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
찰스 P. 킨들버거 지음, 주경철 옮김 / 까치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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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킨들버거는 대공황 연구에 탁월함을 보인 미국의 경제학자였다. 그는 젊은 대학생 시절에 '대공황'을 실제상황으로 체험했다. 한국의 김광수 경제연구소 김광수 소장이, 일본에서 공부할때 거품경제의 형성과 붕괴과정 전부를 체험했듯 킨들버거는 대공황의 한복판을 학부생으로 보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군의 독일 군수공업 폭격 목표 선정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는 군대의 폭격목표 선정을 위해서 독일의 산업을 연구할 기회가 있었고 전후에는 잠시나마 독일의 경제재건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처음으로 독일 경제사를 연구한것은 1971년 겨울에 킬의 세계경제연구소에서 몇 달을 보낼 때였다(241쪽, 3-5줄)"

 

아마도  이런 체험이 그의 대공황 연구를 매우 풍성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경제정책 관련하여, '정치'와 '전쟁'과 '외교'가 교차하는 삼각지점의 한가운데서, 일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투자된 미국기업의 공장을 폭격대상에서 제외하는 이런 일을 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경제가 어떻게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 생생하게 체험적으로 알게 된 데다가, 마샬플랜의 초기에 관여했으니 그의 '경제사' 서술이 정말 풍성해 질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미 연준과 재무부에서 일했으니 그는 미국에서도 재무 계통의 엘리뜨 중의 엘리뜨였던 것이다. 정말 정치와 경제 양쪽으로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책의 곳곳에 잘 묻어나고 있다. 위의 인용은 그런 사례중의 핵심일 것이다.

 

대공황을 학부생으로 보내고 제2차 세계대전을 경제학자로서 전쟁의 현장 가까운곳에서 보낸 그가, 대공황을 중심으로 한 경제사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킨들버거의 '인식과 관심'을 잘 보여주며 그만큼 시사적인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 특히 독일의 경제적 도약과 관련하여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준다.

 

뽈 망뚜의 '산업혁명사'는 프랑스의 경제사학자 눈에 비친 '산업화'의 현장으로서 영국의 18기 전부와 19세기 전반부까지의 산업에 대하여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사람의 저작은 사실상 '사회사'와 '경제사'를 산업의 변혁과정과 더불어 일구어낸 선구적 업적처럼 보인다. 킨들버거는, 이렇듯 약 100여년간을 추적한 폴 망뚜의 '시야'를 더 넓혀서 400여년으로 확장한 다음, 세계 곳곳의 경제 강대국을 돌면서 묘사한다. 그는 2003년에 세상을 떠났기에, 아마도 중국이 빠졌다. 그의 제자가 후속편을 저작한다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인도와 브라질 등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망뚜의 산업혁명사와 다른 점은, '사회사'적 관점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킨들버거 책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의 경험 때문에, 경제사 서술이 단순히 '경제'와 '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폴 망뚜와 달리 킨들버거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 전파론적 관점을, 스스로는 의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그런 것을 읽는다. 공인된 학설로서,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벨기에, 프랑스를 거쳐서 독일로 전파되었다는 이런 '경로'에 대한 일부 설명을 하는 가운데 함의된 것이다. 

 

"다른 방면에서도 변동이 있었다. 베를린, 브레슬라우, 본에 새로운 대학이 설립되었고 기존의 대학들은 더 커졌다. 김나지움이 개혁되었고, 할레와 괴팅엔 같은 기존 대학들은 신학과 철학 같은 분과에서 수학과 과학으로 중심이 옮겨 갔으며, 연구 조사를 강조하는 빌헬름 폰 훔볼트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247쪽 16-20줄)"

 

사실 그 다음 줄에 핵심적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데, 오늘날 영국이 장하준의 '조언'을 받아 들였는지 하여튼 '해보겠다'고 다시 브라운 수상으로 하여금 나서게 한다는 내용에 해당된다. '산업진흥정책'이라는 것 말이다.

