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 애국선열들의 넋이 깃들어 있는 곳 신나는 교과서 체험학습 86
이기범 지음, 강은경 외 그림, 이이화 감수 / 스쿨김영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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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라는 책을 읽고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럼 지금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 1988년 2월 27일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부지 19만 8348㎡. 연건축면적 2만 6446㎡. 수감 가능인원 3,200명(1987년 경기 의왕시로 이전 당시). 1907년 시텐노가즈마[]의 설계로 착공, 다음 해 문을 연 후 80년 동안 약 35만 명을 수감,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하였다.

준공 당시는 감방 480평, 청사 80평의 규모였으나, 1916년 7, 8옥사 및 여사(), 1923년 13옥사와 사형장, 1925년에 중앙사 및 10, 11, 12 옥사, 1934년에 1~6옥사 및 부속 옥사를 증축하여 확장하였다. 청사는 전동()에 있던 흥사단 건물을 이축()한 것으로, 6·25전쟁 휴전 직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관사()로 사용하였다.

건축물은 군집형태로 묶여져 있고, 이 중 붉은 담벽·감시탑·출입문·구치감·감방(남사·여사·외국인사)·사형장·일반사무실(보안과·순화교육대)·교회당·공장·창고·취사당·식당·세면장(목욕탕 등)·운동장 등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함석이고, 주위 벽은 판자 위에 아연판을 두른 목조이며, 2층 옥사는 감시하기 좋게 T자형 부채꼴로 설계하고, 감방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되어 있으며, 복도 천장을 뚫어 철망 사이로 위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아하! 서대문형무소가 그냥 유관순누나가 갇쳐있었던 감옥이어서 그냥 이렇게 뜻깊게 알고있었는데, 서대문형무소가 다른 일도 있었구나! 

이 구치소의 뿌리는 구한말의 전옥서()로서, 1904년 경무청감옥서()로 바뀌고, 1908년 현저동에 경성감옥()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7월 7일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옥사를 이전한 이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세도가·군장성·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 이 밖에 살인·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간첩·잡범 등 다양한 범법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곳에는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윤봉길 의사가 복역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 있다.

1988년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렀는데, 1995년 '독립공원 사적지 성역화' 계획을 마련, 독립관 복원 공사에 착수한데 이어 구치소의 제9~13옥사·중앙사·나병사·지하옥사 등 8천여 평과 담장 일부·망루 2곳을 원형대로 되살려 1996년 유료공원화하기로 하였다.

나는 오늘 이 책을 읽고 서대문형무소가 그냥 유관순누나가 갇쳐있었던 감옥인 줄만 알았는데 오늘 이 책을 읽고 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서 기쁘다. 나중에도 많이 책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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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31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33편을 더 읽고 쓴다면 상금 받을 수도 있겠는걸~~
그보다 책을 읽고 많이 써 본다면 사고력이 쑥쑥 자라니까 더 이득이겠지만~
일거양득이니 모쪼록 훈~ 화이팅 ^^* 건투를 빈다.

유샘이~ ^^*
 
초한지 대 삼국지 5
조병만 지음 / 수필과비평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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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여. 저는 오늘 이 책을 읽고 유비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럼 지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비 : 자 현덕(). 묘호 소열제().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었다. 그러나 학문을 즐겨 하지 않고 호협()들과 교유했으며, 휘하에 관우()와 장비()를 두고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무리를 모아 토벌군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적으로 안희현위라는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지위는 오래동안 유지되지 못했고 적군에게 패해 달아났다가 그뒤 공손찬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원소()와의 대전에서 승리하여 공을 세웠다. 조조()와 서주목() 도겸()과의 대전에서 도겸을 도왔으므로, 도겸이 죽자 서주목이 되었다. 하지만 여포()의 공격으로 서주()를 빼앗기고 그와 대립하게 되며 조조의 도움으로 여포를 물리친다.

196년 원술()로부터 공격을 받자 조조의 구원으로 원술을 물리치고, 진동장군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그러나 조조 모살계획에 참가하였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하였다. 원소와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전쟁을 시작하자 원소와 동맹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게 되자 형주목() 유표()에게로 가서 객장()이되었다. 

 이 무렵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맞아들여 그의 계략으로 형주에서 기반을 구축하던 중, 조조 휘하의 하우돈과 우금이 유표를 공격해오자 이를 물리친다. 208년 유표가 죽고 그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는 대군을 거느리고 형주를 공격해왔다. 유비는 오나라 손권()과 동맹하여 적벽전투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확보하였다.

