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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목욕탕 - 일제가 남긴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야스다 고이치.카나이 마키 지음, 정영희 옮김 / 이유출판 / 2022년 8월
평점 :
77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펼쳐든 책은 '일제가 남긴 전쟁의 상흔을 찾아서' 라는 부제를 단 <전쟁과 목욕탕> 이다. 강골 사회파 저널리스트인 야스다 고이치와 감칠맛 나는 그림을 그려내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사회의 다양성'을 주제로 국내외를 취재해 맛깔나는 글을 써내는 '엣세이스트'인 카나이 마키가 의기투합해 완성한 책이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탕에 들어가는 그와 인간을 관찰하기 위해, 그리고 활력을 얻기 위해 탕으로 향하는 그녀는 목욕탕을 통해 '일본 사회의 허점과 한계를 드러내는' 책을 만들자고 다짐한다. 사회의 모순에 분노하고, 실패한 역사를 제대로 살펴서 우리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더 늘어난다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목욕탕을 탐방하는 여정에 나선다. 어딘가에는 한국의 독자들께서도 공감해주실 만한 데가 있다고 확신하면서.
여정의 시작은 태국의 힌다드 온천이다. 타이멘 철도, 콰이캉의 다리, 전쟁박물관, 희생자의 묘지를 돌면서 자신의 나라가 가해한 역사를 목도한다.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말에 일본인이냐고 묻는 그들에게 네, 일본인입니다. 정말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일본인이에요. 서로 밝게 인사를 나눴지만, 박제된 침략전쟁의 현장 앞에서 카나이씨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힌다드 온천은 일본군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전쟁의 잔흔이다. 다시 총을 쥐고 포로 앞에서기 전까지 탕 속에 있는 그 순간에는 그들도 보통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 잔인한 사실을 증명하듯 힌다드 온천은 흔치 않은 유산으로 남아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평등한 즐거움과 행복을 기원한다.
두번째 여정은 오키나와, 일본 최남단의 대중목욕탕인 나카노탕이다. 주인장 시게 씨의 환대에 탕에 들어가기 전부터 느슨하고 따뜻하며 다정한 시간이 흘러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전쟁 전후를 살아 낸 한 여인의 발자취를 듣는다. 미군기지는 여전히 오키나와에 버티고 있고 사건, 사고도 여전한 상황에도 시게 씨는 물을 채우고 탕을 데운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벤치에 앚아 손님을 맞고, 서로의 안부와 간식 나누며 수다꽃을 피운다. 50년 세월을 살아내며 변함없는 일상을 살아오니 그녀 앞에 단골들의 행복한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행복도 함께. 그들은 그 나카노탕에서 우연히 만난 다쿠시 어르신의 자택을 방문해 취재를 하는 기회도 얻게 된다. (목욕탕 신의 인도로) 전쟁만큼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그는 이시카와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평화를 상징하는 사미센을 연주하는 다쿠시 씨는 오키나와의 기지 문제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부디 오키나와의 문화에 대해서도 이해해주셨으면 한다고, 전부 연결되어 있다고 하신 말씀이 깊이 남는다.
세번째 여정은 목욕강국 한국이다. 맑은 적이 별로 없던 한일 관계는 그들이 방문한 2019년 7월경 또다시 최악을 갱신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대중목욕탕에서 엔카를 열창하는 인물, 해방 전후의 세월을 배짱과 기지로 뛰어넘은 90세의 어르신, 최병대 씨다. 그 분이 들려주는 역동적인 한일 근대사 그리고 엔카를 부르며 가둬두고 봉인한 그 시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사람들과 만난다. "과거와 원한은 흘러가지만, 흘려보내서는 안 될 마음이 있다." 두 나라의 땅을 힘껏 밟고 온 힘으로 살아온 어르신의 삶이 노래자락에 응축되어 내 마음에도 물기가 인다.
한국의 목욕 문화를 경험하면서 찜질방에서 받아든 2장의 수건에서 페미니즘을 논하는 카나이씨의 입이 삐죽대는 부분에서는 동질감을 느끼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페미니즘 운동에 분연히 일어섰던 선배님들 우리 언제 한번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십시다.ㅋㅋ) 이태리타월, 목욕관리사, 자동 등밀이 기계 등 우리의 목욕 문화가 재미나게 그려져 있다.
엣세이스트의 자기장과 전 주간지 기자의 순발력으로 다음 취재원을 발견한 그들, 바로 동래의 녹천온천호텔의 사장이다. 그렇게 들어간 녹천탕에서 핑크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통역사 Y씨를 통해 가볍게 대화를 시작한 카나이씨는 '옛날에 한국은 일본에게 고약한 일을 당했다. 나쁜짓을 했다면 사과하는 게 당연한거 아니냐.'는 지당한 말을 듣게 된다. 카나이 씨는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그 일에 대해 제대로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 때문에 한국인들이 화가 나는 건 당연합니다. 저는 역사를 왜곡하거나 잊은 척 하는 것이 훨씬 더 죄가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이렇게 나눈 이야기를 책에 써도 되겠느냐고, 성함을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일본인에게는 이름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였다. 카나이 씨는 자신을 배려한 '미안해요.'라는 말까지 포함해 가슴에 무언가 복받치면서 이 분을 잊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반감을 가진 이를 마주한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알몸으로 마주한 목욕탕이라는 공간이 잠시 경계를 허물고 마음을 말하게 한 것일까.
