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녀전기 11 - Alea iacta est, Novel Engine
카를로 젠 지음, 한신남 옮김, 시노츠키 시노부 그림 / 데이즈엔터(주)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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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지에서 타냐가 들고 있는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감자'입니다. 몇 년째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는 있는데, 옆 나라와 국지전이 아닌 여기 집적 저기 집적 거리는 통에 온 사방이 적으로 가득 찼어요. 물자는 진작에 바닥에 나버렸고, 식량 사정은 최악을 달리고 있죠. 그래서 타냐는 어엿한 소녀로 자랐지만 영양실조인지 군에 들어올 때 나이(9살) 그대로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존재X가 그녀의 키를 성장하지 않게 손을 쓰지 않았다면 영양실조가 맞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손에 든 저 감자는 옆 나라와 비교해서 먹을만한 게 아니라고 역설하고 있죠. 물자를 최우선으로 돌리고 있는 군의 실정이 저런데 민간인은 표현이 안 되어 있지만 아사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임에도 제국은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작전명 발키리'가 2차대전 독일 군부 상층부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죠. 전쟁을 지속했다간 남는 건 없고 모두 파멸뿐이라는 생각에 엘리트들이 일으킨 반란, 이 작품은 2차대전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서 유사하게 흘러갑니다. 타냐를 비롯해 어떤 고위 장성(이름 자체가 스포일러라서, 이하 온건파)은 확전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전쟁 지속 강경파를 축출하고 싶어 하는데요. 피폐해질 데로 피폐한 국내 사정과 젊은이는 다 산화해버리고 어린아이와 노인들 밖에 없는 나라에서 전쟁 지속은 그야말로 기름을 드럼통째로 짊어지고 불에 뛰어드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죠. 이쯤에서 종전을 맺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글쎄 이넘의 강경파가 물자 부족으로 뭘 잘못 처먹었나 느닷없이 남쪽 동맹이자 중립국인 '이르도아 왕국'을 치자며 설레발을 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르도아 왕국은 아직 뭔 짓을 하지도 않았는데 꿈자리가 사납다고, 그나마 남쪽(이르도아 왕국)에서 조금이나마 물자가 보급되면서 산소호흡기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 주제에 마지막  숨구멍까지 막아버리자고 하니 타냐로써는 미칠 노릇이죠. 게다가 강경파는 '자네, 승진할 생각 없나?' 이럽니다. 유능함의 끝은 꿀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독으로 돌아온 꼴이 되어 버렸죠. 침몰 중인 배에서 뛰어내려 다른 배로 갈아타듯 이직을 심각하게 고민 중인 타냐로써는 기분 좋은 제안일 리가 없어요. 전쟁 초라면 모를까. 그렇다고 대놓고 거부하자니 이미지가 안 좋이 질 거 같고, 다른 회사에 가서도 이전 직장에서의 커리어를 이력으로 쓸려면 좋은 이미지로 나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보니 발을 뺄 시기를 자꾸 놓쳐만 갑니다.

 

그래서 결행, 일단 내가 살고 봐야죠. 회사 생활하면서 제일 짜증 나는 부류가 사람이 어쩌다 한번 실적을 높이면 그 기준에 맞춰버리는 상사가 아닐까요. 데이터로 보여주는 국내 물자 사정을 들이밀어도 그동안 어떻게 해왔는데 앞으로도 해봐라라고 하니 미치고 졸도할 노릇. 강경파가 그렇다고 '무타구치 렌야(자세한검색 해보셈)'도 아니라는 것에서 더욱 짜증이 밀려올 뿐입니다. 사람이 악에 받치면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하죠. '밤길 조심해라.' 그렇게 요단강 건너까지 친히 모셔다드립니다. 이제 종전을 맞이할 수 있겠지. 근데 나비 쫓아 낭떠러지로 쫓아가본 적이 있나요. 발밑을 신경 안 쓰고 눈에 보이는 것만 쫓은 결과 목숨이라는 비싼 대가를 요구하죠. 강경파를 없앴더니 온건파가 왜 설레발을 치냐고요. 나도 남쪽(이르도아 왕국)을 좀 쳤으면 좋겠는데...

 

분명 얻어맞고 시작한 전쟁인데 왜 자꾸 말릴까. 때린 놈이 벌을 받아야지 왜 자위적 차원에서 반격한 피해자가 되려 나쁜 놈이 되어 온 사방에서 두들겨 패냐고요. 세상에 이렇게 부조리한 것도 없을 테죠. 법에 정당방위의 요건이라는 게 있습니다. 보통 국가라면 과도한 반격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데(아닌 나라도 있겠지만) 타냐의 제국엔 이런 법률이 없나 봅니다. 난 한 놈만 팬다는 신조에 따라 제일 처음 내게 싸다구 날린 놈만 줘팼으면 되었을 텐데 꿈자리가 사납다고 눈에 뵈는 게 없이 광역 싸다구를 날렸으니 다구리 당해도 어쩔 수가 없죠. 문제는 광역 싸다구 날린 거에 대해 일말의 반성조차 안 하더라는 거. 종전을 기약하며 강화를 모색하러 갔더니 '너 님 미친 거 아님?'이라는 소리를 들어 버립니다. 뺨 한대 맞은 것에 불과한데 반격이랍시고 상대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놓고도 반성의 기미기 없으니 주변의 시선이 고을 리가 없어요.

