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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
로웅 웅 지음, 이승숙 외 옮김 / 평화를품은책 / 2019년 8월
평점 :
일요일 새벽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온 가족이 잠든 시간이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나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오직 나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여느 일요일처럼 9월의 어느 일요일 새벽, 평소 때처럼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누워서 비스듬히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나는 꼿꼿이 앉아서 집중하며 읽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장면에 다다르자 나는 티슈 없이 버티기가 힘들었다.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세수를 하지 않고서는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나는 식구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 책은 흡인력도 뛰어났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녀의 가슴 아픈 경험담에 눈물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읽는 내내 '차라리 실화가 아니라 영화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이 책은 캄보디아의 한 소녀가 실제 겪은 이야기로서 그 어떤 영화보다도 더 영화같은 이야기이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시에서 태어난 로옹 웅은 론 놀 정부의 헌병대장인 아버지와 중국계 캄보디안인 어머니, 프랑스 유학을 가서 졸업을 앞둔 멩 오빠, 군기반장인 쿠이 오빠, 예쁜 케아브 언니, '리틀 멍키'로 불리는 킴 오빠, 제일 친한 초우 언니 그리고 귀여운 세 살 난 동생 게악과 함께 평온한 가정에서 살아간다. 보통 캄보디아 가정보다는 좀 더 여유있는 중산층 가정이라 프놈펜 시에서 아파트에 거주하며, 언제난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부모님 덕분에 로옹은 하루하루 가족들의 사랑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로옹이 5살이 되던 1975년, 공산주의 혁명 단체인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장악하고 정권을 잡자 로옹의 가족들은 프놈펜 시민들과 함께 농촌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된다. 지식층(교사, 정치인, 의사, 간호사, 군인 등)을 분별하여 모조리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는 사실을 알고 로옹의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을 숨기고 부두에서 짐을 꾸리는 일을 했다라고 하며 간신히 살아남아 가족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중, 결국 아버지는 신분이 드러나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장면을 읽는데 마치 내가 로옹이 된 것처럼 눈물이 터져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크메르 루주도 '배려'를 했는지, 무작정 아버지를 잡아가는 게 아니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진흙탕에 우마차가 빠졌는데 당신이 도와줘야겠다'라고 가족들에게 들리게 얘기한 후 아버지를 데려간 것이다. 이 때, 아버지가 로옹과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빠가 나를 안아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내 발이 공중에서 대롱거린다. 아빠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눈을 꼭 감고 두 팔로 아빠 목을 감싼다. "예쁜 우리 딸, 저 아저씨들과 잠깐 갔다 올게." 아빠가 입술을 떨며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아빠, 언제 돌아와요?" 내 물음에 한 군인이 아빠를 대신해 대꾸한다. "내일 아침에 돌아올 거다. 걱정하지 마, 눈 깜짝할 새에 돌아올 테니." (중간 생략) 아침이 왔는데 아빠가 안 돌아왔다! 아빠는 어디에 있는 걸까? - 본문 178~181쪽 인용 - |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 딸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눈앞에 두고 자기의 죽음을 맞이하러 떠나야 하는 아빠의 찢어지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리고 그 아빠를 애타게 기다리는 로옹의 애절함에 나는 결국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여서 그런지 나는 어느새 이 이야기의 주된 역사적 흐름보다는 로옹의 엄마와 아빠의 입장이 되어 나머지 식구들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와 헤어지는 장면 이후 엄마와 동생 게악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도 난 또 한번 뜨거운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게악은 진흙탕에 얼굴을 박고 고꾸라져 있는 엄마에게 달려간다. 게악은 이제 겨우 여섯 살이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엄마를 부르며 어깨를 흔든다. 엄마의 뺨과 귀를 만지고, 진흙탕에 묻힌 얼굴을 둘어올리려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지만 역부족이다. 눈을 비비자 엄마의 피가 온통 게악의 얼굴에 묻어난다. 주먹으로 엄마의 등을 팡팡 때리며 깨우려 하지만 엄마는 가버렸다. 엄마의 머리를 붙들고 숨 쉴 새도 없이 울부짖는다. 한 군인이 어두운 얼굴로 총을 든다. 잠시 뒤 게악도 조용해진다. - 본문 278쪽 인용 - |
물론 이 대목의 글은 다른 내용들과 글자체가 다르고 따로 분리되어 있는 걸 봐서 로옹의 상상으로 작성된 부분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로옹은 엄마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하고 단지 엄마가 살던 숙소 옆집 아주머니에게 엄마의 붙잡혀감(곧 죽음....)을 들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대목의 글은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을만큼 가슴이 쥐어짜듯 아픈 장면이기도 하다. 물론 살아남은 로옹은 엄마의 죽음으로 크나큰 상처를 받게 되었지만, 난 자꾸 읽는 내내 로옹의 엄마, 아빠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훈련병이 되어 점점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되고, 나아가 결국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가족이 되어 큰오빠 내외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정착하게 되는 모습을 보고는 당장 가서 로옹의 머리르 쓰다듬고(실제로는 로옹이 나보다 더 나이가 많지만) 대견하다고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로옹은 미국정착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킬링필드 시기에 가족의 생존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인 이 책을 펴내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지뢰 없는 세상 만들기 운동' 단체의 대변인으로 일했으며 지금까지 평화와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 세계인에게 전하는 연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승리이다.
한 가족이 겪은 상처와 숙명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는데, 당차고 똘똘한 로옹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또 한 번 힘든 시간들을 고스란히 다시 겪으면서 무엇보다 값진 이 회고록을 펴내었다. 그럼으로써 전쟁과 대학살이 어떤 상처와 고통을 낳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똑똑히 아로새겨주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평화의 소중함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로옹 작가 덕분에 가족의 소중함을 더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 책 속의 그 누구도 내게 로옹의 엄마와 아빠처럼 되어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좀 더 아이들을 품어주고 사랑으로 감싸안아주며 아이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주는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자꾸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가족들인 나와 함께 하루하루를 숨쉬고 일상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바로 행복이고 감사해야 하는 일임을 이 책은 내게 말해주었다. 그런 사실을 깨닫게 해 준 로옹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