조조가 한중() 침입을 기도하자, 두려움을 느낀 익주목() 유장()의 요청에 따라 명장 관우를 형주에 잔류시키고, 제갈량, 장비, 조운 방통 등과 함께 익주()로 갔다. 하지만 군수물자를 내어주지 않고 배신한 유장을 항복시키고 촉()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유비의 백말을 바꿔탄 방통이 낙봉파에서 적의 화살을 맞고 유비 대신 사망하였다. 219년 형주 땅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나, 명장 관우가 패사하고 형주는 손권에게 넘어갔다. 


유비는 한중을 공격하여 한중왕이 되었으며, 220년 조비()가 한나라 헌제의 양위()를 받아 위()의 황제가 되자, 221년 그도 제위에 올라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한(:)이라 하였다. 다음해 장비가 그의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되어 그의 목을 가지고 오나라로 달아나자 유비는 형주의 탈환과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 손권을 공격하였다. 이릉()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백제성()에서 후사를 제갈량에게 위탁하고 223년 4월 6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소열황제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8월에 혜릉으로 이장하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유비에 대해서 알아서 기쁘다. 역시 유비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유비처럼 대단해져서 내 이름을 세상 널리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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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대 삼국지 4
조병만 지음 / 수필과비평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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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초한지 대 삼국지4라는 책을 읽고 관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우 : 자()는 운장()이며, 원래의 자()는 장생()이다. 시호()는 장목후()이며,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공()이라고도 불렸다. 죽은 뒤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성제군()’이나 ‘관제성군()’이라고도 불린다. 간단히 ‘관제군()’, ‘관제()’라고도 한다. 현재의 산시성[西] 윈청시[]인 하동군() 해현()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塩) 해지()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에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도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폭리를 취하는 염상(塩)을 죽이고 유주()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성과 이름도 바꾸어 관우()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관우는 후한말()의 동란기에 탁현(, 소재)에서 유비()를 만나,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소설에서 창작된 내용으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조조에게 잡혀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귀순을 종용 받았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의 대적() 원소()의 부하 안량()을 베어 조조에 보답한 다음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이때 조조의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하였으나 조조는 그들을 만류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208년 적벽전()에서 수군()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유비가 익주(: )를 공략할 때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 수비를 위해 머물렀는데, 익주에서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고전하는 유비를 구원하러 제갈량이 출병하자 관우 혼자 형주를 방비하게 되었다. 당시 형주는 촉나라의 동쪽을 지키는 관문이었고 관우의 무력과 위풍()은 조조와 손권()도 두려워하던 것이였다. 그는 왼쪽 팔에 화살을 맞아 독이 퍼져가자 명의 화타(佗)에게 절개 수술을 받았는데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태연하게 수술을 받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조조와 손권의 협격()을 받아 패배하였다. 관우는 상용()에 주둔하고 있는 맹달()과 유봉()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고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 이후로 관제묘()를 세워 그를 무신() 또는 재신()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불교에서도 그를 호법신()의 하나로 받아들여 ‘가람보살()’로 숭배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관우가 장비랑 나는 같은 생각을 했었다. 장비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장비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관우도 3명중1명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도 장비, 관우, 유비의 끈임없는 노력을 본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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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과 정동 : 살아 있는 근현대 역사의 현장 신나는 교과서 체험학습 85
이종호 지음, 이유나.이종호 그림, 이이화 감수 / 스쿨김영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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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덕수궁과 정동이라는 책을 읽고 광해군은 왜 다른 왕들처럼 종이나 조를 붙이지 않은 까닭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럼 지금 알아보겠습니다. 

반정이란 정치를 잘못하고 있는 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워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일으킨 사건을 말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반정이 두번 일어났는데, 중종과 인조가 이런 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지요. 원래 '조'또는'종'이 붙는 왕의 묘호는 왕이 죽은 뒤에 붙이는 것이에요. 나라를 세웠거나 큰 업적이 있는 왕에게는 '조'를, 앞선 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덕으로서 나라를 다스린 왕에게는 '종'을 붙였지요. 

그런데 연산군과 광해군은 죽기 전에 이미 폐위되었으니 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이 왕으로 인정할 리가 없었어요. 그래서 세자 때 불리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지요. 연산군과 광해군 때의 역사도 실록으로 기록하지 않고 격을 낮추어 <<연산군 일기>>와 <<광해군 일기>>로 각각 전해 오고 있어요. 

무덤도 왕의 무덤은 '능'이라 불리지만 연산군고 광해군의 무던은 군의격식에 따라 그냥 '광해군묘', '연산군묘'라고 불려요. 그뿐만 아니라 왕이 묻혀 있다고 보기에는 무덤의 규모도 작고 초라하답니다. 

