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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있니? ㅣ 에프 그래픽 컬렉션
틸리 월든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쉽지 않은 그래픽노블이었다. 주제는 무겁고, 분위기는 어두웠으며, 시작부터 베일에 쌓인 듯 꽁꽁 감추어진 주인공들의 속내를 도통 알수가 없어 답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가득 채우는 묘한 긴장감과 신비로운 분위기 탓에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루와 비.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조차 우연이었고, 어쩌면 굉장히 쉽게 서로를 떠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루는 집을 떠나 맥키니로 향하던 중 엄마 친구인 비를 만나게 된다. 자동차 정비공인 비는 차를 타고친척을 만나러 떠나던 중이다. 우연한 만남이지만 비는 루를 맥키니까지 데려다 주기로 한다. 집을 가출한 듯 보이는 루. 그러나 비는 루에게 이것저것 묻지 않는다. 적극적인 간섭을 하는 어른이 아닌, 그저 스쳐 지나가다 잠시 도움을 주는 아는 사람의 역할을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맥키니에 도착한 두 사람. 비는 루가 맥키니에서 만날 친구가 없다는 것도, 무작정 집을 나와 특별한 계획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사소한 다툼 끝에 헤어진 둘. 하지만 결국 비는 루에게로 돌아왔고, 루는 비의 목적 없는 여행길에 동행할 수 있길 요청한다.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루와 비의 긴 여정. 이 여정에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신비로운 고양이도 함께한다.
여행길이 이어지는 내내 불안하고 긴장되는 풍경이 이어진다. 루와 비는 서로를 의지하지만 두 사람 모두 상대에게 날을 세우며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속되는 긴장감과 당장이라도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 이 책을 읽는 내내 느끼는 감정이다. 실제로 책 속의 배경은 어둡고 흔들리며, 주인공들이 만나는 등장인물들 모두가 수상하다. 복잡한 번화가나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드넓은 길에 끝없이 펼쳐진 긴 도로, 그 도로 위를 불분명한 목적으로 무작정 달려 나가는 주인공들. 괜시리 책을 읽는 나까지 주변을 경계하고 긴장하게 되어버린다.
루와 비가 만난 신비로운 고양이의 힘 탓에 둘은 도로 조사국 사람들에게 쫓기게 되고, 여러 위험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점차 서로를 신뢰하게 되고 꼭꼭 숨겨온 자신의 이야기를 힘겹게 꺼내는 두 사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모든 일에 날카롭고 예민하게 반응해 온 두 사람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되어버린다. 감히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을 고통. 루와 비, 서로가 아니고서야 두 사람의 심정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듣고 있니?' 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이 이야기는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주인공들의 슬픈 외침이 가득하다. 자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는 상대를 마주하는 것.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상대에게 반문하고, 또 내 앞에 있는 상대에게 용기를 주는 말. "듣고 있니? 네 잘못이 아니야." 라는 따뜻한 위로를 건내며 상처를 안아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 결국 상처입은 아이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고 문제를 극복해나간다. 당장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이나 과장된 위로가 아닌 진실된 말 한마디가 상처입은 상대방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인공들의 심리처럼 불안정하고 긴장되는 이야기를 함께하는 과정에서 책을 읽는 독자는 상처와 치유, 극복에 관해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긴장감이 지속되는 두툼한 한 권의 여행길이 결코 물 흐르듯 편안하고 재미있지는 않지만,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자신의 속내를 꼭꼭 숨기는 루와 비처럼, 책 속의 모든 사전 정보와 배경도 꼭꼭 숨겨진 탓에 첫 시작은 혼란스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사람의 여행길을 함께하고 싶어지는 것은 이 책이 가진 힘일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비로소 마음이 후련해 지는 것. 그리고 내 주변을 곰곰이 돌아보게 되는 것. 자신의 말을 들어줄, 혹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줄 상대를 찾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살피게 되는 것. 그래픽노블 '듣고 있니?' 를 읽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고마운 변화이다.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난 것 처럼 여운이 길게 남는 책 '듣고 있니?'. 이 책과 함께 주변에서 나의 목소리를 찾고 있는 사람, 혹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길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