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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베이커 -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ㅣ 현대 예술의 거장
제임스 개빈 지음, 김현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평점 :
한 강연에서 어떤 책을 주로 읽느냐는 질문에 김영하 작가가 예술가의 전기 읽는 걸 추천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때마침 필립 글래스 자서전을 읽고 난 뒤라서 그런 독서가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에 대해 크게 공감이 되었다.
평소 호감 가는 아티스트의 전기나 자서전이 있다면 꼭 한 번 읽어보자. 작가와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 하나 없이 예술을 감상할 때의 느낌과, 작품을 만들어낸(연주한) 아티스트의 삶을 들여다본 뒤의 감상을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쳇 베이커의 연주와 노래는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재즈 음악이라고 생각해서 참 많이 들었다. 그의 음악은 시간대와 날씨를 가리지 않고 상황과 공간에 편안하게 녹아들어 늘 더 괜찮은 무드를 만들어 주곤 했다. 하루종일 틀어놔도 어색하거나 튀지 않지만 나른하고 심심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오로지 ‘쳇 베이커’의 이름만 알던 시절엔 ‘이렇게 편안한 재즈 음악도 있구나’ 생각했고, 웅얼거리는 듯한 발음과 목소리도 한 톤으로 느껴졌다. 그의 음악에 흐르는 나른함과 여유, 적당함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가 마약 중독이었고 결국 마약 때문에 생을 마감한 아티스트 중 하나라는 사실만을 알았을 때와, 그의 전기를 다 읽고 난 뒤의 느낌도 좀 다르다. 그의 중독과 집착 수준은 단지 ‘마약 중독’이라는 네 글자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1000쪽이 넘는 지면에 빼곡하게 담겨있는 비운의 트럼페스트의 삶은, 안타깝고도 처연했다. 타고난 재능과 빼어난 외모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고, 여자들과의 숱한 스캔들을 일삼으면서도 절대로 책임지지 않는 삶. 시기 질투와 평가, 해소되지 않는 인정 욕구와 중압감, 그 모든 것을 마약으로 잊어버리던 사람. 결국 눈앞의 현실과 삶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마약을 위해 가족과 연인과 친구, 동료를 배신해가며 트럼펫을 불어댄 사람.
차분하고 부드러운 연주와 음색 이면에 존재했던 그의 폭력성, 인간으로서 참 별로인 태도들, 마약에 대한 광적인 집착 등 그 어마어마한 모순을 목도하고 나면 예전에 좋다고 생각했던 그의 음악이 더는 듣고 싶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오히려 나는 좀 슬퍼졌다. 물론 마약은 그의 자의적인 선택이었지만, 1950-60년대 미국의 상황과 시대가 인간을 어떻게 집어 삼키게 되는지를 보면서 갖가지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달콤한 꿈을 꾸는 듯 들려오던 그의 연주가 씁쓸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