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그런 불효자식 아니에요!”

 

변기에 앉으면 담배 냄새가 났어요. 혹 꽁초를 변기에 버렸냐고 아들아이에게 물었어요.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저 말을 했어요.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 아이는 생각 외로 과민 반응을 보였어요. 그런데 이후 변기에서 담배 냄새가 사라졌어요.

 

아이는 21살이지만 담배를 피운지는 꽤 됐어요. 그러나 담배를 핀다고 꾸지람을 한 적은 없어요. 다만 건강이 염려된다는 말과 꽁초 처리만 잘 하라고 했죠. 관대한(?) 처사가 되려 본인에게는 부담이 됐는지 애써 담배를 억제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하지만 이따금 참을 수 없을 때는 화장실에서 피웠던 것 같아요. 당연히 꽁초는 변기에 버렸고. 하지만 실내에서 몰래 담배를 핀다는 것에 본인 스스로 부담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렇지 불효자식까지 언급을.

 

아이에게 를 말한 적 없고 기대한 적 없는데 뜻밖의 말을 들어서 그 날 아이의 말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만일 내가 아이의 나이였고 아버지께 내가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들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효가 아직은 우리 의식 속에 살아있는 덕목이구나, 하는 생각도 해봤구요.

 

사진은 예산군 광시면을 지나다 찍은 거예요. 송시열이 쓴 박승휴(朴承休, 1606 ­ 1659)의 비문이에요. 박승휴의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의 효행이에요. 송시열은 그의 효행을 드러내기 위해 비문 첫머리에 그가 아버지를 여읜 후 보여준 모습을 인상 깊게 서술했어요.

 

孝宗己亥 朴執義子美新免先考喪 承召還京 余亟往候之 公餘哀在面 言咽而淚淫 座人不能視 自世敎衰 喪紀先壞 其哀與戚相當者鮮矣 匪今而魯由也 笑朝祥而暮歌者 子張以聖門高弟 喪畢而琴 衎衎而樂 乃今得見如子美者 勞心慱慱之詩 庶幾其不作矣 然公形貌黝黑 聲音厪厪 其危身之狀 不翅多矣 余固已憂之 果以其年十一月十七日不起 嗚呼 無以勸善居喪者矣 효종기해 박집의자미신면선고상 승소환경 여극왕후지 공여애재면 언열이누음 좌인불능시 자세교쇠 상기선괴 기애여척상당자선의 비금이노유야 소조상이모가자 자장이성문고제 상필이금 간간이락 내금득견여자미자 노심단단지시 서기기부작의 연공형모유흑 성음근근 기위신지상 불시다의 여고이우지 과이기년십일월십칠일불기 오호 무이권선거상자의

 

효종 기해년(1659) 집의(執義) 박자미(자미는 박승휴의 자())가 부친상을 마친 뒤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양에 올라왔다. 나는 한 달음에 달려가 그를 만났다. 공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역력했고 목소리는 울먹였으며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나를 비롯한 함께 자리한 사람들은 차마 공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세교(世敎)가 쇠해진 뒤부터 가장 먼저 파괴된 것이 상례(喪禮)의 기강이다. 그 슬픈 마음과 형상이 일치하는 자를 찾아보기란 극히 힘들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성인이 사셨던 노나라에서도 그러했으니 상중(喪中) 제사를 지낼 때 아침나절에는 키득거리고 저녁나절에는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자장(子張)같은 성인의 수제자도 초상을 마치고는 거문고를 타며 즐거운 행색을 보였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세태에서 박자미 같은 이를 봤다면 저 상례를 소홀히 여김을 슬퍼한 소관(素冠)같은 시는 결코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공은 안색이 심히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건강이 심히 안 좋아 보였다. 나는 공의 건강이 매우 염려스러웠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는 것인지 그해 1117일 공은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공이 보여준 상례의 모습은 진실로 타인의 모본이 될 만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감히 권하지는 못하겠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끝내 돌아간 것을 보면 그가 생전에 얼마나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어요. 아버지에게만 그랬던 것은 당연히 아니에요. 어머니에게도 그러했어요. 비문 뒷면에 보면 어머니가 병중에 있을 때 단지(斷指)하여 그 피를 어머니에게 먹였다는 일화가 나와요. 그의 효행이 특별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박승휴의 효행은, 송시열의 언급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특별한 것이었어요. 효를 강조했던 전통사회에서도 박승휴 같은 이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죠. 이는 효의 실천이 그만큼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반증해요. 설령 박승휴 같은 효행을 요구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죠.

