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형님, 마지막 가시는 길 그 언덕 둔치에 앉아 소나무 사이 푸른 하늘을 바라봅니다.

  

어이, 동상! 나두 이제 나이가 60이여. ‘ㅇㅇ하고 부르는 게 좀 그려. 이제 사춘이라고 불러.” 무심코 형들 따라 저도 ㅇㅇ이라고 불렀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 쓰이셨던가 봐요? 하긴 형님하고 저는 40년 차이가 나니 그럴 만도 하셨을 것 같아요. 이후로 제겐 ㅇㅇ대신 사촌 형님이 공식 명칭이 됐죠. 벌써 20년 전 일이네요.

  

사촌 형님, 일찍 아버지를 여의시는 바람에 10대 후반부터 집안 살림을 꾸리셨다면서요? 고생 참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시련이 사촌 형님의 마음을 넓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남의 입장을 잘 헤아리셨잖아요? 지금도 기억나요. 이따금 사촌 형님이 ㅇㅇ에서 ㅇㅇ으로 넘어 오시면, 어머니는 늘 사촌 형님에게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셨죠. 사촌 형님은 어머니의 아픔을 잘 이해해 주셨던 것 같아요. 전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다른 이들에게 얘기하는 걸 거의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둘째 누나 시집갈 때가 생각나네요. 아버지는 혼사에 무관심하시고 어머니는 혼사 비용이 부족해 동동거리셨죠. 그 때 사촌 형님이 계를 꾸려서 빠른 번호로 타게 해주셨다면서요? 어머니는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얘기 하셨어요. 큰 누나 혼사는 아예 사촌 형님 댁에서 치렀다면서요? 큰 누나가 사촌 형님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것 같아요.

  

저희 집 뿐만 아니라 문중의 대소사가 거지반 사촌 형님 댁에서 치러졌다면서요? 저야 나이가 어려 직접 경험한 것이 거의 없지만, 구전(口傳)은 많이 들었어요. 사촌 형님이 종손이었다면 그 일들이 그리 회자되진 않았겠죠? 종손도 아닌데다 살림 형편 또한 녹록치 않은데 그 일들을 치러내셨으니. 당질이 대학교수가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사촌 형님 내외분의 음덕(陰德)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봐요.

  

사촌 형님, 문중 분들이 하는 얘기 들으셨나요? 이제는 고향에 찾아와도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어이 하냐는. 사촌 형님 내외분은 이따금씩 찾아오는 친인척들에게 꼭 끼니를 먹여 보내셨죠. 그 따뜻한 마음을 이제 영영 느낄 수 없으니.

  

사촌 형님, 형님을 생각할 때 마다 떠오르는 모습 하나가 있어요. ㅇㅇ에 사는 사촌 누님 댁을 형님과 같이 갔던 적이 있어요. 점심을 먹고 문을 나서는데 형님이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만 원하고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사촌 누님 손에 쥐어 줬어요. “오빠는다 늙은 동생한테 무슨 용돈을.” “, 받어!” 두 분이 옥신각신하다 결국은 사촌 누님이 지고 말았죠. 이 모습이 떠오를 때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돌아요.

  

사촌 형님, 오늘 하늘은 왜 이리 맑고, 집 주변 탱자나무 울타리는 왜 이리 푸른지요? 하늘은, 탱자나무는, 형님이 떠나서 슬픈 게 아니라 오히려 기쁜가 봐요. “어서 오너라!” 환영하고, “어서 가세요!” 환송하는 것 같아요. 선한 종언(終焉)은 하늘과 땅도 축복하나 봐요.

  

사촌 형님, 이제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만나시겠네요. 제 안부 좀 전해 주세요. 아울러 그 어리던 ㅇㅇ이 머리에도 흰 머리가 듬성듬성하다고 전해주세요. 하하하.

  

사촌 형님, 벌써 성분식(成墳式)을 하네요. 이젠 저도 사촌 형님께 마지막 절을 드려야겠군요. 하늘나라에서 길이길이 행복하세요.

  

추신: 사촌 형님 무덤에 요금 그 흔한 빗돌 하나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빗돌을 남기셨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 한 수 올립니다.

  

他人墓碣竪 타인묘갈수    남들은 무덤 앞에 빗돌 세우나

四寸方寸銘 사촌방촌명    사촌은 사람들 마음속에 빗돌 세웠네

石刻歲歲黃 석각세세황    돌에 새긴 글은 해마다 닳아지지만

口碑世世靑 구비세세청    마음에 새긴 돌은 대대로 영원하다네


  

12년 전에 쓴 사촌 형님에 대한 글이에요. 해묵은 글을 새삼 꺼내 읽은 것은 며칠 전 특별한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사진의 책이 바로 그 선물인데, 친구의 아버님 유고집이에요

  

우선 제목을 읽어 볼까요? 처세요감(處世要鑑)이라고 읽어요. 처세에 관해 귀감이 될 만한 핵심적인 글, 이라고 풀이할 수 있어요. 친구 아버님은 북에서 해방 전에 적수공권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신 분이에요. 적수공권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셨으니 생활의 고초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특이한 것은 이 분이 이런 환경에서도 늘 서책을 가까이 하셨다는 거예요. 대학 다닐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 우연히 본 친구 아버님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어요. 초겨울 아침인데 툇마루에 앉으셔서 웅얼웅얼 서책을 읽으시는 모습을 본 거예요. 당시 공부(독서)란 저런 마음과 저런 자세로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친구가 보내준 이 책은 친구 아버님이 생전에 쓰신 짤막한 글과 시 약간을 묶은 소박한 문집이에요. 사실 책의 내용은 그리 특별한 것이 없어요.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교훈적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거든요(시편 역시 그다지 특별하지 않고요). 이 책의 핵심이랄 수 있는 처세십훈(處世十訓)’ 장을 읽어보면 이를 금방 알 수 있죠.

