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9 - 조선시대 -하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9
이현세 그림, 유경원. 권민정 글, 한국역사연구회 감수 / 녹색지팡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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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9를 읽고 이양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당연히 배입니다. 

이양선 : 한자로 ‘’ 즉 모양이 다른 배라는 뜻으로 당시 서양의 배가 우리나라 배와 모양이 달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서양 열강에서 보낸 것으로 이단선(), 황당선()이라고도 하였다. 18세기 중반 영조 시대부터 이양선에 대한 기록이 보이기 시작하며 특히 순조 이후로 급증하여 조선 말기 흉흉해진 민심을 더욱 동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풍랑을 만나 표류하거나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려다가 실수로 들르게 된 배들도 있었고, 조선의 해안을 측량하고 통상을 요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배들도 있었다. 특히 18세기 후반 이래 영국, 프랑스 군함들이 제주 해안과 동해안, 서해안 등을 불법으로 측량 탐사하였으며, 아편전쟁(1840)과 뒤이은 베이징조약(1860)으로 중국의 문호를 개방한 뒤에는 서양 열강의 조선에 대한 통상압력이 높아져 이양선의 출몰도 훨씬 빈번해졌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서양 열강의 이러한 통상요구를 거절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통상 요구를 위해 연해를 찾은 외국 선박과 조선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이 대표적이다. 

아하! 이양선이 외국 선박이였구나! 그리고 외국 선박과 조선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졌고,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까지! 대단하다! 쩐다... 그리고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강화도에서 했던거 아닌가? 수상한데...  

나는 이 책을 읽고 이양선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좀 아는 것도 있긴 하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도 나는 그것때문에 책이 고맙다는 것을 세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책을읽고 쓰다가 모르면 사전으로 찾아 쓰고, 그렇게 해야 내가 실력이 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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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8 - 조선시대 -중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8
이현세 그림, 유경원. 권민정 글, 한국역사연구회 감수 / 녹색지팡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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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어제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8를 읽고 쓰려고 합니다. 오늘은 공명첨과 강한사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명첩 : 1905년(광무 9년) 11월 10일에 발급된 공명첩(空名帖)이다. 공명첩은 국가에서 부유한 사람들에게 재물을 받고 형식상의 관직을 부여하기 위해 발급해주었던 ″이름이 비어 있는 임명장[空名帖]″이다. 공명첩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임명장과 달리 이름을 적는 난이 비어 있으며, 정3품 통정대부에 올려준다는 글만 보인다. 

  
문서 끝에 적힌 주기(註記)를 보면 숙릉(淑陵)의 잡초 제거를 감독한 자에게 특명[特恩]으로 품계를 올려준다는 내용이 보이므로, 이 문서는 고종의 명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숙릉은 함경도에 있는 조선 태조의 증조모인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의 능이다. ″칙명지보(勅命之寶)″가 찍혀 있다. 

나는 공명첩이 글자 그대로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임명장을 말한것과 관리드은 이 공명첩을 들고 다니며 곡식이나 돈을 받고 즉석에서 이름을 써 넣어 주었던 것만 알고 있는 것을 어떤 책을 읽고 알았는데, 오늘 이 책을 읽고 쓰니까 더 자세히 나와서 내 지식에 더욱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럼 강한사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강한사 : 경기 여주군 여주읍 하리()의 남한강변에 있다. 사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14평의 맞배지붕이고,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건평 30평이다. 이 밖에 관리인이 거주하는 관리사가 있으며, 정조의 친필로 된 대로사비()가 있다. 1785년 정조가 영릉(:효종의 능)에 행차하다가 생전의 송시열이 여주에 머물 때마다 이곳에서 영릉을 바라보고 효종을 기려 통곡하며 후진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주장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우를 짓도록 하고 친히 비문을 지었다. 

 건물이 지어진 그 해에 사액()되었는데, 그 때는 송시열에 대한 존칭 ‘대로()’의 명칭을 붙여 ‘대로사’라 하였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철폐할 때 전국에 있던 송시열의 서원 ·사우 44개소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강한사로 이름을 바꾸어 대원군이 남겨놓은 47서원의 하나가 되었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공명첩은나는 공명첩이 글자 그대로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임명장을 말한것과 관리드은 이 공명첩을 들고 다니며 곡식이나 돈을 받고 즉석에서 이름을 써 넣어 주었던 것만 알고 있는 것을 어떤 책을 읽고 알았는데, 오늘 이 책을 읽고 쓰니까 더 자세히 나와서 내 지식에 더욱 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내가 알다가 모르는 것을 알았고, 강한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정조의 명으로 세워진것만 알았는데 이 책을 읽고 더욱 더 알아서 기쁘다. 한국사는 많이 읽는 것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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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7 - 조선시대 -상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7
이현세 그림, 유경원 외 스토리, 한국역사연구회 감수 / 녹색지팡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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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녕하세요, 저는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7를 읽고 조선 시대의 외국어 교과서 3개를 알아보겠습니다. 