 

그렇게 타냐와 그녀의 부대는 새로운 전선에 투입됩니다. 여기서 강경파의 확전을 그토록 꺼려 해놓고 그녀는 왜 발을 담그는 걸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엔 필자의 몸 상태가 안 좋아 이야기의 뜻을 제대로 이해 못한 측면도 있지만 확전에 대해 일말의 의심이나 거부감 없이 선봉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더니, 그녀와 그녀의 부대는 거지도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제국 내 물자 상황은 보리 죽도 못 먹을 정도로 처참한데 남쪽으로 내려오니 흰 빵에 고기에 원두 등 눈에 돌아갈 지경인 거죠. 출동이 떨어져 나가야 되는데, 군율 하면 타냐만큼 빡신 상관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부대원들이 입에 뭔가를 욱여넣기 바쁜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함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노가다하는 타냐는 웃겨 죽습니다.

 

맺으며, 고도의 정치적 이야기라든지 이데올로기 등 범인(凡人)으로써는 허들이 높은 이 작품에서 그나마 타냐와 그녀의 부대원들이 부대끼는 이야기로 숨통이 트이곤 하는데 이번 에피소드에서 타냐는 별로 안 나옵니다. 그래서 읽는데 좀 시간이 많이 걸려 버렸군요. 그래도 후반에서 타냐가 꼼쳐둔 초콜릿을 부대원에 빼앗기게 되자 시무룩해지는 것이나,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이나(직설적으로 표현은 안 되어 있고 이 작품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신사적으로), 노가다하는 모습에서 조금이지만 유쾌하기도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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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공작으로 전생했으니까, 이번엔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4 - Novel Engine
아이다 리즈무 지음, nauribon 그림, 박경용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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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10년 동안 답답해서 어떻게 참았을까. 이 작품에서 비극의 히로인이라고 하면 '샬롯'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국에 속하는 '휴잭'이라는 왕국에서 왕녀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던 그녀, 그러나 10년 전 몬스터 떼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말아요. 어떻게 도망치기는 했으나 노예상에 붙잡혀 인생 끝장나게 생겼고, 마침 정령에 이끌려온 주인공 '데닝'에 의해 구해지죠. 안도도 잠시, 이제 왕녀로서의 생활은 끝이 나고 그의 종자로서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참 못 볼 꼴 많이 봅니다. 온갖 망나니 짓을 저지르는 주인(데닝) 때문에 마음고생이 끊이질 않고, 그(주인)가 집안에서 눈 밖으로 나버리는 바람에 도매금으로 자신(샬롯)도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월급도 깎여서 식당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등 차라리 노예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고생을 많이 했더랬죠.

 

근데 그 멸망해버린 휴잭의 수호룡 흑룡이 찾아오면서 그녀의 인생은 졸부 인생으로 바뀌어 갑니다. 드래곤 왈: 그녀(샬롯)의 먼 조상의 목숨을 대가로 나라를 지킨다는 계약을 하고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나라가 멸망했네? 지키고자 했던 나라에 가보니 사람은 없고 몬스터만 바글 거리는 게 아니꼬워서 한바탕 브레스로 긁어주고 마침 바람에 실려온 그녀(샬롯의 조상?)의 향기(?)를 쫓아 마법 학원에 왔더니 조상하고 비슷하게 생긴 여자애가 자기를 퇴치하겠다는 양 꼼지락거리며 앞으로 나온다. 먼 조상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다는 분함, 조상만이 아니라 대대손손 위기 때마다 자손의 목숨을 대가로 나라를 수호하겠다고는 했는데 지금은 나라가 멸망해버렸으니 저 왕녀(샬롯)를 어떻게 해야 하나.

 

주인공 데닝은 그런 흑룡을 무찌르고 일약 스타덤에 올라버렸습니다(다짜고짜는 아님, 자세한 건 스포일러). 그동안의 온갖 말썽쟁이 칠흑 돼지라는 오명을 벗어 버리고 구국의 영웅으로 등극하죠. 이미지는 떨어질 땐 고속도로지만 다시 올리려면 걸어서 63빌딩입니다. 주인공 데닝은 걸어서 63빌딩을 올랐어요. 근데 여기까진 좋으나 왜 커밍아웃을 해가지고 '샬롯'의 심기를 건드리는가. 그동안 그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철저히 비밀로 해왔던 그녀의 비밀을 하필 드래곤을 쓰러트리고 이실직고 하는가. 비밀을 말할 때는 진솔하게 서로 마주 보며 차분하게 하는 것, 그동안 자신의 비밀을 비밀로 했다고 단단히 삐져버린 샬롯은 주인과 종자라는 입장을 망각하고 기고만장해지기 시작하는데요. 그동안 돼지 시다바리 하면서 서러웠던 걸까요. 자, 이제 왕녀라고 밝혀졌으니 에헴 나도 왕녀 취급 좀? 이럽니다.