 

"그와 동시에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산업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산업진흥"이 시작되었다. 페터 보이트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리에주의 고커릴 공장에 숙사를 할당 받았을때 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1816년에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재정부 산하 통상산업국장이 되었고 해외, 특히 영국 여행에 대한 보조금 지급, 공업연구소에서의 청년 훈련, 기술자 재정 지원, 사업 발족, 외국 기계류 수집과 모방 그리고 그 원본을 기업가에게 제공하는 일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산업육성 계획을 시작했다."

 

영국은 어느 시점부터, '산업정책'이 없었다는 의미가 함의된다. 브라운 수상은 영국의 교육재정을 지디피 10%로 올린다고 했다. 사실 산업정책의 일부로서, 대학교육의 확장과 진흥 그리고 과학이나 수학과 같은 '자연과학' 혹은 '이과' 계통 학문의 신설과 확대 등은 필수적 과정이었다. 이런 일을 오늘날 '중국'과 '인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칭찬하는 19단의 나라 인도는, 19단을 외우는 실력 덕분에, 실리콘 밸리를 자기 나라로 이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인도는 명백히 실리콘 밸리를 받아 들여서 아이씨티 산업의 새로운 메카처럼 떠오르고 있다. 물론 중국의 경우는, 현재 최고 정치 지도부 전부가, 3세대로 교체되어 있는데, 주석부터 '공과대학'을 나온 사람이다. 중국적 '학벌'이 '공산당 엘리뜨'와 융합되어 문제가 없다 할 수는 없지만, 중국 지도부는 등소평에 의해 목적의식적으로 기술관료출신들로 교체된 것이다. 참고로 박근혜는 한국의 아마도 '최초'인, 전자공학과에서 공부한 '이과' 출신이다. 공부도 아주 잘했다고 하는데 매우 특이한 학과선택이었다. 아마도 부친이 공과대학 육성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옆으로 새는 일이겠지만 이런 일을 바로 박정희 정부에서 다 해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보편교육'의 확장을 이룩한 나라가 한국일 것이다. 역사적 사례를 연구하면 할 수록, '한 시기'에는 그 시기의 어떤 '최초' 원형이 생성되고 그것이 '확장되는' 이런 일이 반복됨을 알 수 있는데, '산업혁명'과 대규모 제철소나 요즘식으로 '중공업'의 탄생은 영국에서 이루어졌지만, 19세기 말쯤 되면, 영국은 독일과 미국에 명백히 밀리게 된다. '기술 부족증' 같은 것도 있는데 그 '배경'중 하나가, 대학의 확장에서 뒤쳐졌다는 점이었다. 대학교육의 확장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건립한 '에꼴 폴리테크닉'인데 이후 이것을 재빨리 독일에서 모방했다. 그리고 독일은 프랑스식으로 공병장교 양성을 주요 목적으로 주로 수학과 토목기술 그리고 열역학 같은 것을 가르쳤던 프랑스의 에꼴 폴리테크닉을 더 확장했다. 찰스 킨들버거의 '박식'이 빛을 발휘하는 부분은, 위에 인용한 '산업정책'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데서 나타난다.

 

"케쿨레와 리비히가 케이뤼삭과 베르톨레 밑에서 화학 연구를 하기 위해서 1830년대에 프랑스를 방문한 것에 대해서, 나는 앞에서 프랑스의 은행기법에 독일 은행가들이 관심을 두었던 사실과 아울러 언급한 바 있다(248쪽, 16줄-19줄)"

 

케쿨레는 벤젠고리 구조를 발견한 사람으로 아주 흔하게, 하나의 문제에 집중하면 꿈에서도 영감이 떠올라 해결할 수 있다는 '창의성'의 모범적 사례로 인용되는 사람이지만, 경제사가의 펜에서 이름이 나오기에는 매우 어려운 사람이다. 벤젠고리를 밝힌 것이 어떻게 '산업'에 연결되는가에 대하여는 별도의 책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독일이 나폴레옹 전쟁의 '종료' 직후부터, 하여튼 프랑스에서 선진적인인 것은 다 배우려고 했다는 사실이어다. 특히 '화학'은 당대 프랑스가 세계의 최첨단에 있었다. 라부아지에와 그의 후학이었던 베르톨레 그리고 게이뤼삭이 당대의 세계적 화학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을 지나 '말'에 이르게 되면 '화학'의 중심지가 독일로 넘어오게 된다. 이는 화학공업의 세계적 중심이 독일(그리고 미국)으로 옮기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사실 게이뤼삭이나 베르톨레는 중학교 교과서에 인용되는 사람으로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것처럼 보인다. 허나 경제사가의 펜 끝에서 이름이 나온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역사적 '배경'에 많은 것을 남겼음을 짐작하게 한다. 연구되지 않는 측면 아닐까 한다.