노걸대신석 : 활자본. 1책. 1761년(영조 37) 김창조() ·변헌() 등이 엮어, 1763년(영조 39) 간행되었다. 이미 있는 《노걸대()》의 내용이 낡았으므로 이를 약간 새롭게 고친 것으로, 체재는 그 전 책을 그대로 따랐다. 책머리에 홍계희(洪)의 서문이 있다. 이 책에 담겨져 있는 중국의 인정 ·풍습 등은 여러 방면의 역사적인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박통사신석언해 :목판본, 3권 3책, 20.7×31.2cm이다. 백화문본 《박통사()》를 당시의 쓰임새에 맞게 내용을 수정하여 백화문본 《박통사신석()》을 만들고 그것을 언해한 것이다. 《통문관지()》 권 8에는 '신석박통사' 및 '신석박통사언해'라 기록되어 있다. 본문인 원문의 백화문과 글자마다 한글로 붙인 중국의 정음()과 속음()의 두 종류 발음표기와, 구절마다 언해문을 붙인 체재로 되어 있다.

언해문은 전에 나온 언해본인 《번역박통사》나 《박통사언해》보다 상대적으로 직역체인데 18세기 중엽의 국어를 잘 보인다. 원문과 언해문 사이에 권표(), 구 사이에 'ㄴ'표가 표시되어 있다. 최근에 발견된 《노걸대신석언해()》와 같은 체재를 보인다. 두 책이 같은 언해자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구절 뒤에 중요 어휘에 대한 협주(:끼워 넣는 주)가 붙어 있지 않은 점은 《노걸대신석언해》와 차이를 보이며, 마지막에 《박통사집람()》이 첨부되어 있지 않은 점은 《박통사신석》과 차이를 보인다.

서울대학교 일사문고() 소장본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구장서각() 소장본이 전해진다.  
 

역어유해 : 2권 2책. 1690년(숙종 16) 역관() 김경준() ·김지남() ·신이행() 등이 편찬하여 사역원()에서 간행하였다. 청()나라에서 일상 사용하는 말이나 문장 가운데 편리한 것을 가려 한글 음을 달고 중국 음도 함께 달아 놓았다. 역과초시() 및 한학()의 교재로 사용하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조선 시대의 외국어 교과서 3개를 알아내어서 기쁘다. 그리고 이런것들은 좀 어렵게 썻지만 이런걸 포기하지말고 쓰는 내가 아주 자랑스러운 것같다. 나는 이런 한국사 책을많이 읽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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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6 - 고려시대 -하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6
이현세 만화, 김미영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감수 / 녹색지팡이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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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책을 읽고 칭기즈 칸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조금 복잡하게 썼으니 양해 바랍니다.

칭기즈 칸 :

복수와 약탈의 세계에서 사고무친의 고난을 겪다



1162년경 오늘날의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근처, 오논 강 유역 숲에서 보르지긴 씨족 예수게이와 올크누트 부족 출신 후엘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후엘룬은 메르키트 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한 처지였다. 예수게이는 이미 첫 부인 소치겔과의 사이에 아들 벡테르를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전사의 이름이었다.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부르테와 약혼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타타르족 야영지를 방문했다가 독살당하고 말았다.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자식 일곱 명이 남겨졌다. 12세기 당시 초원 지대에는 수십 개 부족과 씨족들이 전투, 사냥, 유목, 약탈, 납치, 교역 등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예수게이의 보르지긴 씨족은 타이치우드 씨족에 사실상 의탁해 살고 있었는데, 타이치우드 씨족은 예수게이가 죽자 그 가족들을 버리고 이동했다. 고립된 가족은 오논 강 유역에서 사냥과 채집으로 겨우 연명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 시기 테무진은 자무카와 의형제를 맺었고, 배다른 형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였다.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을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었지만 테무진은 탈출했다. 1178년 16살 경 테무진은 부르테와 결혼하고 몽골 중부의 유력한 부족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복종하여 안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메르키트 부족이 후엘룬을 빼앗긴 것에 대한 뒤늦은 복수로, 테무진의 아내 부르테를 납치해갔다.

