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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ㅣ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종전과는 좀 다른 방법으로 글짓기를 해 봤다고 해서 내 소설기법에 어떤 변화의 계기를 삼아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가가 자화상 한두장 쯤 그려 보고 싶은 심정 정도로 썼다. 여지껏 내가 창조한 인물 중 어느 하나도 내가 드러나지 않은 이가 없건만 새삼스럽게 이게 바로 나올시다.라고 턱 쳐들고 전면으로 나서려니까 무엇보다도 자기 미화의 욕구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게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작가의 말 중에서
내가 다시 야심차게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박완서의 신작 <아주 오래된 농담>이 막 출판되어 서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였다. 데뷔30년을 맞이한 그녀가 칠순에 뱉어낸 글은 징그러울만치 묘사가 신랄하고 혹독했다. 필치도 필치려니와 나는 그 나이에 그만한 관찰과 고증력에 대해 혀를 내둘렀었다.
2000년, 내가 간 학교에서 난 묘한 분리감과 격리감에 시달렸었는데 그건 다름아닌 서정과 서사의 대결이었다. 나는 의도와 상관없이 서정파로 몰렸고 실상 그 때는 별 소속이 없었던 나는 서사파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정 쪽에 서있는 꼴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도 그랬던 것 처럼 우습기 짝이 없다. 나는 굳이 그걸 구분하기 위해 핏대를 세우는 이들이 가련해 보이기도 하면서 소속감도 얻고 싶은 묘한 이중 감정을 지니고 있었던 거 같다.
새삼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읽은 이 작가의 말에서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결국은 그녀의 솔직함때문이다. 남에 비해 자신을 향해 미화된 붓끝을 시인한 그녀에게서 경륜과 나이가 주는 편안함 따위를 알았다. 나 역시 시간 속에서 모든 걸 용서 받게 될 것 같은 면죄부같은...
그러면서 책 속 곳곳에서 위의 논쟁이 얼마나 우스운가를 자꾸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문체들에 그야말로 해지는 줄 몰랐다. 문득문득 서정어린 그녀의 서사 속에서 그만치의 감정들이 내 안에서 옹골지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책장을 넘기지 못하기도 하고...마치 내가 그녀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은근 오만방자한 이런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책 뒤에 붙은 거장 김윤식 선생님의 글은 괜스레 우습게 여겨져 몇 자 읽다가 덮었다. 오직 기억에만 의존해 쓴 이 글에 뭘 덧붙일 수 있단 말인가 해서다.
그녀의 미화된 기억을 따라 흡족한 시간을 보냈다. 내용은 없는 이런 머릿 속 말만 '괴물'이 뱉어낸 인간들처럼 자꾸 쏟아진다. ???
그녀가 별처럼 빛나는 이유는 그녀가 아직도 나이에 맞지 않게 현재는 물론이요, 기억 속 과거까지 열심히 닦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지를 떨어 세상에 내어 놓기 때문이며, 감히 서른 조금 넘은 내가 그녀라고 불러도 좋다고 허락받은 것처럼 자신이 글을 통해서 나를이완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녀가 비오는 이 밤에도 별로 빛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