 

그럼에도 전통사회에서 효를 강제했던 것은, 흔히 말하듯,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와 상관성이 깊기 때문이에요. 유교라는 통치 이데올로기를 벗어버린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를 권장한다면 그건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 번 뿌리를 내린 전통은 좋고 나쁨을 떠나 의식 깊이 남아있기 마련이죠. 효를 여전히 아름다운 인정으로 여기는 것은 자연스런 인정의 발로라기보다는 의식 깊이 뿌리내린 효라는 전통가치가 발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어요. 아들아이가 불효 운운한 것도 같은 맥락이겠죠.

 

사진의 한자중 핵심적인 한자 다섯 자만 자세히 살펴볼까요?

 

(울 곡)(달아날 망)의 합자예요. 이 세상에서 달아나 그 모습을 찾을 길 없어 슬퍼한다는 의미예요. 죽을 상.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喪家(상가), 喪失(상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입 구)(옷 의)의 합자예요. 슬퍼서 운다는 의미예요. 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슬플 애.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哀悼(애도), 哀歡(애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작은 도끼란 의미예요. (도끼 월)로 의미를 표현했고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도끼 척. 슬퍼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동음을 빌미로 차자(借字)한 거예요. 슬퍼할 척.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戚戚(척척, 근심하는 모양), 戚揚(척양, 크고 작은 도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힘 력)(등불 형) 약자의 합자예요. 등불을 켠 것처럼 집에 불이 붙어 타면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끌려고 애쓴다는 의미예요. 힘쓸 로. 근심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근심할 로.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勤勞(근로), 勞心焦思(노심초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근심하다란 의미예요. (마음 심)으로 의미를 표현했고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 근심할 단.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慱慱(단단, 근심하여 여윈 모양)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패륜이 극성을 부리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그렇다고 효를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처방이 아닐 거예요. 그렇다고 자식과 부모라는 혈연관계를 무시한 채 딱딱한 법률만으로 패륜을 치료할 수도 없을 거구요. 무엇보다 인간 대 인간이라는 대 전제하에 상호 존중이라는 가치를 강조해야 시대에 맞는 처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찍은 한 열혈 효자의 비문을 보며 내린 효에 대한 새로운(?)정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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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란 말이 있어요. 문체 속에는 그 사람을 대변하는 제요소가 들어가 있다란  의미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문체 수련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해요. 어차피 천품은 감출 수 없으니 인위적으로 문체 수련을 한다하여 무슨 특별한 문체가 만들어지겠냐는 거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충실히 하면 그것이 그만의 문체가 된다는 거예요. 일리 있는 말이에요. 혹 문체에 답답함을 느낀다면 문장 수련에 힘을 쏟기 보다는 뒤늦게라도 인격을 수련하는데 더 힘을 쏟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문장에 그 사람의 개성이 묻어나듯 시에도,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개성이 묻어난다고 생각해요. “시는 곧 그 사람이다라고 보는 거죠. 시를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천품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에요.