 

 

타타르와 타이치우드를 정복하고 초원의 강자로 떠오르다


테무진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옹 칸에게 메르키트를 습격할 뜻을 밝혔다. 메르키트와 구원(舊怨)이 있던 옹 칸은 테무진과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를 끌어들여 메르키트를 공격해 승리했다. 테무진은 의형제 자무카 무리와 함께 생활하며 안정을 찾았지만 1181년 자무카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쌓기 시작했다. 1189년 여름 27살의 테무진은 옹 칸의 승인 아래 전통적인 씨족, 부족 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의 칭호를 차지했다. 1196년에는 옹 칸과 함께 타타르 원정에 나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쟁을 통해 테무진은 금나라가 타타르, 케레이트, 몽골 등 여러 부족들을 서로 싸우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1197년 테무진은 주르킨 부족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케룰렌 강과 쳉게르 강이 만나는 곳 근처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어다. 이곳이 몽골의 수도 아바르가가 되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원정을 위한 기지 구실을 했다. 1201년, 새롭게 떠오르는 테무진 세력에 반감을 지닌 씨족들이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해 옹 칸과 테무진에 도전했다. 옹 칸은 자무카와 맞서고 테무진은 타이치우드 부족과 맞서 승리했으나 자무카는 달아났다. 1202년 옹 칸은 메르키트를 공격하고 테무진은 타타르를 공격했다. 타타르를 정복한 테무진은 수레바퀴 비녀장보다 키가 큰 타타르 남성들은 모두 죽이고 나머지는 자기 부족의 구성원으로 융합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몽골 군대와 부족을 아르반(10호), 자군(100호), 밍간(1000호), 투멘(1만호) 체제로 재편했다.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의 지배자 칭기즈칸으로 거듭나다






테무진은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을 혼인시키려 했으나 옹 칸은 거부했다. 그러나 테무진의 군사력을 당해내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옹 칸은 계략을 세웠다. 혼인을 수락하고 축하 잔치에 테무진을 초대해 제거하려 했던 것. 소수 병사만 이끌고 옹 칸에게 가던 테무진은 계략을 알아채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옹 칸의 추격을 피해 살아남은 자는 불과 19명. 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테무진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들 19명은 아홉 부족 출신으로 전통적인 씨족이나 부족 관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결사체가 탄생한 셈이었고, 이는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나 마찬가지였다. 테무진은 흩어진 추종자들을 모아 옹 칸을 향해 진군했다. 기습당한 케레이트 부족은 대부분 테무진에게 항복했다. 옹 칸은 나이만에서 죽임을 당했고 1204년 테무진은 나이만을 정복했다. 테무진 앞에 끌려 온 자무카의 유언은 이러했다. “나를 죽여 그 뼈를 높은 곳에 놓아라. 그러면 내가 영원히 그대의 후손들을 보호할 것이며, 그들에게 복이 되겠다.”

 

1206년 테무진은 부르칸 칼둔 성산(聖山) 근처 오논 강 원류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100만 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가 탄생할 참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 통치자의 칭호는 칭기즈칸이었다. 테무진, 아니 칭기즈칸은 부족 간 납치와 몽골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시키고, 완전하고 전면적인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으며, 칭기즈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개인보다 법이 우위에 선다는 것을 선언했다. 칭기즈칸은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 관계를 확대하여, 부족이나 민족 전체 단위로 가족적 유대를 맺는 정책을 폈다. 그리고 1207년부터 1209년까지 여러 차례 공격을 통해 탕구트, 즉 서하(西夏)를 정복했다.




금나라와 호라즘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다



칭기즈칸이 48세가 된 1210년 금나라 사신이 몽골의 복종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땅에 침을 뱉고 금나라를 욕했다. 전쟁 선포였다. 1211년 쿠릴타이를 소집해 원정을 결정하고 진군을 개시한 칭기즈칸은 1215년 금나라 수도 중도(中都. 오늘날의 베이징)를 포위해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원정에서 몽골군의 병력은 기병 6만5천이었다. 지구력 강한 몽골 말과 보급부대를 두지 않는 간편함(육포와 마른 젖 덩어리를 휴대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부대 편재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어주었다. 여기에 포로들을 통해 익힌 공성전(攻城) 전술과 무기, 굳은 충성심과 규율, 적에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선전전, 적이 제대로 대응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기습하는 전술, 적의 영토 전역에 걸쳐 작전을 펼쳐 혼란을 일으키는 전술 등으로 몽골군은 위세를 떨쳤다.