 

전쟁의 기운이 날로 커져만 가는군요. 북쪽 도스톨 제국은 고만고만한 나라들을 집어삼키며 대륙 맹주로 부상하기 시작하고 남방에 위치한 다리스(주인공이 사는 나라)등 다른 나라들은 연합해서 대응을 하려 하지만 녹록지가 않아요. 그런 와중에 지금은 멸망해버린 휴잭(샬롯의 나라)에 도스톨 제국 군인으로 보이는 먼치킨이 한 명 들어와 있는데 조사 좀이라는 퀘스트가 주인공에게 내려집니다. 주인공은 알고 있어요. 그 먼치킨으로 인해 도스톨 제국은 머지않은 미래에 전쟁을 일으키고 다리스 등이 휘말려 세계대전이 된다는 것을. 자, 세계의 운명이 주인공 어깨에 달려 있음요. 이쯤 샬롯과는 냉전 중이고, 관계는 최악을 치달아 갑니다. 뭐, 나름대로 생각은 하고 있었다지만 애초에 샬롯도 데닝에게 비밀로 해놓고 정작 데닝이 비밀로 한 것에는 삐지는 발암 1기가 시작돼요. 

 

뜬금없지만 이 작품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발암적 요소를 안고 있어서 보고 있으면 찌릿찌릿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 발암적 요소는 불쾌하다는 게 아니라 순진하고 순수한 애들을 보는 거 같은 그런 발암류랄까요. 마치 내 마음을 몰라줘서 삐지는 여친 같은, 몇몇 히로인을 예로 들면 알레시아는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도는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보는 거 같죠. 지동설은 먹히지가 않아요. 요컨대 지구는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그렇게 돌아야만 하죠. 하지만 속마음은 남들과 어울리고 싶은 지동설을 믿고 싶은데 그놈의 고집과 프라이드가 허락하지 않아요. '카리나'는 내가 왕녀다라며 남의 마음과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내가 하라면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주인공을 사자 우리에 집어넣으려 하죠. 그런 주제에 방구석 폐인이고.

 

그리고 진 히로인 '샬롯'은, 우선 손에서 마법 지팡이를 내려놓고 말하자. 그녀는 마법계에 있어서 요리계의 이승기죠. 그녀는 마법을 쓰면 안 돼요. 근데 억척같이 마법을 쓰려 합니다. 노력파라서 어느 정도 성과는 내는데, 결과가 좋지만은 않아요. 마법의 매개가 되는 정령들이 그녀를 외면할 정도니 말 다했죠. 그리고 왕녀라는 신분이 밝혀지자마자 왕녀 취급 좀이라느니 태도가 돌변해서 주인(데닝)과 맞다이 까려고 하지 않나, 지금은 몬스터가 득실거려서 군대도 소용없는 휴잭(샬롯의 나라)에 가겠다고 떼를 쓰니 난감함이 쓰나미로 몰려옵니다. 가겠다는 그 이유도 황당하기 그지없어요(자세한 건 스포일러). 주인공 데닝에게 있어서 여난이죠. 알레시아는 주인공 데닝이 판 무덤(그녀와 약혼했으면서 차버렸거든요.)이기도 해서 까임 당해도 자업자득이긴 한데.

 

아무튼 전쟁 밖에 없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도스톨 제국이 휴잭에 잠입시킨 먼치킨을 제거하기로 하고 데닝과 샬롯이 파견됩니다. 진정한 오크 돼지가 뭔지 보여주마라는 듯 주인공 데닝은 오크로 분장해서 싸돌아다니는데 이건 별로 재미없으니 넘어가고, 막상 휴잭에 들어가 보니 몬스터 마경이라고 해서 사람들의 기피의 대상이었던 땅은 어째 인간보다 더 인간다움이 묻어난다? 그리고 밝혀지는 휴잭을 점거한 몬스터들의 진의, 인간의 말을 하는 픽시 '에어리스'와의 만남으로 샬롯은 심경의 변화를 보이는데... 그제서야 어릴 때 자신을 구해준 게 누구이며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샬롯.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을 지적해주지 않으면 어리석음을 눈치 못 채죠. 에어리스와의 생활 덕분에 여전히 발암 1기에서 2기로 올라가려는 알레시아와 대조적으로 어른으로 한 단계 성장을 보이게 되는 샬롯이랄까요. 이런 성장을 정말 좋아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는 것.