  

사진은 재도천중만국명(纔到天中萬國明)”이라고 읽어요. “하늘 한 가운데 이르니 온 세상이 밝도다라는 뜻이에요. ‘무엇이란 주체가 빠져있는데, 쉽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태양이 그 주체예요. 이 구절 앞에는 본디 한 구절이 더 있는데 그것을 함께 읽으면 주체인 태양의 위상을 한결 더 깊이 인식할 수 있어요. 생략된 구절은 미리해저천산암(未離海底千山暗)”인데 아직 바다 밑을 떠나지 않았을 적엔 온 세상 산이 다 어둡더니라고 풀이해요

  

두 구절, 특히 사진의 구절에서 어떤 느낌이 느껴지시는지요? 저는 웅대한 기상을 느꼈어요. 단순히 태양이 뜨기 전 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의탁하여 자신의 웅대한 기상을 표현한 것으로 말이죠. 태양이 뜨기 전의 모습은 미미한 현재의 모습을, 태양이 중천에 뜬 모습은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편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런 정도의 웅대한 기상은 흔히 제왕의 기상이라고 하죠

  

이 시는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이 미미한 신분 시절에 지은 것이라고 해요. 이 시를 지을 적에 조광윤이 천하를 바로 세우겠다는 당말 510국의 혼란 시기였기에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시에는 그런 야망, 아니 웅혼한 기상이 잘 드러나 있어요. 이런 웅혼한 기상의 표현은 시구를 조탁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타고난 천품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죠. 시는 곧 그 사람이니까요

  

사진은 한 지인이 한자를 모르겠다고 - 특히 첫 번째 한자 - 알려달라고 보낸 거예요. 덕분에 좋은 글감을 얻었어요

  

낯설게 보이는 두 글자만 자세히 살펴볼까요?

  

(실 사)(토끼 참)의 합자예요. 붉은 색에 약간의 검은 빛이 감도는 옷감이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지금은 이 뜻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겨우라는 부사의 의미로 사용해요. ‘겨우라는 의미는 약간의 검은 빛이 감돈다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겨우 재.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今纔(금재, 이제 / 겨우), 纔小(재소, 조금 / 잠깐)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이를지)(칼 도)의 합자예요. 이르다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칼은 예리하여 사물에 빠르게 접촉되는데, 그처럼 빠르게 이르렀다란 의미로요. 이를 도.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到着(도착), 到達(도달)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우리나라 개국 왕조 인물 중에도 송태조 조광윤과 같은 풍의 시를 지은 사람이 있어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그이인데, 제가 보기엔, 송태조 조광윤에 비해 기상이 약간 떨어져요. 그래도 확실히 범인(凡人)의 경지는 넘어선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여요. 이 시 역시 억지로 조탁한 것이 아니고 타고난 천품이 자연스럽게 발로된 거라고 봐요.

  

引手攀蘿上碧峰 인수반라상벽봉    칡덩굴 부여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一庵高臥白雲中 일암고와백운중    암자 하나 높이 흰 구름 속에 누워 있네

若將眼界爲吾土 약장안계위오토    만약 눈에 들어오는 곳을 모두 우리 땅으로 한다면

楚越江南豈不容 초월강남기불용    강남의 초나라 월나라들 마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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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형님, 마지막 가시는 길 그 언덕 둔치에 앉아 소나무 사이 푸른 하늘을 바라봅니다.

  

어이, 동상! 나두 이제 나이가 60이여. ‘ㅇㅇ하고 부르는 게 좀 그려. 이제 사춘이라고 불러.” 무심코 형들 따라 저도 ㅇㅇ이라고 불렀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 쓰이셨던가 봐요? 하긴 형님하고 저는 40년 차이가 나니 그럴 만도 하셨을 것 같아요. 이후로 제겐 ㅇㅇ대신 사촌 형님이 공식 명칭이 됐죠. 벌써 20년 전 일이네요.

  

사촌 형님, 일찍 아버지를 여의시는 바람에 10대 후반부터 집안 살림을 꾸리셨다면서요? 고생 참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시련이 사촌 형님의 마음을 넓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남의 입장을 잘 헤아리셨잖아요? 지금도 기억나요. 이따금 사촌 형님이 ㅇㅇ에서 ㅇㅇ으로 넘어 오시면, 어머니는 늘 사촌 형님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셨죠. 사촌 형님은 어머니의 아픔을 잘 이해해 주셨던 것 같아요. 전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다른 이들에게 얘기하는 걸 거의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둘째 누나 시집갈 때가 생각나네요. 아버지는 혼사에 무관심하시고 어머니는 혼사 비용이 부족해 동동거리셨죠. 그 때 사촌 형님이 계를 꾸려서 빠른 번호로 타게 해주셨다면서요? 어머니는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얘기 하셨어요. 큰 누나 혼사는 아예 사촌 형님 댁에서 치렀다면서요? 큰 누나가 사촌 형님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것 같아요.