 

사실 킨들버거는 그 풍부한 정보력 덕분으로, 독일에서 어떻게 '산업혁명'이 전파되었는가 단서를 찾아냈다. 1850년대 영국은 1700년대 중반에 도로건설 붐과 더불어 후반과 1800년대 초반 운하건설 붐속에 있었듯, 철도건설 붐에 있었다. 영국의 1850년 철도건설은 이후 '세계 산업화'의 역사에 원형과도 같은 사건이었지만 어디에도 이와 관련된 서술을 찾기는 어려운 듯 하다. 실상, 1851년의 영국 박람회가 세계 최초 '산업혁명'의 성과물 전시장처럼 되면서, 증기동력에 기초한 장미빛 미래를 열어 나간 '효시'이자 영국의 번영 정점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지만 이때에도 영국 철도는 엄청난 건설의 '붐'속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시점에 프랑스와 독일도 철도 건설 '붐'속으로 진입하게 되며 특히, 1862년에서 1866년까지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은 철도를 단순히 산업이나 투자목적에서 나아가, 국가 '기간시설'이면서 중요한 군사 전략적 시설로 보는 관점을 정립시켰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 철도가 '민간'에 맡겨져 엄청난 과잉투자와 거품형성과 중복투자 등의 문제를 낳았고 이후 거품붕괴의 한 원인이 되지만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간단한데, 국가에서 철도망 건설을 관장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되어 킨들버거가 찾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다. 앞에서 인용한 통상산업국장 보이트의 '이 시기' 역사적 공헌에 대한 설명이다.

 

"보이트가 사업발족을 도와 준 주도적인 독일 산업가 중에는 영국인 기계공의 아들로서 벨기에에서 일하던 코커릴 형제, 증기기관과 기계류를 제작하던 F,J 에겔스, 증기기관 제작에서 기관차 제작으로 전업한 아우구스트 보르지히가 있었다. 1841년에는 독일에서 20대의 기관차가 운행 중이었는데,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그 해에 보르지히는 자신의 첫 제품을 생산했다. 아헨, 스토르카데, 막데부르크에도 독일 제조업자들이 있었다. 1854년에는 외국 기관차 수입이 전혀 없었는데, 이 해에 보르지히는 독일에서 판매된 69개 중 67대를 생산했으며, 추가로 폴란드에 6대 덴마크에 4대를 수출했다. 이야말로 수출로까지 발전한 효율적 수입대체의 고전적 모범이었다(248쪽, 5줄-17줄)"

 

이 묘사만으로도 후발주자 독일의 추격이 어떤 양상이었는지 선명하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안심할만한' 상태로 있었는데 소규모의 '공국'들로 잘게 쪼개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대규모의 철도망 건설과 같은 거대 자본의 투하와 요컨데, '자본주의' 탄생을 향한 여정은 시작하기 매우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이른 바 '독일유형'의 산업화가 역사에 자리매김하게 된다. '공국'의 조건을 극복하는 방법은, '경계'를 지워나가는 것이었는데 가장 좋은 것이 관세동맹이었던 셈이다. 독일은 작은 '공국'의 경계를 넘을때마다 관세를 매길 정도로 경제성장의 악조건만 많은 정치적 조건에 처해 있었다. 이런 것을 넘어서는 과정이 킨들버거에 의하면, 3가지에 의해 촉진된 것이다. 산업정책과 관세동맹 그리고 '철도체계'의 성립이었다.

