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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에게 전화하지 마라
론다 핀들링 지음, 이경식 옮김 / 서돌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좋아요? 미안하지 않던가요? 나 이렇게 죽을만치 아파서 끙끙대는 동안 당신, 살기 편하던가요? 살만하던가요? 내 생각 같은 건 전혀 안 나던가요? 끝나지 않는 내 마음을 족쇄처럼 매단 채 어느새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 어떻게 날아갈 수 있었나요? 날 이렇게 아프게 해놓고 당신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요? 당신은...날 사랑하긴 했었나요?
그 남자(들)에게 전화해서 나는 이런 말들을 쏟아붓곤 했다. 때로는 상상 속에서 때로는 실제로. 말을 퍼붓고 증오와 슬픔을 퍼부었다. 때로는 애원하고 때로는 호소하고 때로는 절절히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내 사랑을 책임지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전화로 쏟아붓는 그런 말들은 그 남자(들)의 냉담함에 부딪쳐 우수수 떨어져내리고는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난 남자(여자)는 전혀 아프지 않고, 미안해하지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사랑이 이타와 배려라고 누가 지껄였던가? 사랑의 속성은 지독한 이기심이다. 지금 당장 사랑하는 내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그 순간이 끝나면 손 탁탁 털고 일어나 등 돌리고 떠나는 것이 사랑이다. '지금 당장, 여기, 바로 그 사람'이라는 철저한 현재성만이 사랑을 지탱해주는 약발이다. 한 달 된 사랑이 10년된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랑은 구제나 중고의 멋스러움 따위는 통하지 않는 시장이다. 늘 따끈따끈한 새것, 최신형 모델의 전쟁터. 새것이 구닥다리를 밀어내는 냉혹한 시장인 것이다. (정, 의리,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가끔의 예외가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새 사랑 찾아 한들한들 떠난 것들이야 지들 살길 찾아갔으니 잘 먹고 잘 살아라 냅둔다 치고, '헌신짝처럼 버려진' 헌 것들은 어찌 해야 한단 말인가. 모든 사랑의 문제와 슬픔, 모든 문학작품과 대중가요들은 그들-채인 것들-을 주목한다. 사랑이 가진 그 냉혹하고 이기적인 속성을 알기 때문에 역사는 늘 실연당한 이들을 어떻게든 위로하기 위해 별별 처방을 다 내려왔다. 술, 마약, 화끈한 원나잇 스탠드, 쇼핑, 공부, 여행, 심지어 자살까지! 하지만 이들 처방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사랑의 처방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옛 사랑 따위는 절대로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제아무리 아름답고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이었다 해도 말이다.
이 악물고 절대로 '그 남자(여자)에게 전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심리치료사 론다 핀들링은 이야기한다. 그것이 잃어버린 사랑을 극복하는 첫 단계이자 마지막 단계이다. 되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포기해야 한다. 깨끗이. 그럼 어떻게? 전화하지 말아야 한다. 떠난 사람에게 전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화번호를 눌러 목소리를 듣고 시시껄렁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뒤집어 말하면 네 놈이 날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뒤집어 말하면 네 놈 때문에 내가 지금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는),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뒤집어 말하면 너, 나같은 여자(남자)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등등을 구구절절 실타래 풀고, 죽은 자식 거시기 만지듯 넋두리 늘어놓고 한 판 굿하듯이 몸과 마음을 헤집는, 고통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떠난 사람에게 전화하는 일은 죽을만큼 힘들고, 전화하지 않는 것도 죽을만큼 힘들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그것이 시작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는 진실에 눈을 떠야 한다. 애원과 호소, 협박과 매수 따위가 통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전쟁에서 진 순간, 그걸로 끝. 이어야 한다고 론다 핀들링은 강조한다. 물론 그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아니, 사실은 잘 몰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감히 날-'을 품고 있는 마음은 사실 핀들링의 지적대로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안간힘, 다친 자존심의 피눈물이다. 사랑이 아닌 집착으로, 옛일을 끙끙 품고 있는 어리석음. 그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끝난 사랑은 반복재생하지 말고, 복습하지 말고 소처럼 되새김질 하지 말아야 한다. 끝난 사랑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끝없이 벽에 머리 박으며 자책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 남자(여자)가 떠났으니 다시는 난 사랑하지 못할 거야, 라는 망상 또한 집어쳐야 한다.
이 책이 조금 더 일찍 나왔더라면, 사람들이 겪었던 사랑 뒤의 시간들이 조금은 편했을까? 잘 모르겠다. 다만 내 생의 사랑은 하나가 아니고, 그 남자(여자)만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을 곱씹는 것만으로 새로운 힘이 솟는다는 것, 그게 사실이리라. 상처나 고통, 불행과 행복이 모두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은 유심론식 마인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내 사랑의 질이 결정된다. 사랑은 나쁜 놈이 나쁜 년을 만나고, 좋은 년이 좋은 놈을 만나는 인과응보가 아니다. 사랑은 '관계'를 구성하는 힘의 방식이다. 비로소 '내' 가치가 중요하고, 더욱 절실해지는 요즘이다. 문득 이 책이 필요한 사람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