  

저희 집 뿐만 아니라 문중의 대소사가 거지반 사촌 형님 댁에서 치러졌다면서요? 저야 나이가 어려 직접 경험한 것이 거의 없지만, 구전(口傳)은 많이 들었어요. 사촌 형님이 종손이었다면 그 일들이 그리 회자되진 않았겠죠? 종손도 아닌데다 살림 형편 또한 녹록치 않은데 그 일들을 치러내셨으니. 당질이 대학교수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사촌 형님 내외분의 음덕(陰德)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요.

  

사촌 형님, 문중 분들이 하는 얘기 들으셨나요? 이제는 고향에 찾아와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어이 하냐는. 사촌 형님 내외분은 이따금씩 찾아오는 친인척들에게 꼭 끼니를 먹여 보내셨죠. 그 따뜻한 마음을 이제 영영 느낄 수 없으니.

  

사촌 형님, 형님을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 모습 하나가 있어요. ㅇㅇ에 사는 사촌 누님 댁을 형님과 같이 갔던 적이 있어요. 점심을 먹고 문을 나서는데 형님이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만 원하고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사촌 누님 손에 쥐어 줬어요. “오빠는다 늙은 동생한테 무슨 용돈을.” “, 받어!” 두 분이 옥신각신하다 결국은 사촌 누님이 지고 말았죠. 이 모습이 떠오를 때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돌아요.

  

사촌 형님, 오늘 하늘은 왜 이리 맑고, 집 주변 탱자나무 울타리는 왜 이리 푸른지요? 하늘은, 탱자나무는, 형님이 떠나서 슬픈 게 아니라 오히려 기쁜가 봐요. “어서 오너라!” 환영하고, “어서 가세요!” 환송하는 것 같아요. 선한 종언(終焉)은 하늘과 땅도 축복하나 봐요.

  

사촌 형님, 이제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만나시겠네요. 제 안부 좀 전해 주세요. 아울러 그 어리던 ㅇㅇ이 머리에도 흰 머리가 듬성듬성하다고 전해주세요. 하하하.

  

사촌 형님, 벌써 성분식(成墳式)을 하네요. 이젠 저도 사촌 형님께 마지막 절을 드려야겠군요. 하늘나라에서 길이길이 행복하세요.

  

추신: 사촌 형님 무덤에 요금 그 흔한 빗돌 하나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빗돌을 남기셨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 한 수 올립니다.

  

他人墓碣竪 타인묘갈수    남들은 무덤 앞에 빗돌 세우나

四寸方寸銘 사촌방촌명    사촌은 사람들 마음속에 빗돌 세웠네

石刻歲歲黃 석각세세황    돌에 새긴 글은 해마다 닳아지지만

口碑世世靑 구비세세청    마음에 새긴 돌은 대대로 영원하다네


  

12년 전에 쓴 사촌 형님에 대한 글이에요. 해묵은 글을 새삼 꺼내 읽은 것은 며칠 전 특별한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사진의 책이 바로 그 선물인데, 친구의 아버님 유고집이에요

  

우선 제목을 읽어 볼까요? 처세요감(處世要鑑)이라고 읽어요. 처세에 관해 귀감이 될 만한 핵심적인 글, 이라고 풀이할 수 있어요. 친구 아버님은 북에서 해방 전에 적수공권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신 분이에요. 적수공권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셨으니 생활의 고초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특이한 것은 이 분이 이런 환경에서도 늘 서책을 가까이 하셨다는 거예요. 대학 다닐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 우연히 본 친구 아버님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어요. 초겨울 아침인데 툇마루에 앉으셔서 웅얼웅얼 서책을 읽으시는 모습을 본 거예요. 당시 공부(독서)란 저런 마음과 저런 자세로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친구가 보내준 이 책은 친구 아버님이 생전에 쓰신 짤막한 글과 시 약간을 묶은 소박한 문집이에요. 사실 책의 내용은 그리 특별한 것이 없어요.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교훈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거든요(시편 역시 그다지 특별하지 않고요). 이 책의 핵심이랄 수 있는 처세십훈(處世十訓)’ 장을 읽어보면 이를 금방 알 수 있죠.