 

1848년 2월 혁명의 실패로 독일에서는 대규모 이주의 물결이 형성되었다. 미국으로 이런 저런 이유때문에 대량 이주가 1850년대 초반 이루어지게 되었다. 으뜸가는 것은 정치적 자유주의가 패퇴한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독일의 장래에 대한 비관이 남부지역의 수공업자들 중심으로 확산된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물결은 곧 잦아들게 되며 독일은 1860년을 넘어서면서 번영을 향해 나가게 된다. 이 시점은,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도 마찬가지로 산업화를 추진한 시기이기도 했으니 역사란 정말 대단한 데쟈뷰로 구성된다 할 수 있다. 이 두 나라의 산업화 추진 결실이 1870년의 '보불전쟁'으로 중간 결산을 하게 되는데, 이는 비스마르크의 의도에 속해 있었다. 프랑스와 한판 전쟁을 해서 나폴레옹 전쟁 시점의 구원을 씻으면서 '오래 묵은' 독일의 과제인 '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대독일 주의 오스트리아와 일전을 겨루어 승리를 거둔후, 다음 차례는 프랑스였던 것이다. 여기서 패전했다면 오늘날 '독일'은 아마도 없을지 모른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했고 다음 차례는 글자 그대로 후발주자에서 '선두'로 부상이라는 과정이었다. 패배한 프랑스도 제3공화국 시절은 굉장히 좋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루어진 사회개혁의 핵심으로, 보편적 초등교육의 실시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영국은 이미 뒤쳐지는 '조짐'이 여러곳에서 드러났는데 당대 대학개혁은 독일이 가장 앞서 있었던 것이다.

 

킨들버거는 다른 얘기도 들려 주는데 이것은 '후발국'의 추격이라는 것이 단순히, 앞선 나라의 문물을 모방적으로 수용하는 것만으로 전혀 미흡함을 보여준다. '창조적 진화'라는 것이 핵심이다. 프랑스의 은행제도를 수용하고, 영국의 철도를 소화시키며, 독자적 산업정책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사실 영국 못지 않게 독일도 발로 채일 정도로 석탄이 풍부했고 철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미흡했다는 것이, 19세기 후반부 독일의 화학과 전기공업 그리고 내연기관의 비약을 가능하게 했던 '공과대학'이었던 것이다. 영국은 이미 독일에 뒤쳐졌고 미국이 독일과 비슷하게 자연과학과 공학계통의 대학을 신설하고 확장하는 과정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킨들버거의 예리한 시야에 들어온 것이 다음과 같다.

 

"영국의 소규모 독립기업들과 대조적으로 주도적인 독일 기업들은 규모가 크고 카르텔이나 수직적 통합으로 조직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엘바움과 라조니크가 영국의 기업계에서는 결여되어 있는 요소로 꼽은 것이다(257,10-13줄)"

 

당대 영국 기업은 매우 소규모였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초기 세계최초의 영국 철강기업을 건립한 윌킨슨의 제철소는 9천명 정도를 거느린 세계최초의 대기업이었는데 19세기 말엽에 이르면 이것을 훨씬 능가하는 규모의 기업들이 독일과 미국에서 탄생하고 있다. 이것이 인류사의 비극일지 희극일지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녹색사상가 중에는 '기업의 탄생'이 인류의 비극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기에 그러하다. 사람들을 잘게 파편화시켜 부분 노동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야 말로 '생산력'의 원천이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문제는 그렇게 풍성한 생산력을 올려도, 풍부한 여가를 갖는것이 가능하지 않은 체제에 있는 것인데, 오로지 모든 것을 '이기적'인 이윤동기에 활짝 열어 놓을 경우에 그러하다.

 

사실 여기까지 글을 쓰면서 내내 가진 나의 연구문제는, 과연 산업 선진국의 지위가 유지 가능한가였다. 지구 규모로 산업을 확장해서 보면 명백히 보이는 것이 있다. 가령 남아메리카의 페루나 칠레는 원광석 생산지로 되어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이다. 한국은 중공업과 자동차, 전자공업까지 모든 제조업분야를 망라한 지구의 공업지역이 되어 있다. 동남아시아는 원광석 몇종류와 식량을 생산하는 지역이며 중동은 석유를 생산해서 지구 규모로 공급하는 지역 아닌가 한다. 그래서 내내 내 머리속을 떠나가지 않는 않는 문제는, 지구 규모의 공동 번영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 한가지와 더불어, 킨들버거가 예시한 가령, '선도' 경제 강대국이었던 나라들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의 문제이다.