<<광해군 일기>>나 <<계축 일기>>의 기록을 통해 광해군 때의 일들을 알수 있어요. 이 책들은 모두 그 당시 광해군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일부러 좋지 않게 쓴 부분도 있을 것으로 여겨져요. 그래서 요즘에는 광해군을 다시 평가하려는 시도들도 있답니다. 

아하! 연산군과 광해군이 능도 아니고 왜 묘라하면 둘다 죽기 전에 이미 폐위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중종이 누구인지 알아봐야겠다. 

중종 : 자는 낙천(), 휘() 역(懌)이다. 성종의 2남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 비는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제1계비()는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 제2계비는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이다. 

524년 권신() 김안로()의 파직, 1525년 유세창()의 모역사건, 1527년 작서()의 변에 따른 경빈() 박씨의 폐위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1531년 김안로의 재등장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는데,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한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등장하여 1537년(중종 32) 김안로를 숙청하였으나, 이번에는 윤원형 일당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한편,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조하고, 지방의 사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외사관()을 임명하였으며, 1540년(중종 35) 역대 실록()을 인쇄하여 이를 사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중종의 치세에서 처음에는 어진 정치를 펴는 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 이후 간신()들이 판을 치는 통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여 볼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능은 경기 고양()으로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에 이장하였다. 능호는 정릉()이며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광해군과 연산군이 죽기 전에 이미 폐위되어서 그렇게 된 것을 알아서 기쁘다. 모르고 있었다가 알면 역시 기분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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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조선 시대를 담은 타임캡슐 신나는 교과서 체험학습 10
신병주 지음, 김영수.김순남 그림 / 스쿨김영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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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조선왕조실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 1973년 12월 31일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필사본 일부 포함)으로 2,077책이다.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이 처음 편찬되고, 25대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에 완성되었다. 《실록》의 편찬은 대개 전왕이 죽은 후 다음 왕의 즉위 초기에 이루어지는데,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또는 ·일기청)에서 담당하였다.

실록청의 총재관()은 재상이 맡았으며, 대제학 등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 도청() 및 각방 당상()으로 임명되었다. 시정기()와 사관()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 각사 등록(), 《승정원일기()》가 실록편찬의 기본자료였고, 문집·일기·야사류 등도 이용되었으며, 후기에는 《비변사등록()》과 《일성록》도 사용되었다.

실록편찬 과정은 초초()·중초()·정초()의 3단계로 나누어졌다. 초초는 각방의 당상과 낭청()이 자료를 분류하고 중요자료를 뽑아 작성한 초안이다. 중초는 도청에서 그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고, 정초는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중초를 교열하고 최종적으로 수정·첨삭을 하여 완성한 것이다.

정초본을 인쇄하여 사고()에 봉안하고 편찬에 이용된 시정기·사초 및 초·중·정초는 모두 세초(:없애는 것)하였는데, 이는 앞으로 필화를 막자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실록청의 기사관이 편찬 작업 중 알게 된 사실을 누설하여 처벌받은 일도 있었고,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명기하도록 하여 문제가 되었던 적도 있었으나, 대체로 편찬과정의 공정성과 익명성은 보장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사고에 수장시킨 《실록》은 충해와 습기에 의한 오손을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포쇄(曬  )하도록 하였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형지안()을 작성하였다. 실록은 선왕 및 신하들의 행적과 정책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제례나 사신 접대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 전례()를 참고하기 위해 사관이 내용 일부를 확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누구의 열람도 허용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 등 4곳에 사고()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으며, 1603년(선조 36)에서 1606년까지 전주 사고본 실록을 근거로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을 다시 4부씩 인쇄하였다.

춘추관·묘향산·태백산·오대산·강화도 마리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춘추관실록은 이괄()의 난(1624)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마리산 사고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의 피해를 입어 현종 때 보수하여 1678년(숙종 4)에 가까운 정족산() 사고로 옮겨졌으며,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에 전라도 적상산() 사고로 옮겨졌다.

이후 각 사고의 모든 《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이장하였고, 적상산 사고본은 장서각으로 옮겼다.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6년 초에 도쿄대학 도서관 귀중서고에 소장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환수 노력을 기울여 2006년 7월 도쿄대학으로부터 47책을 반환 받았다.

장서각 소장의 적상산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 888책 한장본()으로 30절()을 영인()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중심의 서술방식과 명분론적 시각, 당론()에 의한 곡필()의 문제 등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조선왕조실록을 알고 있었지만 더 자세히 알아서 기쁘다. 그리고 이해가 잘되서 거의 외어질것 같다.임시저장하면서 했슴니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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