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마시멜로 유감: 우리에게 있어 번역이란 무엇인가? Part 1
* 마시멜로 유감: 우리에게 있어 번역이란 무엇인가? Part 1 : 스타 마케팅의 문제
* 마시멜로 이야기로 인해 온 나라가 씨끌벅쩍하다. SBS 출신의 모 아나운서는 작년에 이 책을 자신이 번역했다고 대대적으로 광고하면서 이 책을 홍보했고 출판사는 이를 통해 엄청난 부가 이익을 창출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관계 항들이 만들어낸 '효과'가 지니는 이데올로기적 특성들을 발견해 낸다. 출판사-독자-번역자로 이어지는 관계 만이다. 우리는 이 관계 망에서 창출되는 어떤 효과를 통해 '번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어떠한 의미 구조들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하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설에 의거하여 이 사건을 파악하고자 한다. 크게 1) 스타 마케팅의 문제 2) 한국에서의 번역의 문제가 그것이다.
- 이번 사건의 핵심은 바로 정지영이라는 아나운서가 자신이 이 책을 실제로 번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원 번역자인양 독자들을 기만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물론 여기에서는 출판사와의 뒷거래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공식적으로 정지영 아나운서가 이 책을 통해 벌어들인 액수는 약 8100만원이라고 한다. 이 책의 발간을 통해 자신이 얻는 부가적 이익을 놓고 본다면, 단순히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다. 출판사는 정지영이라는 이름을 통해 출판시장에서의 부가이익을 노렸을 것이고 정지영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부당이익을 획득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평소 자신이 구축한 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보다 강화시키려는 자신의 강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원 번역자의 위치이다. 과연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납득시켜야 하는가? 최대의 피해자는 어찌보면 그/그녀가 아닐까? 아니 오히려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원 번역자의 '부재하는 위치'를 대체한 미모의 아나운서 출신 번역자 정지영이 사실은 허구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허탈감으로 기진맥진하고 있는 그 책을 산 독자들 아닐까?
- 사실 어떻게 보면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정지영이 그 바쁜 일정을 모두 소화하면서 그 어렵다는 '번역'(물론 나는 이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기에 그 책의 난해함의 수준이 어느 정도가 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번역이라는 것이 책의 난해함의 수준의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임하는 자세리라. 아무리 쉬워보이는 책도 번역자가 진지한 자세로 번역하려 한다면 그 책이 쉽게 번역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그 때문에 결코 날림 번역이 되지도 않으리라.)을 하는 대단한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한다. 얼굴도, 몸매도, 돈도, 지적 이미지도 모두 갖춘 능력있는 유부녀가 '번역'까지 한다? 나의 상식으로 이것은 그야말로 스캔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는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그녀가 이 책을 번역했는지 조차도 몰랐으니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출판사는 스타마케팅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마시멜로적 유혹'에 빠져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의 주제이자 교훈이 그러한 "마시멜로적 유혹에서 빠지지 말자"인것 같은데, 그 출판사가 그 유혹에 빠졌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출판사, 정지영, 원 번역자들은 이 마시멜로적 유혹에 달콤하게 빠져 들었던 것이다.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정지영이라는 이중 번역자에 관련된 가열찬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아직도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알라딘 Sales Point : 254,940로 경제경영 주간베스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피라니아 이야기} 또한 가파른 상승세를 달리고 있는 사실이다. 나는 이 일련의 사태를 놓고 보면서 우리가 목도하는 현상들이 모두 음모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다. 물론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음모이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은 너무도 아이러니컬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 사태가 공식적으로 불거져 나오기 전에 KBS의 모 아나운서에 의해 또 다른 종류의 처세술에 관련된 책이 번역되어져 나왔다는 것이다(나는 그녀가 이 책을 번역했다라는 사실을 내가 주문한 책에 끼워져 있던 전단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물론 직감적으로 나는 이 상황을 정지영 사태와 연결시켰다). 충분히 대리번역의 소지가 있을 만한 대목이 아닐까? 물론 이것도 내가 음모이론을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정지영 사태를 목도하면서 내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물론 그녀도 그 어렵다는 번역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과연 있을까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다만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정지영 사태의 어이없음을 되풀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 자, 이제 이 모든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 해 보도록 하자. 출판계가 총체적으로 부진한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좋은 전략으로 스타 마케팅이 적극 활용된다. 책을 홍보하는데 있어 스타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출판사의 전략은 그렇다치더라도 자신이 번역하지 않는 책을 번역했다고 홍보하는 출판사나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 하는 정지영의 일련의 작태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물론 우리에게 원 번역자의 애매하고 모호한 위치는 여전히 남지만 말이다. 여기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이 바로 책을 샀던 애꿎은 독자들이다(물론 그 독자들은 정지영 아나운서의 미소와 사인에 혹해서 산 사람들이 꽤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한국사회의 지적 수준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정말 시쳇말로 쪽팔린 줄 알아야 한다. 아래는 이 사건을 "숫자숭배에 지배당한 우리 사회의 한계"로 파악한 한 대중문화 평론가의 글을 옮겨 논 것이다. 그리고 둘 째와 셋 째의 가설은 시간의 여력이 되는 대로 증명하고자 한다.