다음 여정부터는 코로나 시국을 맞아 국내의 대중탕으로 기획을 선회하게 된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는 책 전체를 통해 일본과 전쟁의 관계를 생각하는 여행이 된다. 네번째 여정지는 사무카와, 귀환자들의 목욕탕과 비밀의 공장이다. 패전 직후 사무카와에 귀환자 주택이 생겼고, 그들은 목욕탕을 만들어 달라는 청원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1954년 주민들이 고대하던 목욕탕이 스즈란탕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2014년까지 영업했다고 한다. 취재의 신은 정말 그들 편인 것일까? 자치회장이 알려준 최후의 산증인인 A 할머니는 매일 군수공장을 드나들며 노무자들의 식사를 만든 분이었고, 그에게서 저쪽에만 가면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생생한 증언을 듣게 된다. 사무카와 문서관에는 지역사 편찬 사업으로 <사무카와 지역사 연구> 에 군수 공장 근무자를 기록해 두고 있었다. 와 이 부분에서 정말 소름이 돋았다. 정말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신은 미소를 보내는 것이 맞다!
목욕탕에서 시작한 기획이 사라진 목욕탕으로 독가스까지 인도해 주었다. 증언자 찾기에 난항을 거듭하던 중 드디어 이시가키 씨 댁을 방문하게 된다. "그저 열여섯 아이였습니다. 그런 아이가 전쟁을 도왔던 겁니다. 이페리트 폭탄은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 곧바로 죽이지 않는 폭탄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인력을 쓰게 만드는 무기였던 겁니다. 즉 이페리트는 적군의 공격을 약하게 만드는데 효과적인 무기였습니다. 그런 무기에 우리가 관여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니, 관여할 수밖에 없도록 국가가 강요했던 겁니다." 그는 아흔이 넘도록 '이페리트 폭탄'의 잔상을 떠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태여 '말하는 자의 역할'을 떠안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식과 손자 세대가 전쟁을 경험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 책의 마지막 여정지는 오쿠노시마다. 지금은 대규모 휴양 시설인 국민휴가촌으로 토끼섬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가해의 역사를 지녔다는 것, 그것을 잊으려 한다는 것, 은폐하려 한다는 것, 그리고 역사를 고쳐 쓰려 한다는 것, 이런 일련의 흐름이 여실히 드러났다. 들려오는 역사의 비명에 저자는 오쿠노시마로 달려갔다. 전쟁의 죄과를 알기 위해, 망막과 가슴에 역사를 새기기 위해. 세상에는 씻어서 흘려버릴 수 없는 것도 분명 있다. 독가스를 만든 사람이 있고, 사용한 사람이 있고, 죽은 사람이 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글로 남기는 사람이 있고, 그 글을 읽고 현지에 가보는 사람이 있다. 역사가 더 이상 왜곡되지 않도록 바통을 건네주며 이어나가는 사람들, 야마우치 씨도 오사무 씨도 이 길을 걷는 든든한 선배들이다.
오쿠노시마 독가스 무기 공장에서 양성공으로 근무했던 아흔 다섯 살의 증언자, 후지모토 씨는 14살부터 18살까지 3년 반의 가장 민감한 시기를 공장 안에서 보냈다. 패전 후에도 머릿속에 화학 방정식을 이고, 그저 살기 위해서 아무 생각없이 일만 했다. 그러다 마흔여덟이던 해에 건강 검진에서 독가스로 인한 건강 재해가 판명됐고, 1995년 독가스 후유 장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독가스 피해자라는 인정은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는 잊지 않습니다. 괴물로 만들어 진 것, 범죄자로 길러진 것,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만들었던 것,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학 방정식 따위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우리로부터 인간의 마음을 빼앗았습니다. 일본군은 중국으로 갔고, 일본도로 사람의 목을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독가스로 고통을 주고 그들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만든 독가스가 그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의 말은 죄의 고백이라기 보다는 분개에 가까웠다. 그는 지금껏 그런 시간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는 '피해와 가해' 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는 사명을 자신에게 부과했다. 나는 그 무게를 가늠할 수조차 없어 이제껏 참아왔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
야스다씨는 목욕탕을 '궁극의 비무장 지대'라고 말한다. 전쟁을 상흔을 찾아 도끼자루 끝에 목욕수건을 걸고 떠난 저널리스트다운 비유다. 그들은 그곳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 그 사람들의 유일무이한 이야기를 손바닥으로 가만히 건져올려 우리 앞에 풀어놓았다. 인간의 깊이와 전쟁의 죄과를 더더욱 잘 드러내 보이면서 말이다. 그들의 당랑지부 결단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당신들의 목표는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