  

寬容和合 관용화합    관용을 베풀고 화합하라

至誠敬信 지성경신    지성으로 공경하고 신뢰를 지켜라

政道修身 정도수신    바른 도리로 몸을 수양하라

言恭志强 언공지강    말은 공손하고 뜻은 굳세라

忍德急禍 인덕급화    참으면 덕이요 급하면 화가 된다

患難相恤 환난상휼    어려움에는 서로 도와야 한다

勤儉守分 근검수분    근검절약하고 분수를 지켜라

德業相勸 덕업상권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하라

固根茂枝 고근무지    근본이 굳으면 가지가 무성하다

知過必改 지과필개    과실을 알면 반드시 고쳐라

  

그럼에도 이 책은 제게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그건 이 책을 지은 분의 인격과 글 내용이 일치하는데서 발산하는 향기 때문이었어요. 세상에는 수많은 처세훈 책이 있지만 정작 그 내용과 저자는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하죠. 자신도 실천하지 않은(못한) 것을 공허하게 내뱉은. 이럴 경우 그 책이 발산하는 향기는 일시적으론 강할 수 있지만 갈수록 강도가 낮아지고 어느 때는 역한 악취를 풍기는 경우도 있지요. 반면 직접 삶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거둔 수확물이 발산하는 향기는 은은하지만 갈수록 그 농도가 진해지죠. 이 책은 바로 그런 류의 책이에요. 감히 다른 서책에 비유한다면 논어와 같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이 책은 자손들에게 주는 유언격의 책이라 그 분의 삶을 지켜본 자손들이 보증하는 내용이기에 더더욱 진솔한 향기를 풍겨요.

  

책을 읽을 때 문득 돌아가신 사촌 형님이 오버랩 됐어요. 사촌 형님은, 앞글에서 소개했듯이, 친구 아버님과 비슷한 일면이 있어요. 비록 실향민은 아니지만 조실부친했고 일찍부터 가계를 책임지며 생활해야 했거든요. 당연히 공부할 형편은 못됐고요. 그렇지만 늘 서책을 가까이 했어요. 한평생 인정과 도리를 실천한 것도 매한가지고요. 다만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이 친구 아버님과 다른 점이에요.

  

두 분은 인정과 도리를 실천한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지금도 어딘가 그런 실천을 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예전만큼 찾아보기가 용이하진 않아 보여요. 아울러 세태 자체도 인정과 도리보다는 법을 더 강조하고 있고. 어쩌면 제가 쓴 사촌 형님에 대한 짧은 글과 친구 아버님이 남겨놓으신 소박한 문집은 인정과 도리를 삶의 가치로 여겼던 마지막 세대에 대한 증언록은 아닐지 모르겠어요.

  

사진의 한자를 살펴볼까요?

  

(범 호)(뒤져올 치)(의자 궤)의 합자예요. 뒤에서 좇아와 앞사람에게 미치듯 의자에 양다리를 이르게 하여 머무른다(앉는다)란 의미예요. 는 뜻을, 는 음()을 담당해요. 처할 처. 곳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 의미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곳 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處地(처지), 傷處(상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나무줄기에 잎이 많이 매달린 것을 그린 거예요. 여기서 의미를 확장하여 세대란 뜻으로 사용하게 됐어요. 한 세대를 보통 30년으로 보기에 세대란 뜻에는 30년이란 의미가 내포돼 있어요. 세대 세. 세상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세상 세.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世代(세대), 世上(세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여인[]이 두 손으로 허리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 그린 거예요. 허리 요. 중요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허리는 인체에서 매우 중요한 부위란 의미로요. 중요할 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要痛(요통, 腰痛과 상통), 要旨(요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쇠 금)(볼 감)의 합자예요.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구리로 만든 거울이란 뜻이에요. 거울 감.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龜鑑(귀감), 鑑識(감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앞서 사진의 책에 친구 아버님의 시도 있다고 했는데, 그 중 한 편을 소개해요. 이 시 역시 소박한 내용이지만 그분의 삶이 묻어나는 시이기에 은은하면서 담백한 맛이 있어요.