 

맺으며, 발암 제조기 알레시아 덕분에 개그가 사망하지 않고 간신히 인공호흡하고 있는데 조금 더 개그를 집어넣어 줬으면 좋겠더군요. 사실 좀 무미건조해요. 주인공 데닝의 '나는 알고 있다. 미래 어떻게 되는지'같은 독자로서는 알고 싶지 않은 스포일러를 까데기 하는 통에 재미가 반감되고, 사실 주인공이 미래를 알고 있고 그 미래를 주인공이 바꿔 간다가 이 작품의 아이덴티티이긴 한데 걸핏하면 알고 있다고 해서 눈에 좀 거슬려요. 게다가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죄다 둔감해서 타인의 감정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게 있죠. 이 부분은 나중에 알아채고 진실된 마음에 감동을 받는다 같은 클리셰를 집어넣으려고 했나 본데 이건 이젠 개도 거들떠 안 보는 주재라는 것. 돌려 말하면 그만큼 풋풋한 청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히로인들에게 휘둘리는 주인공을 보고 있으니 불쌍하기도 하고, 호구스럽기도 하고, 부자연스럽기도 하더라고요. 현실에서 삐진 여친 달래려고 사과했더니 뭐가 미안한데?라고 나오는 여친에게 어떤 대응을 보여야 할까 같은 게 있다고 할까요. 점수를 주자면 10점 만점에 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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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나이=(이퀄) 여친 없는 역사인 마법사 9 - J Novel Next
분코로리 지음, 이경인 옮김, M다 S타로 일러스트 / 서울문화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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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금 강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하세요.

 

 

 

우리 속담에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죠. 이 작품에 빗대어 본다면 주인공 다나카가 딱 그렇습니다. 온리 지력에만 몰빵 받은 스텟으로 인해 마법 하나는 끝내주는데, 행운(러키) 스텟은 레벨업을 하면 할수록 마이너스로 내려가서는 뭔 일을 해도 제대로 되는 게 없어요. 주변에서는 자꾸만 실행 불가능한 미션을 내리지 않나, 들러붙는 여자들은 인외(마물)에 어딘가 정신 상태가 사차원에 사는 그런 형국이죠. 그로 인해 히로인 에스텔이 저지른 성녀 말살은 다나카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그이(다나카)를 위한답시고 대성국에 쳐들어가 성녀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끔살을 해버렸으니(1), 이 뒤치다꺼리는 누가 해야 될까. 이젠 다나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페니제국 전체의 문제로 커져버렸습니다.

 

마왕을 자식으로 길러서 세계의 대모(大母)가 되고 싶었다는 진실이야 어떻든 세상에서 빛으로 추앙받는 성녀의 죽음이 불러온 참극이 시작됩니다. 주로 다나카에게, 어째서 내가 싼 똥도 아닌데 내가 치워야 하는가. 다나카를 위시한 페니제국은 전 세계의 적으로 낙인찍혔고, 바람 앞의 등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전에 부활한 마왕에 의해 세계가 초토화되고 있습니다만? 내 알 바냐며 페니제국의 왕은 서쪽의 용사를 내세워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하는데요. 결국 정면돌파를 선택해버립니다. 요컨대 민초들에게 추앙받고 있는 대성국하고 맞다이 까기로 한 거죠.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서 다나카의 마이너스 행운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되는데요. 왕은 그에게 오더를 넣어 뭐라도 해봐라고 합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입지 좀 다질려고 무술(마법) 토너먼트 대회를 개최...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말입니다. 당대 최악의 마왕이 부활해서 날뛰고 있는데 이러고 싶을까 하는 일이 벌어져요. 그러거나 말거나 서쪽의 용사를 밀고 있는 페니제국으로써는 서쪽의 용사를 어떻게든 민초들의 우상으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갑니다. 주로 다나카가, 요컨대 얼굴마담이 필요한 시점. 참고로 대성국 쪽에서는 동쪽의 용사가 출전한다는군요. 그는 예전에 소피아의 다리를 댕강 잘라버린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번에 아픈 꼴을 좀 당해봤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너굴맨이 처치해줬다는 짤이 들어갈만한 일이 벌어지는 게 조금은 유쾌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토너먼트가 시작은 되는데, 다나카의 마이너스 행운은 어디에 가지 않고 계속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지금에야 언제나 긍정맨으로 세상만사 좋게 보는 다나카지만 이세계로 넘어와 고생을 참 많이 했죠. 못생겨서 감옥에 갇히고 여자(주로 에스텔)에겐 납작 얼굴 생김새로 인해 온갖 독설을 들어야만 했어요. 돈 한 푼 없이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삶을 꾸려야 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비참하다시피 아부해서 생을 연명하는 등 그야말로 흙수저가 따로 없었습니다. 이게 다 그만의 살아가기 위한 처세술이라는 것에서 좀 씁쓸하게는 합니다만. 아무튼 노력하는 자에게 빛이 있나니. 비굴했던 삶 끝에 지금은 백작이라는 귀족의 자리까지 꿰찼군요. 그동안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백작이라는 자리는 남는 장사가 아니라 오히려 손해 본 장사지만 뭐 어떠리요. 지금은 번듯한 마을도 만들었고, 인외(마물)에 일부는 정신 상태가 병원에 가봐야 할 정도로 안 좋지만 나름대로 히로인들도 있고.