* 숫자숭배에 지배당한 위험한 우리 사회
[OSEN=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정지영 아나운서의 퇴진까지 가져온 밀리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는 숫자 놀음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것은 출판계에서는 ‘판매부수’로 불리며, 영화에서는 ‘관객수’로, 그리고 TV 드라마에서는 ‘시청률’로 불린다. 그것들은 이름만 다를 뿐 그 역할은 비슷하다. 작품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숫자들이 맡은 역할이다.
숫자들의 권력은 점점 커져서 언제부턴가 우리네 문화계는 콘텐츠 자체의 질에 승부하기보다는 이 숫자를 얻기 위한 무한경쟁에 들어서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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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디셀러보다는 베스트셀러를, 두고두고 꺼내보는 명작으로 남기보다는 최단기간에 최대의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를, 그리고 시청자들과 호흡하는 완성도 높은 드라마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를 추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마시멜로 이야기’가 보여준 숫자놀음의 진수
‘마시멜로 이야기’는 작금의 출판계가 해온 기획 출판의 정점을 보여준다. 책은 작가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전문번역자가 아닌 아나운서 정지영씨의 얼굴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목적은 단 하나.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출판의 스타마케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부터 연예인들은 작가라는 또 다른 명함을 갖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연예인들은 자서전에서부터 여행서, 수필, 어학교재, 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냈다. 일찍부터 출판사들은 스타마케팅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실제 출판사 얘기를 들어보면 비디오를 갖춘 선물세트의 성격을 띤 서적류에 있어서는 상당한 돈이 오간다고 한다. 그만큼 스타마케팅을 활용한 책에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러한 스타마케팅을 활용한 책들을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중 ‘마시멜로 이야기’가 모난 돌이 된 이유가 그 책이 추구했던 베스트셀러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이러한 책들이 과연 출판계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이냐는 점이다. ‘마시멜로 이야기’의 경우 원 번역자는 이 책이 “1만 부나 나갈까 싶었지 이렇게 많이 팔릴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내용은 좋지만 밀리언셀러감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말은 책 자체의 내용보다 정지영씨의 이미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걸 말해준다. 즉 이러한 책들은 스타들의 이미지를 포장한 ‘상품’의 성공이지 콘텐츠 자체로 승부한 ‘서적’의 성공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리작가들과 얼굴마담 스타들만 늘어나는 출판계는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독서군을 빼앗는 사태를 예고한다. 이 사건은 정지영씨의 윤리적인 문제보다 더 앞서, 이러한 베스트셀러라는 숫자놀음에 빠져있는 출판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영화의 관객수와 드라마의 시청률
그런데 이러한 숫자 경도 현상은 출판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에서 관객수로, 드라마에서는 시청률로 대변된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최고의 수치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영화 ‘괴물’과 드라마 ‘주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괴물’은 개봉 그 자체부터 괴물다웠다. 칸느 영화제에서의 호평(수상이 아니다)을 통해 솔솔 불어온 괴물에 대한 기대감은 마치 괴물의 탄생처럼 저 한강 밑바닥에서부터 차츰차츰 커져갔다. 그리고 대낮에 버젓이 등장한 괴물에 대해 일제히 언론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비평가치고 괴물 평 안 해본 사람 없을 정도로(이 영화는 실제로 비평가들의 비평 욕구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홍보가 된 이 영화는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엄청난 속도로 관객몰이를 시작했다. 여기에 언론들은 ‘몇 일 만에 몇 만 돌파!’라는 식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엄청난 정보의 홍수들로 범람하는 인터넷이라는 강물 속에서 뛰쳐나온 ‘괴물’은 일순간 ‘정보의 획일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제 어딜 가든 우리는 괴물에 대한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그 숫자의 압력은 지대한 것이어서 우리를 극장 앞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괴물이 사라진 지금까지 그 혼령은 여전히 인터넷을 떠돈다. 새로운 영화가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 괴물의 흥행 넘을까’류의 글들이다. 