我從勤儉安且樂 아종근검안차락    내 평생 근검을 따르니 편안하고 또한 즐거워

心身安定無忌憚 심신안정무기탄    몸과 마음이 안정되니 거리낌이 없도다

無情歲月不對人 무정세월부대인    무정한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愧貪俗利心自安 괴탐속리심자안    세속 영리 탐내지 않으니 마음 절로 편안하도다

安貧樂道守分數 안빈낙도수분수    안빈낙도 속에 분수를 지켜 살아가고

居鄕耕讀廢一難 거향경독폐일난    시골살이 밭갈고 책 읽는 것 하나도 그만둘 수 없네

思想一到何不成 사상일도하불성    정신일도면 무슨 일인들 못 이루랴

危地圖生亦莫恨 위지도생역막한    위태로운 처지에도 삶을 도모하였으니 회한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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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평화를 위한 위대한 일만 샘한테 말하고, 나머지는 전부 경찰에 신고해!”

  

교직에 있는 지인이 한 말이에요. 중학교 1학년을 담임하는데, 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고자질하고 징징대는 소리를 해대는데 질려 내뱉은 말이라고 하더군요. 이 말 이후 학생들 간에 뭔 일만 생기면 경찰에 신고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첨언했어요. 첨언 뒤 지인은 이렇게 말했어요. “교직이 성직(聖職)인줄 알았는데 이건 매일.”

  

누구나 이상을 갖고 있죠. 그러나 막상 현실과 부딪혀보면 그 이상이 깨지는 경우가 다반사죠.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이상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요?

  

사진은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고 읽어요. 괴로움을 없애주고 즐거움을 주다, 란 뜻이에요. 용수(龍樹)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오는 비능발고 자능여락(悲能拔苦 慈能與樂)”의 줄임말이에요. 어느 한의원 벽에 걸려있는 걸 찍었는데 의술을 불 · 보살의 자비심에 견줘 생각하라는(한다는) 의미로 써 놓은 듯해요.

  

한의사의 이상은 무엇일까요?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를 건강하게 만드는 거겠죠. 그러나 한의사의 현실은 어떠할까요? 한의사라는 것이 먹고살기 위한 직업의 하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의사들이 이상만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은 자명해요.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적인 한의사가 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한의사로서의 이상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요?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괴로움은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여 보는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지 않고 상보적인 것으로 본다면 괴로움이 없을 거예요. 아이들의 비루(鄙陋)한 말과 행동을 상대하는 것이 성직으로서의 교직을 완성하는 숫돌이라 여기고, 직업인으로서 베푸는 의술을 인술로서의 의술을 완성하는 숫돌로 여긴다면 괴로움이 줄거나 없지 않을까요

  