 

그런 삶을 지키려면 지금의 미증유의 사태를 어떻게든 넘어서야겠는데 주위에서 도와주질 않는군요. 그토록 나오지 말라고 했던 드래곤(로리곤)과 에디타 선생의 난입은 그렇지 않아도 탈모로 고통을 받고 있는 다나카의 두피의 상태를 더 안 좋게 만들어 버립니다. 안 그래도 폭발물이 발견되는 등 대성국에서 테러하지 않을까 노심초사인데, 그걸 비웃듯 아니 다나카의 마이너스 행운을 찬양하듯 끔살 당했을 거라 여겼던 성녀의 등장은 지금의 다나카도 예상하지 못했겠죠. 정말 다나카의 마이너스 행운의 위력은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걸로 끝나지 않고 다나카에게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는데요. 우리 속담엔 산 넘어 산이 있고,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있죠. 대성국이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성녀와 그녀를 죽이는데 일조한(경위어 어떻든) 페니제국, 그리고 여기서 죽은 줄 알았던 성녀의 등장.

 

그리고 때에 맞춰 에스텔의 난입은 사태를 더욱 점입가경으로 만들어 갑니다. 아니 어떻게든 좋게좋게 해결하려는 다나카를 이리도 못살게 굴 수 있을까 하는 상황 연출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하죠. 근데 사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건, 그나마 소피아(메이드)가 있어서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소피아의 행운 수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다는 건데, 소피아는 다나카의 측근(비서)이죠. 어쩌면 이 모든 게 소피아의 행운이 불러온 희극이 아닐까. 그녀의 행운 덕분에 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게 그녀(소피아)가 다나카에게 맞선을 요청한 덕분이 아닐까 하는 개그물이면서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작 본인(소피아)은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서민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슬프다고 할까요.

 

맺으며, 각양각색의 캐릭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죠. 드래곤(로리곤)과 에디타 선생의 투닥질이라든지, 소피아의 서민적인 부들부들 모드라든지, 언제나 자리를 잘못 펴서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 에스텔이라든지, 쇼타 거시기 등등, 이런 캐릭터 때문에 사건에 휘말리고 해결하지만 돌아오는 건 없는 인생을 사는 주인공. 그래도 백작의 지위와 드래곤 시티라는 마을을 손에 넣었으니(맨땅 헤딩으로 만든 거지만) 실패한 인생은 아닌데... 아무튼 이번 이야기는 언제나 의욕 과다로 헛도는 에스텔이 싼 똥 때문에 곤란을 겪게 된 페니제국의 위신을 살리고 마왕을 무찌르기 위한 전초전 준비를 위한 토너먼트 개최입니다. 이 토너먼트도 밋밋한 게 아닌 조금은 개그를 동반하고 있죠.  하지만 이 개그도 중반까지 일 뿐이군요. 후반은 현실로 '진짜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10권에서 제대로 언급하겠지만 작가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안다고 할까요. 그건 인트로만 보여주고 본 내용은 보여주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안달하게 만드는 것.


 

  1. 1, 요약하자면 다나카는 마왕을 품고 있던 성녀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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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 아트 온라인 21 - 유니탈 링Ⅰ, J Novel
카와하라 레키 지음, abec 그림, 박용국 옮김 / 서울문화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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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금 강한 스포일러가 들어가 있으니 주의 하세요.

 

 

필자가 늘 생각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명탐정 코난과 김전일을 가둬두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여느 작품에서 주인공이 가는 곳마다 뭔 일 터지는 것도 어쩌면 주인공이 근처에 가니까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주인공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주인공 때문에 고통을 받는, 어쩌면 이 세상에 악이 있다면 주인공이 악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는 잘 난 것도 생각해볼 일이라고 괜히 나댔다가 주인공과 대척점(가령 이 작품에서는 카야바 아키히코)에게 눈도장 찍혀서 너라면 나의 이상을 실행 해주겠지라거나, 너라면 분명 좋은 결과로 이어질 거야라며 주인공에게 모든 걸 떠 맡기는 바람에 애꿎은 엄한 사람들이 고생 길을 걷게 되는 경우를 보기도 하는데요. 정의를 실현하는 주인공이 타인을 고통받게 하는 모순, 물론 이 모든 건 필자의 망상이니 태클은 사양합니다.

