다양해지지 않았나 싶고.. 각자의 자리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을 응원하자는 마음이다. 



모든 여자의 삶은 고통과 불안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지를 갖고 나아가는 .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니까. 우리는 서로를 다정하게 돌봐줄 테니까.”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의지도 존재하며, 행복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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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형의 삶 (양장) - 김민철 파리 산문집
김민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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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인스타그램을 통해 작가님의 퇴사나 파리 여행 소식을 접했기에 그곳에서의 시간을 작가님 특유의 찰진 문장들로 어떻게 담아냈을까 궁금했다.


책 이야기 전에 잠시 덧붙이자면, 나는 2011년에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약 1년간 파리에 거주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아름답고 감사한 시절임이 분명한데, 그 시간을 스스로 포기하듯이, 도망치듯이 마무리한 것이 너무나도 후회가 되어서, 귀국 이후 파리와 관련된 에세이나 브이로그 같은 콘텐츠를 좀 일부러 멀리하곤 했다는....


그런 마음으로부터 13년이 지나서야 파리를 다시 마주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민철 작가님의 책을 펼친다. 책의 중반(두 달의 파리 생활 중 첫 달을 보냈던 파리 5구에서의 생활기)까지 읽는 동안 책의 곳곳에서 오래전의 내모습을 보듯이, 세월에 묻혀 잊고 있던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시간’을 보냈다.


워홀 기간 중 가장 많이 방문하고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 퐁피두센터 도서관이었기 때문에 작가님의 도서관 사랑에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고, 아침 일찍 동네 빵집에서 빵을 사오고, 저녁에 와인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의 묘사를 보며 22살의 제 모습이 겹쳐지곤 했다. (그리워라)


그러다 이야기가 파리 5구에서 20구로 무대가 바뀌자 그곳은 저도 처음 만나는 이야기로 가득했는데.. 생각해 보면 저 또한 파리 북쪽은 위험하다는 말을 믿으며 파리 전역을 돌아다녔어도 19,20구는 가본 적이 없었다. (특히 뷔트 쇼몽 공원이 너무너무 궁금해지는) 책을 읽으면서 ‘1년간 지내며 곳곳을 누비고 다녔으니 파리는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하고, 다소 오만했던 태도를 보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파리’의 모습에선 참 반갑게도 파리에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을 찾은 것 같았다. (새삼 타인의 경험담이 고마워지는 순간!)



로망의 시간에 머물면서(‘산다’라는 동사가 허락하는 세상에서) 오랜 회사 생활을 정리한 뒤 비로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을 어떻게 채우고 앞으로의 삶을 어떤 모양으로 빚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의 답을 찾는 김민철 작가의 파리 여행기. 아니 파리 생활기. 덕분에 파리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 앞으로의 삶의 모양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참 만나고 싶었지, 이토록 낯선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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