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셋
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주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는 90년대에 선보인 다채로운 형식의 영화들 가운데서도 톡 튀어나오는 신선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엔나행 기차안에서 우연히 만난 선량하고 아름다운 두 젊은이가 낯선 이국의 거리를 거닐며 만 하루 동안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대는 것만으로 두시간을 끌어갔던 그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영화의 말미 각자의 자리로 떠나는 남녀는 설레임과 안타까움에 6개월 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었죠.
‘비포 선셋(Before Sunset)'은 그 두 젊은이의 재회를 그린 일종의 속편 영화입니다. 그럼 전편의 약속대로 6개월 뒤의 만남부터 시작하느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들의 재회는 9년만에 파리에서 우연하게 이루어집니다. 전작이 95년도에 제작되었으니 영화의 나이와 현실의 나이가 함께 흘러간 셈이네요.
9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은 세월의 무게에 눌려 조금씩 변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이런저런 삶의 곡절을 겪으며 지내다보면 9년이란 세월은 사람을 여러모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현재 제시는 9년전 셀린과의 만남을 소설로 써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셀린은 파리에서 환경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엇갈렸던 두사람은 길은 파리의 한 서점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인생이 꽃피던 젊은 날 단 하루동안의 시간을 공유했던 제시와 셀린. 그들은 예전처럼 저녁 7시행 비행기가 떠날 때까지 파리의 뒷골목을 누비며 끊임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사회, 환경, 문화를 망라하는 다양한 주제를 놓고 이지적이고 재기넘치는 수다를 떠는 두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추억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죠.
사실 6개월 후 비엔나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한 후 제시는 약속을 지켰지만 셀린은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비엔나에 갈 수가 없었답니다. 만약 그 때 두사람이 약속대로 다시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가 궁금해 하는 만큼 두 사람에게도 그것은 커다란 아쉬움일 테지요. 지나버린 세월과 현실의 차가움에 대한 미련과 회환이 큰 만큼 말입니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너무 많이 얘기를 한다구요? 글쎄요. ‘비포 선라이즈’가 그랬듯이 ‘비포 선셋’ 역시 진짜 쏠쏠한 알맹이는 그들이 나누는 그 무수한 대화인걸요. 햇살이 낮게 비끼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의 파리, 카메라는 로맨틱한 감정이 오가는 두 사람을 거의 실시간으로 차분하게 뒤따릅니다. 영화에서 묻어나는 따뜻함과 편안함은 9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