사진의 한자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손 수)(달릴 발)의 합자예요. 뽑아낸다는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뽑는다는 것은 달려가듯이 빠르게 돌출시키는 행동이란 의미로요. 뽑을 발.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選拔(선발), 拔群(발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풀 초)(옛 고)의 합자예요. 도꼬마리(약재의 일종)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쓰다, 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쓸 고.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甘呑苦吐(감탄고토), 苦衷(고충)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두 사람이 물건을 서로 주고받는 모습을 그린 거예요. 더불 여. 줄 여.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授與(수여), 參與(참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거치대 위에 올려놓은 큰 북과 작은 북을 그린 거예요. 혹은 금슬(琴瑟)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기도 해요. 음악이란 뜻이에요. 음악 악. 즐겁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즐거울 락.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音樂(음악), 快樂(쾌락)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저는 올해 목표가 어깨 펴기예요. 아내한테 어깨가 굽어서 보기 싫다는 핀잔을 자주 들어서 올해 목표를 이것으로 정했어요. 그런데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선생이 지은 초등학습서)의 첫 장을 읽다 제 자신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학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맨 먼저 뜻부터 세워야 한다. 그리해서 자기도 성인(聖人)’이 되리라고 마음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조금이라도 자기 스스로 하지 못한다고 물러서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학문()의 목표를 성인에 두는 사람은 한 해의 목표를 결코 어깨 펴기같은 소소한데 두지 않을 거예요. 한 해의 목표를 어깨 펴기에 둔다는 자체가 삶의 목표가 없거나 있다 해도 비천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어요.

  

그런데 이상과 현실의 관계를 상보적 관점으로 이해하니 한심하다는 부담을 조금 덜게 됐어요. 삶의 목표가 비천하거나 없다 해도 현재 하려는 나의 일이 개선(改善)의 방향을 띈 것이라면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이죠. 율곡 선생님도 저의 이런 생각을 가상하게 여겨주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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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경일사 부장일지(一經一事 不長一智).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란 뜻으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에요. 소수 뛰어난 사람은 선천적으로 지혜가 뛰어나지만, 대다수 보통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지혜를 획득하죠

  

술을 먹을 줄 알거나 즐기는 사람과 술을 먹을 줄 모르거나 즐기지 않는 사람은 술에 대한 앎이 다를 거예요. 물론 이 경우도 뛰어난 소수의 사람은 술을 먹지 않고도 술에 대한 앎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다수 보통 사람은 술을 경험한 이후에야 술에 대한 앎을 깨우칠 수 있을 거예요.

  

한시에는 술을 소재로 활용한 시가 많아요. 이 경우 그 시를 이해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 그렇죠! 술에 대한 경험으로 술에 대한 앎이 있는 사람이라야 그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술에 대한 경험이 없는 평범한 이라면 그 시를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물론 이 경우도 뛰어난 이는 예외일 수 있겠지요.

  

대학시절 한시론(漢詩論)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요. 강의를 담당하신 교수님은 정말 성실하신 분이었어요. 마치 초등학교 교사처럼 자세히 성심성의껏 강의하셨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분의 한시 수업은 재미가 없었어요. 술이 소재로 활용된 시 풀이도 매한가지였죠. ‘한시를 전공한 분이라는데.’ 이런 의문이 일었어요. 이분은 술을 드시지 않았어요. 가끔 드시는 모습을 뵈긴 했는데 마지못해 드시는 모습이 역력했어요. 학생들과 어울리시지도 않았지요.

  

교양 한문을 담당하신 교수님이 계셨어요. 이분의 원래 전공은 동양철학, 중에서도 경학(經學)이었어요. 이분이 교양 한문 강의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원래 전공이 철학 쪽이라, 문학 쪽은 아무래도 전달력이 약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강의를 하셨어요. 시를 해석할 때, 특히 술을 소재로 한 시를 해석할 때는 정말 실감나게 하셨어요.이상하다. 어째 한시를 전공하신 분보다 더 실감나게 강의를 하시지?’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이분은 술을 좋아하셨어요. 학생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술도 나누고 삶과 철학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셨지요.

  

비전공자의 강의가, 특히 술을 소재로 삼은 한시 강의에서, 전공자의 강의보다 더 실감나게 느껴진 비결을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그래요, 짐작하셨겠지만, 바로 체험에 그 이유가 있었어요. 술을 먹어보고 술에 대해 앎이 있는 이가 술을 소재로 다룬 시를 풀이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이가 풀이하는 것은, 비록 비슷한 풀이라 해도, 전달되는 감흥은 다를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무정물(無情物)이 아니라 유정물(有情物)이니까요.