 

특히 나의 관심은 가까운 시대의 잠시 제국이었던 스페인과 네덜란드이다. 스페인은 최근 신산업의 육성과 더불어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관심 영역이다. 스페인은, 지난 주택가격 폭등이 국면에서 아주 극심한 사례를 겪는 나라로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그 만큼 주택거품 붕괴도 심각하게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뉴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과거'의 제국이었던 스페인은,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18세기 말엽에 영국의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시점, 연 189일의 휴일을 즐기는 투우와 휴양과 오락의 나라처럼 묘사되었다. '이 후'는 영국 및 미국과의 200년 간격을 두고 이어진 전쟁에서의 패배를 필두로 제국의 지위에서 완전히 내려온 것은 물론 열강의 대열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현재 지디피 규모는 세계 7-8위 수준으로 한국보다 더 많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가이며 이는 네덜란드도 마찬가지다. 한국보다 좁은 면적의 국토에 살고 과거 '상업의 시대'에 엄청난 번영을 누리며 세계최초의 메트로 폴리스 암스테르담이 생성된 나라인데 지금 결코 못살지 않는다. 높은 소득을 올린다. 킨들버거에 따른다면 이런 나라의 번영은 이미 지나갔고 쇠퇴해왔는데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가?

 

사실 벨기에야말로 킨들버거의 이 경제사연구에 중요한 전달벨트처럼 여겨진다. 영국은 '저지대 국가'를 자신들 국방의 중핵지역으로 늘 여겨왔다. 대륙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라서 국가안보의 직결 지역이었던 것이다. 네덜란드가 특히 그러했다. 사실 네덜란드의 독립유지가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독일과 영국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물론 프랑스까지 생각하면 더 그렇다.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은 언제나 '전쟁터'가 되곤 했다. 한반도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전쟁터가 된 것 하고 매우 유사했다. 이런 이유로 네덜란드는 섬나라 영국이 대륙의 침공을 받는 경우 사활적 전략지역이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는 거의 '작은 영국'처럼 취급되었다. 한때는 영국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네덜란드의 생존은 영국의 국토안전을 위한 '중립지대'로 존재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되었다. 1830년에 이루어진 벨기에의 독립은 아마도 영국의 영향력이 지나치다 싶어 빚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네덜란드의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새로운 독립국을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만들어 놓는다. 그러면 이제 영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세 강대국의 국경에 완충지대가 생기는 셈이다. 사실 벨기에 남부는 프랑스어를 쓰기에 프랑스나 다름 없지만 그러하다. 인도와 독일 사이에 네팔과 부탄 등이 '완충지대'로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벨기에 지역은 석탄과 철강이 풍부하여 좁은 국토임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야금술이 발달해 왔다고 한다. 그래서 킨들버거의 서술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영국인 증기기관 기술자가 벨기에로 들어왔다가 독일의 통상산업정책에 이해 독일로 진입하여, 독자적 기관차 제작 공장의 설립과 생산을 통해 수입대체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국식의 '자유방임적 사상'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했는데, 가령 제임스 와트가 프랑스에 최초로 설치한 증기기관은 '설계도'와 부품만 넘겨 주고 설치는 프랑스인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설계도면'을 넘겨준다는 것은 곧바로 '모방생산'이 허용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와트는 동업자 볼튼의 정치적 위력에 힘입어 그의 특허를 '독점적 권리'로 지켜낼 수 있었지만 말이다.

 

킨들버거의 이 책은 정말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 오늘날 산업정책이 어떠해야 하는지 많은 시사를 담고 있다. 나의 관심사는 '이 후'의 문제이다. 오늘의 영국은 생명과학과 일부 항공공학 등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의 제조업은 유럽대륙이나 미국으로 이전했다. 중국도 그 중 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다시 '산업정책'을 갖춘다고 한다.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새로운 '산업의 진흥'이 이제 석탄에 이어서 석유도 다 퍼내서 '고갈'된 나라 영국에서 가능할 것인가? 이것은 정말 중요한 연구과제인데 오늘날 스페인이 '어떻게 사는가'만큼이나 관심가는 주제이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국의 일처럼 코앞에 바싹 다가선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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