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
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김현구 옮김 / 현실문화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벨라미 포스터. 그의 짧은 책이 나를 깨우쳤다. 바로, '엄청나게 요란스러운' 문제제기와 엄청나게 미흡하고 콩알만한 '실천'제안이 환경담론 또는 환경교육이라서 그러하다. 벨라미 포스터에게 환경담론은 일종의 요란떨기에 불과하다. 물론 환경교육도 그렇다.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환경담론'의 맹점이 환경교육에도 고스란히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경제적 쟁점을 회피하는 '교양주의'와 환경담론 - 사회과학적 사유로부터의 탈출 

그 '맹점'중의 하나는 '쟁점'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이다. '쟁점'을 다루는 것은 교육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관점 말이다. 이는 교육을 일종의 '교양' 증진으로 여긴다. 아주 틀리지 않지만 문제는 이들이 '점잖음'과 '교양주의'에 빠져서 쟁점을 '회피'하는 경향이 중증이라는데 있다. 이홍우나 조동일의 교육론이나 학문론이 그런 것 같다. 이들에게 물론 앵글로 색슨의 경향을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전자는 '불교'에 후자는 '유교'에 뿌리를 내린 것 처럼 보인다. 전자는 불교에 근거를 내리고 있어서 과도한 교양주의는 벗어난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깨달음'이나 '세상을 보는 눈'처럼 사실상 '학문'적으로 통용되기 어려운 주장에 머무른다. 그냥 수행불교로 '이전'하여 그런 주장을 하면 아주 알아듣기 쉬워진다. 그런 것도 아니고, 객관적 지식을 배우는 '목적'이 '깨달음' 또는 '세상을 깊게 보는 안목열기' 이런 것이라서 불교를 빙자한 '본질주의'라는 인상을 피하기 어렵다. 여기서 나오는 주장은 '고유의 가치'론이라는 것이다. 사실 '내재적 가치'이런 이야기는 생태주의나 낭만주의에서 흔하게 했던 담론이기도 하다. 

벨라미 포스터가 뛰어나다는 점은 이런 '담론'을 아주 쉽게 당대의 사회경제적 조건들과 결합하여 설명한다는데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영국 산업화'의 절정에서 이미 '지속가능발전'에 와 닿는 '조화로운 발전'의 개념을 제창했듯이, 현대의 환경론과 생태주의 담론은 사실 '이미' 인간의 역사속에 내재되었던 담론이라는 것이다. 이는 '총 균 쇠'의 제레드 다이아몬드에 의한 문명사적 역사에서 잘 나타난다. '인구압력 가설'은 사실 맬더스에 대한 '논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특정 환경조건과 여기 근거한 생산양식이란 특정의 사회적 관계와 법적 제도적 문화적 '상부구조'에 의해 짜여지며 단순히 '절대적 사람의 개체수'로 과잉 과소를 판단할 수 없음을 다이아몬드가 말한다. 이미 10세기 이전 바이킹의 '이주'가 인구압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요컨대 적절한 산업과 사회관계 법제도 상부구조를 '구성'하지 못했기에 아주 간단히, 외연확장이란 방향으로 가버린 것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환경론적 '순진함'과 더불어 '역사'에 대한 해석의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요컨대 '지속가능발전'이라는 것도 별반 새로울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무슨 이야긴가. 정화함대를 해체하고 바다건너 외연적 확장을 중단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이야기다. 다른 측면에서 석탄산업화를 이룩했다고 하더라도 궂이 영국인들처럼 전함을 건조해서 '이주'할 필요가 있었겠는가의 이야기다. 외연적 확장이란 사실 '인구압'보다는 특정 사회에서의 '사회적 경제적' 갈등을 '해소'하는 아주 손쉬우면서도 '모순'을 외부로 전가해버리는 방책이다. 이는 인간의 역사 곳곳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가령 바이킹의 사례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고찰이 있다. 아이슬란드가 지속가능한 산업을 발전시키게 된 까닭은 이제 더 이상의 '외연적 확장'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인종이나 민족 또는 국가에 의한 '외부적 강제'가 이들을 주저 앉히고 '지속가능성'을 확립하도록 했다면 틀린 것인가? 이 지점에서 환경문제 해결의 선행문제가 바로 '사회적 관계'와 '경제적 빈부'의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좀 더 깊이 있게 고찰해 본다면 이러하다. 리스트의 보호무역론을 일종의 '외연적 확장'이 억제되는 경제의 성장 방책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독일이 빌헬름 시절에 비스마르크에 의해 세계최초 사회복지제도가 도입되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더 그렇다. 당시 세계최초의 화석연료 산업화를 이룩한 '영국'은 아주 손쉬운 '외연적 확장'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사회 내부적 갈등을 외부화시키는 방식으로 '식민지 개척'은 최적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국가의 산업화는 억제하였다. 첫번째 화석연료 산업국가로서 영국에 의한 다른 국가의 '산업화' 억제력이 작용하는 상황에서 리스트의 보호무역론과 국민경제론은 일종의 '내재적 발전 전략' 비슷한 것이었다. 이 모델을 일본이 따라했고 미국도 그 범주에 있었다. 이 경로를 따라서 한국까지도 산업화를 이룩했다. 자유무역론과 비교우위론은 일종의 산업화 억지에 대한 학문적 합리화에 불과했다. 물론 생태적 관점에서 달리 들여다볼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리스트의 국민경제론과 보호무역론은 영국의 '억제'를 딛고 독일이 일어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불충분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비약적 산업화가 가능했던 것은 영토내에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와 철광석과 같은 자원이 풍부했다는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독일 사람들의 근면 성실함과 프로이센적 '병영'조직력까지 가세했다. 리스트의 국민경제론과 보호무역론은 당대에 이미 '자유무역론'의 함의를 꿰뚫고 나간 셈이다. 이 끝자락에 장하준이 있다. 사실 '정유공장'이 한국에 있고 말레이지아에서 보크사이트가 생산되기에 '보크사이트'를 팔고 석유를 '사가면' 된다는 이런 식의 '비교우위론'을 따르다가는 말레이지아 같은 나라의 산업이 발전할 길이 전혀 없다. 영국적 자유무역론에 의하면 말레이지아는 영영 정유공장을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볼때 우리나라가 정유공장이나 제철소를 보유하게 된 것은 거의 '기적적'인 일이거나 지정학적 유리함 때문이라고 해석 가능하다. 이탈리아의 마테이가 '독자적' 정유와 제철업을 일으켜 2차세계대전 이후 빠르게 이탈리아 경제를 부흥시켰지만 결국 의문사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박정희를 아무리 '독재자'라고 욕한다 해도 그가 있어서 정유공장이나 제철소 건립한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그런 이유로 '살해'된 것이라 한다면 과도한 해석일까.

환경담론에 절실한 사회과학적 사유, 사회과학에 절실한 환경담론적 사유  

벨라미 포스터의 논의는 매우 의미있다. 환경교육이 얼마나 '목사님 설교'처럼 들리는지 잘 일깨운다. 환경문제는 사실 그리스 로마시절부터 있었다. '과잉인구'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인구압력 가설'을 이야기하나 자연사적 경험주의에 빠져 있기에 '사회관계'의 문제는 빼먹는 경향이 있다. 맑스의 후계자들은 사회관계에 과도히 집착하여 '자연사'적 관점 또는 환경결정론적 한계에 대한 사유를 빼먹는 경향이 있다. 맑스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후학들 문제이기도 하다. 너무도 쉽게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이런 과도한 단순함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벨라미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는 많은 가르침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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