 

아무튼 이제 VR게임이라고 하면 치가 떨릴 만도 하겠건만 오늘도 키리토는 ALO (신)아인크라드 22층에 마련한 집 '로그 하우스'에서 '아스나'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군요. 아스나가 집에서 90분이나 걸려서 등교한다는 걸 알면 오토바이도 있겠다 가서 좀 도와주던지. 부모끼리 타협하게 해서 자기 집에 데려오든지, 전철과 버스 갈아타고 등교하는 아스나가 고생이 참 많아요. 자기 딴에는 재활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의 키리토 곁엔 '앨리스'가 매실 장아찌를 믹서기에 간 듯한 음료를 마시고 있다는데 무슨 맛일까(그야 매실 장아찌 맛이겠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아스나가 로그인을 했긴 했습니다만. 어째서 앨리스를 보자마자 방의 기압이 올라가는 착각을 불러올까, 그야 방에 키리토와 앨리스 단둘만 있으니까지. 눈은 웃고 있지 않다라는 말은 여기서 하는가 봅니다.

 

자, 느닷없지만 지진이 일어나서 키리토와 아스나 둘의 보금자리 로그하우스(집)가 반파되어버렸습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군요. 뜬금없지만 인간들이 재미로 개미집에 물을 부어 홍수를 만들 때 개미의 기분은 어떨까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함인지. 아무튼 개미에게도 감정이 있다면 인간을 욕하면서 다시 집 지을 생각에 앞 날이 암담해 할 겁니다. 키리토와 아스나에게 있어서 (구)SAO때부터 인연이 깊었던 '로그 하우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걸까 한 번쯤 하늘을 바라보며 원망도 쏟아낼 법도 하겠건만 그런 한탄할 겨를도 없다는 듯이 집 내구도는 13시간 후에 0이 되어버린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고가 내려집니다. 이 집으로 말할 거 같으면 둘의 소중한 딸 유이를 만나게 해줬고, 키리토와 아스나 둘의 관계를 진전시켜준 둘도 없는 보물과도 같은 집이죠. 특히 아스나의 경우는 보수적인 엄마에게 인정을 받게 해줬던 아주 고마운 집이기도 하고요.

 

근데 문제는 집이 부서진 것만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날 리 없는 게임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구)SAO 1층에서 그때처럼 다시금 하늘이 변화를 보이면서 이들에게 또다시 그날의 악몽을 되살아나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혼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레벨과 스텟 초기화 및 장착된 아이템과 애용하는 템 이외의 장비가 소실되어 버리죠. 집은 빠개졌지, 장비는 거의 다 없어졌지, 끼고 있는 템도 얼마 뒤 스텟 초기화로 인해 낄 수조차 없다고 하지. 사면이 초가지붕이라는 건 이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을 겁니다. 게다가 템 벗으면 스텟 올리기 전엔 못 낀다고 진작에 좀 알려주든지 템 다 벗고 나니까 밝혀지는 건 또 뭐람, 키리토는 졸지에 팬티 차림으로 지내게 생겼습니다. 아스나야 그렇다 치지만 앨리스와 스구하(키리토 동생)의 눈은 어떡하나. 앨리스도 1년 넘게 언더월드에서 키리토를 돌봤으니 상관없나.

 

그동안의 SAO, GGO, ALO 게임을 잊어라. 이제부턴 서바이벌 게임이 시작됩니다. 부제목으로 쓴 듀랑고가 얼마 전에 서비스 종료했다죠. 아무튼 레벨 1에서 시작하는 야생이랄까요. ALO 알브헤임이라는 기반을 누가 뭣 때문에 시스템 전반을 갈아엎고 새로운 시스템을 심었는지 모릅니다. 100여 개나 되는 [더 시드] 기반 모든 게임이 한데 뭉쳐졌다는 전대미문만 이들에게 들이밀어질 뿐, 그리고 (구)SAO 1층 때처럼 어나운스로 대충 요약하면 '끝까지 살아 남아라'라는 숙제가 모든 플레이어에게 내려져요. 요컨대 석기시대부터 청동기를 넘어 철기시대를 거쳐 문명을 발전시켜라 뭐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요. 그러해서 키리토와 아스나의 집 '로그 하우스'도 다시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죠. 키리토는 빤스만 입고요. 깨작깨작 돌을 부수고 풀을 엮고, 나무를 베고, 곰을 해치우는 등 서바이벌이란 이런 거라는 걸 몸소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보통은 생활계 작품이 다 그렇듯 무미건조해지기 쉬우나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글 재주로 심심할 틈이 없는 게 특징입니다. 남편 잡는 와이프라든지, 빤스만 입고 있는 키리토의 등짝을 앨리스와 스구하가 스매시한다거나, 곰을 해치울 때 빤스차림으로 덤빈다거나, '헐벗은 원시인 주제에'라는 신랄한 독설은 배꼽을 쏘옥 빼놓죠. 거기에 시스템 변화로 사냥이든 PK든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등 불안 요소를 가미하면서 긴장감을 높이기도 하는데요. (구)SAO때처럼 로그아웃을 못하는 건 아닐까. 여기서 작가는 전략을 반전시킵니다. (구)SAO때 로그아웃을 못하게 했다면 이번엔 로그아웃을 해도 아바타가 게임상에서 사라지는 게 아닌 다시 로그인할 때까지 온존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폴리곤과 데이터로 된 아바타에 지나지 않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감정이입된 캐릭터가 타인에 의해 능욕을 당한다면?

