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률과 문해력

우리나라에서는 문장을 읽지 못하는 문맹률이 거의 제로 수준이다. 그러나 문장을 읽을 줄 아는 문식력(文識力)이 있다고 해서 문장을 이해할 줄 아는 문해력(文解力)까지 있는 게 아니다. 한국어는 대부분이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고 한글로 표기된다. 그래서 한글을 읽지만 한자어의 뜻을 몰라서 문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제를 적으라‘는 문장을 예로 든다면 가제(假題)는 임시 제목을 뜻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먹는 가재로 오해한다. 오히려 ‘낄끼빠빠‘ 같은 한글 신조어에는 능하다.

한자어는 어려우니까 계속 덜 쓸 것이고 한글 신조어는 쉬우니까 계속 더 쓸 것이다. 여하튼 한자어에 미숙한 세대가 늘어날수록 문식력과 문해력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읽지만 알지 못하듯이 보지만 알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무관심하게 보거나 눈이 어둡거나 눈이 열리지 않아서 그렇다. 읽는다고 해서 읽는 게 아니고 본다고 해서 보는 게 아니다. 읽고 알아야 하고 보고 알아야 한다. 문해력이 있어야 하고 안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육신의 육안으로는 겉모습을 보게 되고 마음의 심안으로는 속모습을 보게 된다. 영의 영안으로는 새 차원을 볼 수 있다. 육안으로 대충 보지만 말고 더 깊게 보는 심안을 길러야 한다. 영안이 열려 새 차원까지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지금 보이는 현상은 아직 안 보이는 차원과 맞물려 있다. 지상계와 천상계는 꽈배기처럼 서로 꼬여 있을 것이다. 엘리사는 영안이 있어서 하나님의 전차부대를 보았으나 육안뿐이던 청년 사환은 시리아 전차부대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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