  

사진은 이백(李白, 701―762)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새긴 거예요. 시를 실감나게 강의해주셨던 교수님이 강의했던 시 중 하나예요이 시를 강의할 당시, 자신이 전에 이 시를 강의한 적이 있는데, 수강했던 무용과 학생이 이 시를 무용발표회 팜플렛에 사용했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했어요에피소드를 들으며 한시론을 강의한 교수님이 이 시를 강의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어요. 실감나게 시를 해석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고, 이는 당연히 그분이 술에 대한 앎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시를 읽어 볼까요?

  

花間一壺酒 화간일호주    꽃 사이 한 동이 술

獨酌無相親 독작무상친    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시네.

擧盃邀明月 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 맞이하고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그림자 대하여 셋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월기불해음    달은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는 그저 나만 따를 뿐.

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 벗하나니

行樂須及春 행락수급춘    때는 봄 행락 철.

我歌月徘徊 아가월배회    내 노래하니 달은 배회하고

我舞影凌亂 아무영능란    내 춤추니 그림자는 어지러워.

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깨어선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한 뒤는 제각기.

永結無情遊 영결무정유    길이 무정한 사귐을 맺어

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의미는 굳이 풀지 않아도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다만 이 말만 할까 해요. 술을 들 줄 알고 좋아하는 이는 이 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이 시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저는 어떠냐고요? 후후, 글쎄요?

  

사진의 낯선 한자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는 병의 모양을 그린 거예요. 윗부분은 뚜껑, 아랫부분은 몸체예요. 병 호.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投壺(투호), 壺中物(호중물, )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옛 글자, 술 주)(구기 작)의 합자예요. 상대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마시기를 권유한다는 뜻이에요. 따를 작.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對酌(대작), 添酌(첨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착)(부를 교)의 합자예요. 오라고 요청하다, 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상대를 불러 오게 한다는 의미로요. 맞이할 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招邀(초요, 불러서 맞이함), 邀擊(요격, 맞이하여 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착)(와 통용, 떨어질 타)의 합자예요. 따라가다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떨어지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것이듯, 따라가는 것도 뒷사람이 앞 사람을 자연스럽게 좇아가는 것이란 의미로요. 따를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隨筆(수필), 隨行(수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날 일)(벨 참)의 합자예요. 잠시, 잠깐이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물건을 벨 때 단박에 베듯 그같이 짧은 시간이 잠시, 잠깐이란 의미로요. 잠시() .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暫時(잠시) 暫定(잠정)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척)(아닐 비) 합자예요. 천천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제대로 걷는 것[직진]이 아니란 의미로요. 노닐 배.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徘徊(배회)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척)(돌 회)의 합자예요. 제자리에서 맴도는 물처럼 한 곳에서 왔다 갔다 한다는 뜻이에요. 노닐 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彽徊(저회, 머뭇거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의 옛 글자, 술 주)(별 성)의 합자예요. 술이 깨다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밝고 분명한 빛을 발하는 별처럼 술이 깨면 그같이 정신이 맑고 분명하다는 의미로요. 술깰 성.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覺醒(각성), 醒寤(성오, 잠이 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착)(모양 모)의 합자예요. 왕래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멀다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멀 막.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邈然(막연, 근심하는 모양 혹은 아득한 모양), 邈志(막지, 원대한 뜻)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한시를 실감나게 강의했던 교수님께 한시를 실감나게 읽을 수 있는 비결이 있냐고 여쭤봤어요. 교수님이 대답하셨어요. “비결? 글쎄 난 전공자가 아니라. 하지만 소리 내어 많이 읽으면 시를 잘 알게 되는 것 같더군. 난 보통 한시 한 편을 백번 이상은 소리 내어 읽는다네.” 이후 그 교수님 말대로 한시를 소리 내어 많이 읽어보니 한시의 맛을 확실히 알겠더군요. 그 교수님은 술에 대한 앎에다 노력(?)을 보탰기에 술을 소재로 한 시를 실감나게 강의하실 수 있었던 거예요. 반면 그런 강의를 하지 못하셨던 분은, 비록 한시를 전공하셨다지만, 이와 반대였기에 건조한 강의를 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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