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수업

"사물은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사물은 우리의 에고를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안의 지배원리를 누가 알고 있는가. 명상록은 이 대답을 독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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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이어서 쓰기 3


벤야민은 기억의 대상으로서 역사를 사유한다. 회상하는 사람이 기억한 내용은 벤야민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기억 작업이 곧 이미지를 만든다. 그래서 역사 이미지는 무한하다. 이 무한성이 역사와 기억을 다루는 벤야민에게 특이한 점이다. 물론 그렇다. 인간이라는 삶은 하나일수도 없고, 직선적으로 살아낸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믿고 싶을 때는 많지만 말이다. "기억이라는 페넬로페적 작업"을 성좌 구조로 연결하는 벤야민은 역사를 신학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벤야민은 진화론적 경향도, 실증적 사고도, 목적론적 진보도 거부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맑스는 혁명이란 세계사의 증기기관차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상황은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아마도 혁명은 이 열차에서 여행 중인 인류가 비상 브레이크를 잡는 일일 것이다."(199쪽)


벤야민이 '정지상태로서의 혁명'을 말할 때 언급하는 여행객을 떠올려 보자. 맑스의 역사 유물론은 최종 목적을 향해 증기 기관차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사실 여기에 혼란이 있다. 세계사의 증기기관차는 벤야민의 표현처럼 자동 장치일텐데 어떻게 비상 브레이크가 작동할 수 있을까. 여행 중인 인류는 누구일까. 우선 혁명가나 투사를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유랑하는 민족? 혹은 귀족? 상인? 신학자? 예술가? 무엇보다 만약 기억 작업이 페넬로페적이라면 여행 중인 인류는 페넬로페일까 아니면 남편인가. 따질 것도 없이 아도르노가 신화를 재해석하면서 페넬로페를 자연-여성이라는 종속적 위치에서 해방시켰듯이 페넬로페일 것이다.  


벤야민은 연대기적 서술을 선호하지 않는다. 사건들이 짜임새 있게 연쇄된, 역사기록을 의심한다. 벤야민은 직조된 페넬로페의 베틀작업보다 그걸 다시 풀어내는 작업을 더 중요시 할 것이다. 진정한 역사의 이미지를 변증법적 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그럴 것이다. "건설적이면서 동시에 해체적인" 것을 통해 현재를 재구성하려한다.  


"뢰비의 결론에 따르면,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한마디로 해방을 위한 혁명적 비관론이다. 이것은 “역사는 원래 그렇게 진행될 것이[었]다”(즉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바꿀 수 없[었]다”)라는 ‘멜랑콜리한 숙명론’=‘역사주의’에도, “진보는 불가피하게 승리할 것이다”(혹은 “대중의 지지는 보장되어 있다”)라는 좌파의 ‘낙관론적 숙명론’=‘진보주의’에도 반대한다. 오히려 역사는 어떤 의미로든 미리 정해져 있기보다는 무한히 열려 있는 무엇이다. 그러므로 이 열림 속에서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 즉 해방적이고/이거나 유토피아적인 가능성들을 찾아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이를 위한 일종의 참조점이다."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소개말 중에서)



이상하다. 나만 그래? 그렇다면 그렇고. 


건설도 해체도 페넬로페가 해낸다면 이는 자동장치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페넬로페가 유예시키는 것은 또 무엇인가. 페넬로페의 비상 브레이크는 작동한 게 맞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은 몰랐을까. 할 말은 더 많으나 내일 이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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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이어서 쓰기 2.


역사적 유물론과 유대 메시아주의를 결합되기 어려운 '이질성'으로 설명하는 학자들에게 실망하게 된다. 이 점은 나중으로 미루자. 논의를 더 듣자면,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현실성을 현대성을 통해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중간하게 양자를 통합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를 '역사적 구세주'로 만드는 방식의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면 그러한 이론은 선언적인 의미 이외의 현실적 설득력을 상실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접근 방식은 벤야민의 이론을 '세속화'라는 과제의 관점에서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화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구한다. 또 현대성을 세속성과 초월성 사이의 역설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특수한 이해 방식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벤야민에게서 드러나는 새로운 세속화의 과제가 궁극에서는 억압 받는 자들의 자기해방이라는 역사적 유물론의 과제를 일관되게 사유하고자 했던 시도였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93)