이러한 기사들은 괴물의 숫자를 다시 떠올리는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새로 등장할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끄집어낸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보자. 이 기사는 정보일까. 홍보일까. 정보라기보다는 홍보에 가깝다. 물론 ‘타짜’와 같이 19세 이상가 영화로서 500만 관객을 넘은 경우, 그것이 기사로 나왔다면 정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홍보로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대박 영화들에 조명이 집중되는 시각, 소외되고 있는 타 영화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관객수는 TV로 오면 시청률로 변신한다. 드라마 ‘주몽’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40%대를 넘는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은 드라마적인 재미 이외에도 시청률의 그 숫자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시청률은 권력이 되었다. ‘주몽’에 대한 비판이 어려운 것은 그 40%라는 막연한 시청률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이것은 ‘주몽’이외에도 수위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들 모두가 갖고 있는 무언의 압력이다. 시청률이 권력이 된 상황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무조건 시청률에만 올인하여 결국 시청률은 높으나 완성도는 떨어지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드라마의 존재기반은 드라마 자체가 아닌 시청률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는 ‘높은 시청률 = 완성도 높은 드라마’라는 등식은 깨지게 된다.
예술작품은 재미없다는 말은 옛말(?)
과거에 흔히 우리는 ‘예술작품은 재미없다’는 식의 자조적인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얘기 속에는 예술성과 상업성은 별개라는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 얘기는 상업적으로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예술적으로도 실패는 아니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문화계에서 이러한 얘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괴물’에 대한 관심은 ‘재미있다’는 점에 ‘작품성이 있다’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자극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칸느 영화제라는 작품성의 공간에서 벌어진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드라마 ‘주몽’에 대한 관심의 증폭 역시 ‘최초의 고구려사에 대한 접근’이라는 가치와 ‘퓨전사극’이라는 재미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물론 ‘마시멜로 이야기’ 역시 여타 연예인과는 다른 정지영 아나운서라는, 무언가 지적인 면모와 미모를 함께 갖춘 인물로 인해 가능했다(요즘 아나운서들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 직업이 갖는 양면성에 비롯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작품(완성도 높은 작품)도 재미가 있다는 얘기인가.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거꾸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이제는 작품성이라는 부동의 지위까지 얻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좀더 대중과 가까워진 예술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도 읽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이제는 잘 팔리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불리는 권력까지 부여한 혐의를 지울 수는 없다. 이로써 진정한 예술작품들은 예술로서도, 상업적으로도 소외 받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는 현재가 다양한 콘텐츠의 시대라는데 이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다양한 콘텐츠들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은 마치 다양성이 보장된 사회로 가는 징후로 얘기됐으나, 실제 우리의 삶은 그 중 ‘선별된’ 몇 개의 정보를 누리는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콘텐츠와 정보들은 어떤 식으로든 선별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그런데 그 선별과정은 과연 투명한가. 아니 공정한가. 이 정보들을 선별하는 순위 혹은 수치라는 근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부분에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수치는 콘텐츠의 질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단순한 수치가 아닌,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는 그 속에서 독자들과,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제대로 된 선택이 가능해질 것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 mansuri@osen.co.kr 블로그 http://thek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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