 

맺으며, 작가가 초심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동안의 모든 시스템을 갈아엎고, 마치 이세계물처럼 무언가를 시도해서 스킬을 얻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요. 이게 식상하다기보다는 작가 특유의 글 재주로 생활계 스킬을 쓰면서 깨작깨작 거리는 게 동화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시스템 변화로 그동안의 지식이 전부 쓸모 없어졌다는 약간은 모르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을 가미한 두근거림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몰입도를 상당히 끌어올려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적절한 상황 연출 일러스트 또한 극중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려 주고요. 특히 앨리스가 키리토와 엮여 곤욕 치르는 일러스트는 참으로 훌륭한? 근데 후반부 이 작품의 외전인 -프로그레시브- 스포일러가 들어가 있더군요. 그것도 우리나라엔 아직 정발 되지 않은 이야기를,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걸 집어넣었는지 모르겠는데 혹시나 외전 -프로그레시브-를 보시는 분이라면 스포일러를 각오하고 이번 21권을 보시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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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의 하극상 제4부 귀족원의 자칭 도서위원 4 - 사서가 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V+
카즈키 미야 지음, 시이나 유우 그림, 김봄 옮김 / 길찾기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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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귀여운 맛으로 보는 작품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작가도 알고 있는지 2년이나 잠에 재워 나름대로 아직 어리고 귀여운 '마인'이라고 어필은 하려고 하는데 그런 것치곤 일을 너무 방대하게 넓혀놔서 귀여운 맛은 하나도 없고, 자기 취미 살리려다 기업을 만들고 나아가 자회사를 잔뜩 거느린 대기업을 운영하는 어린 CEO만 있습니다. 책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시작한 사업은 이제 나라 전체가 들썩 거리는 대규모 사업이 되어 버렸군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책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다 유괴 당할뻔하고, 그로 인해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음에도 그녀(마인)의 돌진력은 수그러들 기미가 없어요. 온 동네를 쑤시고 다니니 영주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을 터, 그녀가 영지 운영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아버린 영주 질베스타는 그녀를 양녀로 들이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데요.

 

어쨌거나 귀족이 되었으니 당연히 따라붙는 게 있죠. 바로 정략결혼, 책을 만들려면 종이가 있어야 하는데 양피지가 대세인 이 시대에 종이는 매우 희귀한 물품이었죠. 이걸 대량 생산하면서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는데 옆집, 뒷집, 아랫집이 가만히 있을 리 없잖아요. 종이만이 아니고 샴푸와 머리장식 등 그녀가 가진 특허(?)의 가치만 해도 우리나라의 S모 전자만큼이나 돈을 잘 버는데 이거 여자아이에다가 아직 어리네? 게다가 귀족원이라는 귀족들만 가는 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면서 이거 천재 아님? 앞뒤 분간을 못하는 특성을 살려서 왕자하고도 친구 먹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왕족만 기동 시킬 수 있다는 도서실 그 뭐냐 토끼 인형 두 마리도 깨워 버리는 마력 하며(1), 그녀를 차지하면 천하를 손에 넣는 거나 다름없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어 버립니다.

 

자, 에렌페스트(마인이 살고 있는 영지)에게 있어서 그녀를 다른 영지에 빼앗기면 어떻게 될까. 그동안 거지꼴 못 면하던 영지를 그녀를 이용해 기껏 일으켜 세웠는데 다시 거지꼴로 돌아가겠죠. 그래서 그녀의 이복 오빠(배다른 남매가 아닌 입양을 통한 남매지간)인 '빌프리트'와 결혼 시켜서 그녀를 붙잡겠다고는 하는데 문제는 이 '빌프리트'가 허당이라면 좋은 말이고 나쁜 말로 하면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는 겁니다. 내 인생에 오토는 없고 온리 수동만이 존재한다는 신조에 따라 클러치를 밟아대며 기어를 바꾸기는 하는데 조수석에 앉은 사람에게 2단으로 바꿀까? 3단으로 바꿀까?라고 매번 물어보고 정한다는 신기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란 말이죠. 할머니에게 마마보이(여기선 할마보이라고 해야 하나)로 키워져 내가 정해는 것보다 남이 정해주는 인생을 사는 참으로 안타까운 캐릭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어린애가 주인공이고 책을 만든다든지 표지가 파스텔톤 밝은 분위기라고 내용도 밝을까 했다간 큰코다칩니다. 마법이 나오는 판타지 성향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귀족 상하 관계도 그리고 있어서 사람 죽어 나가는 게 우습게 그려지는데요. 정변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당하고, 마인이 관할하는 신전을 공격했다가 마을 전체가 소멸할뻔하는 등 귀족 신경을 건드리면 죽는 걸로 끝나지 않는 그런 분위기도 있어요. 귀족들 노리개가 되는 고아들이 나오고 그 귀족들의 아이를 임신해서 고아원에 들어와 낳게 하는 추악한 일면도 가지고 있죠. 정략을 위해선 어린 애도 거래에 동원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이번에 마인을 어떻게든 빼앗기 위한 다른 영지에서의 물밑 접촉이 그예죠.