이 단락에서 단연 두드러진 표현은 "역설적 관계 속에서"이다. "특수한 이해 방식"이다. 벤야민이 보기에 맑스주의에서도 그 특수한, 역설적 관계 흔적들이 있었다. 계급 없는 사회는 메시아적 시간 관념이 세속화된 시간이다. "벤야민은 이 세속화라는 과제가 그런대로 괜찮았다 das war gut so고 적어 놓음으로써, 자신이 세속화라는 맑스의 과제를 이어받고 있음을 암시한다."(195) 


말하자면 '계급 없는 사회'를 굳이 관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배 신학의 교리와 어긋나지 않는다. 메시아적 시간은 유대주의에서 현실적 효력이 발생할 뿐이었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적 시간과 계급 없는 사회 관념은 서구 전위대로 나서게 된다. 서양 역사에서 보자면 숱한 부침을 겪어 왔던 유대 메시아주의가 빛을 안게 된다. 그들의 원천은 변방에 있었다. 벤야민은 이 현실을 특수한 방식으로 역전시킨다. 계급 없는 사회는 이렇듯 벤야민에 의해서 메시아적 시간을 수월하게 끌어온다. 메시아적 시간의 현실성은 메시아주의의 실제적 구현이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나만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고. 뭐가 그런대로 괜찮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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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언급했던 <신봉건주의>는 시대를 버티고 있는 여러 갈래의 체제들을 사유하기 좋은 개념이다. 영미철학이 자주 갈구하는 고대그리스 철학의 우선성은 신봉건을 덮고 있는 난제들의 해결책 중 하나다. 따라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유 흔적들 또한 노예제를 암막 속에 가린 방식으로 존재한다. 최소한 내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과거 사유를 훓어보는 일이 필요할 때 <신봉건주의>라는 규준점은 좋은 지랫대가 된다. 쿠자누스를 읽고 있는 와중에 왜 이런 구구절절한 생각들이 떠오르겠는가. 우리는 절대적 앎을 추구하려는 강박을 요구받고 있다.


the existent object’s quiddity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감성 Sinnlichkeit, 지성Verstand, 이성 Vernunft을 구분하며 중세인이 가졌던 곤란과 이상을 드러냈다. 그는 유적 일치와 종적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앎을 구한다. 철학적 신학은 신을 정의해야 했다. 요즘 읽는 벤야민 책에서도 '차이'를 대수롭게 다루는, 종내 대수롭지 않게 만들고야 마는 장면을 본다.



다음 쪽에 판타스마고리에-이렇게 읽는 게 맞나?-에 덧붙여 노동자 운동의 타락을 이야기한다. 유적 일치와 종적 차이 그리고 지성과 이성, 감성은 얽히고야 만다. 차이를 위해서 일치를 위해서.




 














이 책의 저자는 젊은 아도르노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고 들었다. 오늘날 그것도 한국에서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을까. 이 책도 벌써 7년차이니 젊은 연구자보다 중견 연구자라고 해야하나.

P. 36~37현대사회에 적용해 보자면, 이런 계몽의 동일성 논리를 가지고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이야기는 혐오 논리예요. 다양한 파국적인 상황에 접한 인간이 공포에 직면했을 때 그 공포를 반드시 특정 대상에게 투사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게 혐오의 메커니즘입니다. 제노포비아를 비롯한 현대사회의 다양한 혐오의 메커니즘 역시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을 1940년대에 썼지만, 21세기에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혜안 중 하나가 혐오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리고 공포라는 정념과 지배의 상관관계에 관한 저자들의 서술은 오늘날의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몽의 변증법 함께 읽기> 소개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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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으로 뭔가를 삭제하고 있는데 방금 뭔가를 보다가 아차 했다. 비슷한 내용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하는걸 느끼지 못했다고나 할까. 애초에 쓸 필요도 지울 필요도 없던 것일까. 기록 삼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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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4-02-18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컹‘에는 영영 다가갈 수 없는 틈이 있다.
‘내 팔이다‘에는 선언이 갖는 내적 공백이 있다.
‘나는 바보다‘에는 고백이 갖는 외적 관할선이 있다.
틈과 공백과 선은 모두 연속이 아니다.

내 방식대로 생각하는 게 익숙해서 무엇을 읽더라도 곧이어 맴돌게 된다.
내 맘대로 사전을 만들곤 하면서 그런 경향이 강박이 되곤 한다.
지워도 지워도 다시 채워지는 그런 사람에게는 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