 

칭기즈칸은 이제 넓어진 영역을 다스리며 교역과 상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한 호라즘과 교역 조건을 협상하고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호라즘의 지배자인 투르크 족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칭기즈칸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칭기즈칸은 많은 물자와 함께 상인들을 보냈다. 그러나 호라즘의 북서쪽 오트라트(카자흐스탄 남부)의 총독이 상인들을 죽이고 물자를 빼앗았다. 칭기즈칸은 사신을 보내 총독을 처벌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무함마드 2세는 오히려 사신들을 죽였다. 남은 것은 전쟁이었다. 1219년 원정을 떠난 칭기즈칸은 이듬해 봄 호라즘 영역에 도착하여 그 해가 끝나기 전에 호라즘의 주요 도시들을 속속 점령했다.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에 쫓기다가 카스피해의 작은 섬에서 죽었다.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웃딘이 인더스 강변에서 몽골군과 맞서기도 했지만 칭기즈칸에게 패했다.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휩쓴 칭기즈칸의 원정은 1222년 여름 오늘날의 파키스탄 중심부에서 멈추었다(1223년에는 제배와 수부타이가 이끈 별동군이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러시아 남부 지역과 이란 일부 지역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칭기즈칸은 인도 북부를 모두 점령하고 히말라야 남쪽을 돌아 중국 송나라 영토를 가로지를 생각을 했지만, 더위와 습기가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본거지로 돌아온 칭기즈칸은 이제 서하, 즉 탕구트 공격을 준비했다. 탕구트는 이미 항복했지만 호라즘 원정 때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탕구트 원정을 위해 고비 사막을 건너던 1226~27년 겨울 칭기즈칸은 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 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오자 칭기즈칸이 탄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칭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 수도를 포위하고 마지막 승리를 얼마 앞둔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중국 깐수성(甘肅省) 칭수이현(淸水縣) 시장(西江) 강변이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소.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하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소.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소.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소.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거요!”

 

나는 이 책을 읽고 칭기즈 칸에 대해서 더욱 더 자세하게 알아서 무척 기쁘다. 나중에도 한국사 책을 많이 읽어서 한국사 마스터가 되고 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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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5 - 고려시대 -상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5
이현세 만화, 김미영 지음, 한국역사연구회 감수 / 녹색지팡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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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이현세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5를 읽고 인재를 키우는 국자감을 알고 화려한 귀족의 삶을 보여 주는 유물들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인재를 키우는 국자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려는 일찍이 교육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능력 있는 인재들을 킹기 위해 수도이 개경에 국자감을 세웠습니다. 국자감은 오늘날의 국립대학 같은 곳입니다. 국자감에서는 나라의 통치 이념인 유교와 역사등을 가르쳤고, 유명한 유학자인 이색, 정몽주도 이곳에서 유학을 가르쳤습니다. 

아하!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국자감이 무엇인지는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쓰니까 국자감이 오늘날의 국리대학 같은 곳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정몽주가 유명한 유학자인것도 몰랐는데 알아서 기쁘다. 

국자감은 성균관 혹은 태학으로도 불리웠고, '성균관' 이라는 이름은 조선으로 계승되어 오늘날 성균관 대학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려의 국자감 건물은 현재 북한의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는 고려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럼 화려한 귀조의 삶을 보여 주는 유물인 청자 주전자와 청자 배개를 알아보겠습니다. 

청자주전자 : 동한 만기 성숙한 청자 제작에 성공한 월주요는 삼국(三國), 양진(兩晉), 남북조(南北朝), 수대(隋代)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면 기술 수준이 절정에 이르러 ′천봉취색(千峰翠色)′이라 불리게 된다. 이 주전자는 월요(越窯)에서 제작한 것으로, 나팔꽃 모양의 입 둘레에 가늘고 긴 목과 긴 입구 부분, 둥근 복부와 권족(圈足) 형태이다. 복부에는 참외 모양의 가로선이 압인되어 있다. 유색은 황갈색이며 바깥쪽 바닥에는 유약이 발라져 있지 않다. 

청자배개 :  현재 남아 있는 고려 청자상감 베개 가운데 가장 세련된 작품이다. 여섯 개의 판(板)을 붙여 만들었으며 사각의 베갯모에서 안으로 포물선처럼 선과 면이 휘어들어 베개의 기능과 시각적 효과를 함께 얻었다. 베갯모의 가장자리를 따라 연꽃잎 무늬띠를 역상감으로 돌렸으며 각 면의 바탕에는 당초무늬[唐草文]를 역상감 기법으로 장식했다. 위아래면 중앙에는 흑백상감으로 큰 동심원을 만들고 그 안에 구름과 학을 상감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인재를 키우는 국자감과 화려한 귀조의 삶을 보여주는 유물인 청자베개와 청자 주전자를 알아서 기쁘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국자감이 무엇인지도 알아서 한국사가 더욱 더 이해가 잘되는 것같고, 점점 한국사에 대해 알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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