 

그러나 마인은 그런 거는 안중에도 없고(불쌍한 페르디난드) 오로지 책만을 바라보면서 종이를 만들기 위해 영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생산에 열을 올리고 나아가 염색에까지 손대는 등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냅니다. 그래서 이젠 마인이 보여주는 귀여운 맛은 없어져 버렸죠. 있는 건 종이라는 돈에 환장한 CEO 밖에 없어요. 그것을 위해선 권력을 동원하는 걸 마다하지 않으며 주변에 일을 떠넘기고 자기는 책만 보는 악녀 같은 모습도 보이죠. 그런 성격을 고칠 생각도 없답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리니까 조금은 어리광이랄지 꾀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혹사당하고 있으니 조금 농땡이 피운다고 벌은 받지 않겠죠. 자기가 판 무덤이지만. 그러데 그 무덤에 무덤을 판 본인이 안 들어가고 엄한 사람들이 발을 담그기 시작합니다. 우리 영지에도 종이와 샴푸 좀 주세요? 

 

그건 그렇고 5부의 테마가 전쟁이라서 그런지 '아렌스바흐'에서 사전 작업이 시작되는군요.

 

맺으며, 이 작품의 주제가 종이와 책 만들기라는 건 알겠는데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현실 같으면 노동법 위반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노가다를 애한테 엄청 시켜 대는군요. 노다지 뭘 만들기만 합니다. 그렇다 보니 극 초반 아기자기한 맛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현실에서도 이 정도였다면 아닌 게 아니라 S모 전자라는 기업을 몇 개는 세웠을걸요. 주구장창 그런 이야기만 들어가 있으니 재미있을 리도 없고, 어디서 감동을 받아야 될지도 모르겠더군요. 이거 완전 치즈를 못 만드는 유목민에게 치즈 만드는 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실패는 좀 하지만 시행착오도 없이 잘만 해대는 이런 이야기를 계속 읽어야 할지. 더욱 문제인 것은 오타는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오역은 아니잖아요. 79페이지에서 어떤 물품이 외부로 반출된 역사가 없는데 마치 반출이 되었다는 식으로 '왜 돌려주지 않았는지 깨달았다'라니요. 아니 역자 양반 물건이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글을 제대로 보고 번역한 건가요.

 

침대 가리개를 천막(쉽게 말해서 노점상에 치는 그런 천막)으로 오역을 그것도 끝까지 천막이라니 모르면 검색을 해서라도 알아보던지, 오타는 있을 수 있다고는 했지만 읽다 보면 허용 한계량을 넘어섭니다. 위에서 보석이라고 해놓고 아래는 보물(보물이 맞는 단어)이라고 하질 않나, 오타는 하도 많아서 세다가 그만뒀군요. 그리고 가장 빡치는건 문단 누락이군요. 84페이지 귀색을 언급하면서 '바람 속성 빨강'이 누락되고, 139페이지에선 마인의 대사 중 한 문단이 아예 빠져 버렸습니다. 203페이지에선 자료가 불충분해서 확실하지는 않은데 성의 지하라는 부분은 지하가 아니라 정황상 아랫마을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무리 마법이 있다지만 성 지하에다가 겨울을 나기 위해 영지 사람들을 떼로 몰아넣어서 질식사 시킬 일이 있는지. 이건 누구 잘못일까요. 역자가 잘못한 건지 검수를 안 한 출판사 잘못인지. 이 정도면 역자를 체인지 시켜야 함에도 왜 바꾸지 않는 걸까요. 클레임도 엄청 들어간 거 같은데...

PS: 이건 순수하게 필자가 신경 거슬려서 하는 말인데 굳이 약혼이라는 말을 놔두고 혼약이라는 단어를 써야 했을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혼약이라는 단어도 있는 거 같으니 혼약도 틀린 표현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아무튼...​ 


 

  1. 1, 정확히는 마력만 있으면 누구나 기동시킬 수 있지만 소유권이 왕족에게 있어서 깨우는건 왕족만이 할 수 있다는 뭐 그런게 있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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