  

寬容和合 관용화합    관용을 베풀고 화합하라

至誠敬信 지성경신    지성으로 공경하고 신뢰를 지켜라

政道修身 정도수신    바른 도리로 몸을 수양하라

言恭志强 언공지강    말은 공손하고 뜻은 굳세라

忍德急禍 인덕급화    참으면 덕이요 급하면 화가 된다

患難相恤 환난상휼    어려움에는 서로 도와야 한다

勤儉守分 근검수분    근검절약하고 분수를 지켜라

德業相勸 덕업상권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하라

固根茂枝 고근무지    근본이 굳으면 가지가 무성하다

知過必改 지과필개    과실을 알면 반드시 고쳐라

  

그럼에도 이 책은 제게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그건 이 책을 지은 분의 인격과 글 내용이 일치하는데서 발산하는 향기 때문이었어요. 세상에는 수많은 처세훈 책이 있지만 정작 그 내용과 저자는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하죠. 자신도 실천하지 않은(못한) 것을 공허하게 내뱉은. 이럴 경우 그 책이 발산하는 향기는 일시적으론 강할 수 있지만 갈수록 강도가 낮아지고 어느 때는 역한 악취를 풍기는 경우도 있지요. 반면 직접 삶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거둔 수확물이 발산하는 향기는 은은하지만 갈수록 그 농도가 진해지죠. 이 책은 바로 그런 류의 책이에요. 감히 다른 서책에 비유한다면 논어와 같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이 책은 자손들에게 주는 유언격의 책이라 그 분의 삶을 지켜본 자손들이 보증하는 내용이기에 더더욱 진솔한 향기를 풍겨요.

  

책을 읽을 때 문득 돌아가신 사촌 형님이 오버랩 됐어요. 사촌 형님은, 앞글에서 소개했듯이, 친구 아버님과 비슷한 일면이 있어요. 비록 실향민은 아니지만 조실부친했고 일찍부터 가계를 책임지며 생활해야 했거든요. 당연히 공부할 형편은 못됐고요. 그렇지만 늘 서책을 가까이 했어요. 한평생 인정과 도리를 실천한 것도 매한가지고요. 다만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이 친구 아버님과 다른 점이에요.

  

두 분은 인정과 도리를 실천한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지금도 어딘가 그런 실천을 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예전만큼 찾아보기가 용이하진 않아 보여요. 아울러 세태 자체도 인정과 도리보다는 법을 더 강조하고 있고. 어쩌면 제가 쓴 사촌 형님에 대한 짧은 글과 친구 아버님이 남겨놓으신 소박한 문집은 인정과 도리를 삶의 가치로 여겼던 마지막 세대에 대한 증언록은 아닐지 모르겠어요.

  

사진의 한자를 살펴볼까요?

  

(범 호)(뒤져올 치)(의자 궤)의 합자예요. 뒤에서 좇아와 앞사람에게 미치듯 의자에 양다리를 이르게 하여 머무른다(앉는다)란 의미예요. 는 뜻을, 는 음()을 담당해요. 처할 처. 곳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 의미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곳 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處地(처지), 傷處(상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나무줄기에 잎이 많이 매달린 것을 그린 거예요. 여기서 의미를 확장하여 세대란 뜻으로 사용하게 됐어요. 한 세대를 보통 30년으로 보기에 세대란 뜻에는 30년이란 의미가 내포돼 있어요. 세대 세. 세상이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세상 세.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世代(세대), 世上(세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여인[]이 두 손으로 허리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 그린 거예요. 허리 요. 중요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허리는 인체에서 매우 중요한 부위란 의미로요. 중요할 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要痛(요통, 腰痛과 상통), 要旨(요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쇠 금)(볼 감)의 합자예요.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구리로 만든 거울이란 뜻이에요. 거울 감.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龜鑑(귀감), 鑑識(감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앞서 사진의 책에 친구 아버님의 시도 있다고 했는데, 그 중 한 편을 소개해요. 이 시 역시 소박한 내용이지만 그분의 삶이 묻어나는 시이기에 은은하면서 담백한 맛이 있어요.


我從勤儉安且樂 아종근검안차락    내 평생 근검을 따르니 편안하고 또한 즐거워

心身安定無忌憚 심신안정무기탄    몸과 마음이 안정되니 거리낌이 없도다

無情歲月不對人 무정세월부대인    무정한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愧貪俗利心自安 괴탐속리심자안    세속 영리 탐내지 않으니 마음 절로 편안하도다

安貧樂道守分數 안빈낙도수분수    안빈낙도 속에 분수를 지켜 살아가고

居鄕耕讀廢一難 거향경독폐일난    시골살이 밭갈고 책 읽는 것 하나도 그만둘 수 없네

思想一到何不成 사상일도하불성    정신일도면 무슨 일인들 못 이루랴

危地圖生亦莫恨 위지도생역막한    위태로운 처지에도 삶을 도모하였으니 회한이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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