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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화염에 무릎 꿇어라, 세계여 1 - L Novel
스메라기 히요코 지음, Mika Pikazo, mocha 그림, 김장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24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여기는 이세계, 눈앞에 여신. 제발 이세계를 구해주세요. 여신 앞에는 여고생 5명. 100년 전 마왕이 부활인지 뭔지 아무튼 생겼는데 이세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늘 생각하지만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마왕도 어쩌지 못하는 여신이라니 뭔가 문제 있는 거 아닐까. 그런데 얘들 뭘 믿고 소환했으며, 뭘 믿고 부탁하는 거지? 소환한다고 다 용사이지는 않을 거잖아요. 필자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여고생 5명은 범상치 않은 성격과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신을 무릎 꿇게 만들었으니까요. 자, 이제 여고생 5명을 소개하겠습니다. 보통은 소개 잘 안 하는데 그만큼 파격적이죠.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인체 실험을 하며 망가트리고 이어 붙여서 뭔가를 만드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사이코(참고로 본명이고 여고생)',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악으로 규정하면 배고 보는 사무라이 '진(참고로 여고생)', 외계에서 만들어져 지구로 보내진 메이드 로봇 '프로토(겉모습은 여고생)', 원래 독을 뿜게 되어 있으나 고장 나 폐기된 생체 병기 '츠츠미(겉모습은 로리 여고생)', 그리고 여주 '호무라(여고생)'... 그녀는 불을 씁니다. 치트는 아니고 원래 가진 초능력이라고 하는데, 전세 지구는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호무라 포함 그녀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죠. 이런 면면들에게 여신은 마왕을 무찔러 달라고 합니다.
이세계에 왔으니 할 일도 없고 여신이 무릎 꿇어가면서 부탁하니까 해주긴 하겠는데, 정의감이나 선의에 따라 해주겠다가 아닌 재미있어 보이니까 해보겠다는 당찬 포부를 보여주죠. 근데 얘들 여신에게서 치트를 받은 것도 아닌데, 뭔 근자감으로 이럴까 싶었는데요. 어느 정도 버프는 받는 모양인데, 이세계에 소환되었다고 다 먼치킨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전세 지구에 있을 때부터 일본인보다는 나은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고, 여신과 독대를 끝내고 지상에 보내졌을 때 약속된 흐름처럼 도적에게 습격 받는 마차를 구해주며 그녀들은 어느 정도 실력은 가지고 있다는 게 밝혀지긴 합니다. 하지만 마왕은 도적보다는 강하겠죠. 그래서 마차 주인을 따라 도시에 가게 되고 거기서 군에 입대해 실력을 쌓아간다는 게 이번 1권에서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여느 판타지처럼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기 위한 여정의 시작쯤 되겠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단순히 마왕을 무찌르러 가는 이야기면 재미가 없을 테니 개성이 강한 여고생들의 좌충우돌에 더 중점을 둔다는 것입니다. 출신도 파격적인데 재미있을 거 같아 해보겠다는 성격은 일단 저지르고 보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죠. 일단 일을 저지르고 봅니다. 마차 주인의 집을 제 집인 양 이용하고, 그의 위장을 빵꾸내는 일들은 유쾌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얘들 이세계에 온 연유가 무엇인가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죽어서 왔다고 했으니 아무튼 지구에서 죽었으니까 여신이 소환한 모양인데, 이번 1권에서는 여주 호무라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어릴 적 체질인지 불을 뿜을 수 있게 된 그녀에게 보여준 가족의 냉대와 사회적인 시선. 나와는 다름에서 오는 편견.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에요를 어필해야만 했던 소녀. 주변은 그녀의 가슴에 아무렇지 않게 대못을 박고, 그것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늘어놓는 말들. 좋아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 그녀를 비웃은 사회. 그래서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죠. 그리고 그때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쓰레기들을 불태워 죽이고 싶어' 그녀는 5명 중 최강이자 정신이 가장 크게 망가져 있다고 역설하기 시작하죠. 처음엔 주변에 폐를 끼치기 싫어하고, 쭈뼛쭈뼜 댔던 그녀가요. 실력을 키우기 위해 도적을 처리하면서 다시금 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이 플래시백 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지구에서 겪었던 일들은 [부조리], 이세계에 와서 도적과 싸우며 다시 마주하는 [부조리]. 시놉시스에서는 기회만 있으면 뭔가를 불태우고 싶다며 가볍게 언급이 되어 있지만, 실상은 매우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주의 힘은 괴롭힘의 트라우마에서 온다는 것을...
맺으며: 저마다 개성이 강한 캐릭터를 따로 놀지 않고 잘 융합 시키는 이거 하나는 정말 좋습니다.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사이코와 무뚝뚝하지만 일단 배고 보는 사무라이, 인간을 하등 생물로 보는 메이드 로봇, 귀엽지만 독을 뿜는 로리 로봇, 그리고 이세계에 와서 감정을 개방하는 여주. 섞일 수가 없는 캐릭터들을 잘 묶어서 처음엔 투닥거리다가도 강적을 만나 연계를 펼치고 우정을 쌓아가는 게 참 흥미롭죠. 스포일러에다 말주변이 없어서 제대로 표현은 못 하겠는데, 대사도 참 찰지게 잘합니다. 허를 찌르는 언어와 장면도 제법 있죠.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여신에게 소환되었다고 해서 치트를 받지도 않으며, 무쌍을 찍지도 않는다 것입니다. 물론 도적들은 순식간에 해치우지만 그 이상의 실력자가 나오면 도망가야 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줍니다. 즉 이 작품은 잠재된 능력을 개방하거나 실력을 쌓아가는 노력형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있다고 꼭 사람들을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도 던집니다. 누군가가 지켜 주니까 안심하고 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다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 여주의 여전히 착한 아이로 있길 원하는 것과 겹쳐져 사태가 최악으로 향하는 장면들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