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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대 삼국지 4
조병만 지음 / 수필과비평사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이 초한지 대 삼국지4라는 책을 읽고 관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관우 : 자(字)는 운장(雲長)이며, 원래의 자(字)는 장생(長生)이다. 시호(諡號)는 장목후(壯穆侯)이며, 수염이 아름다워 미염공(美髯公)이라고도 불렸다. 죽은 뒤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성제군(關聖帝君)’이나 ‘관제성군(關帝聖君)’이라고도 불린다. 간단히 ‘관제군(關帝君)’, ‘관제(關帝)’라고도 한다.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인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출신으로, 이곳은 중국 최대의 염호(塩湖) 해지(解池)가 있어,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한(漢)에서는 소금이 국가 전매품이어서 밀매가 성행했는데, 관우도 소금 밀매에 관여하다가 폭리를 취하는 염상(塩商)을 죽이고 유주(幽州)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성과 이름도 바꾸어 관우(關羽)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따르면 관우는 후한말(後漢末)의 동란기에 탁현(褶縣, 河北省 소재)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장비(張飛)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평생 그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소설에서 창작된 내용으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200년 유비가 조조(曹操)에게 패하였을 때, 관우는 조조에게 잡혀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귀순을 종용 받았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의 대적(大敵) 원소(袁紹)의 부하 안량(顔良)을 베어 조조에 보답한 다음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이때 조조의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하였으나 조조는 그들을 만류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208년 적벽전(赤壁戰)에서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유비가 익주(益州: 四川省)를 공략할 때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荊州:湖北省) 수비를 위해 머물렀는데, 익주에서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고전하는 유비를 구원하러 제갈량이 출병하자 관우 혼자 형주를 방비하게 되었다. 당시 형주는 촉나라의 동쪽을 지키는 관문이었고 관우의 무력과 위풍(威風)은 조조와 손권(孫權)도 두려워하던 것이였다. 그는 왼쪽 팔에 화살을 맞아 독이 퍼져가자 명의 화타(華佗)에게 절개 수술을 받았는데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태연하게 수술을 받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조조와 손권의 협격(挾擊)을 받아 패배하였다. 관우는 상용(上庸)에 주둔하고 있는 맹달(孟達)과 유봉(劉封)에게 원군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고 마침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관우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송(宋) 이후로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그를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모시는 등 중국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불교에서도 그를 호법신(護法神)의 하나로 받아들여 ‘가람보살(伽藍菩薩)’로 숭배하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관우가 장비랑 나는 같은 생각을 했었다. 장비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장비가 누구인지도 몰랐는데 관우도 3명중1명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도 장비, 관우, 유비의 끈임없는 노력을 본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