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석기용 옮김 / 이마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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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무엇을 해 왔고 할 수 있는가? 아마 '하지 말아야' 했을 일들이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무엇이건 다 할 수 있다.

종으로서 인간은 지구에서 크게 성공했다. 허나 어떤 개체도 '유한'하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까? 인간은 개체로서 무한 생존하려는 욕망이 있는 것 만큼 '류' 또는 '종'으로서 무한 번식하려는 '경향'이 내재해 있는 것 같다.

이런 인간에게 과학기술은 그냥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이른 바 아카데믹 내적 과학사에서는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난 과학사를 추구한다.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에 배어 있는 '피'의 기록 때문일 것이다.

프로젝트로서 과학기술의 출발점 - 포르투갈 엔리케 왕자의 해양 개척 프로젝트

과학이 스스로를 아무리 '고상'하게 치장하고 싶어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과학자라 불리우는 일군의 사람들이 하는 덧칠에 불과할 뿐이다. 요컨대 과학 또는 기술도 인간활동의 영역에 속한다. 문명사의 여명기에서부터 그러했다.

가령 중국의 역사에 나오는 '우왕'이 왕이 된 까닭은 '치수'를 잘해서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여럿 출현한다. 그중에 가령 온갖 식물과 열매 씨앗등을 '맛'보고 그 용도를 분류한 사람들도 출현한다. 이 사람들이 과학기술자의 원형에 해당된다. 서양 과학사에도 광물질까지도 무엇이건 맛보는 것으로 평생 '약제'를 연구했던 과학자가 나오는데 그런 왕성한 탐구심 덕분에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20세기의 과학자인 마리퀼도 자신의 발명이며 발견이었던 라듐의 방사능에서 얻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아이러니 참 많다. 

단지 그런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스의 '별보고' 걷다가 거름덩이에 빠진 이런 유형의 과학자도 있다. 내적 과학사는 가급적 '거름덩이'에 빠진 이런 과학을 언급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제국주의 탄생이 과학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밝히고 있어서다.

출발부터 과학기술은 '프로젝트'였다. 놀라운 일이다. 1400년대 중후반이면 뉴튼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점이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고전 그리스 로마 문헌이 재발견되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 로마의 과학은 유럽이 중세의 어두운 하늘 아래서 쟁투를 벌이던 시점에서 이슬람세계에서 잘 보존되고 발전되었다. 이런 이슬람 과학이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던 시점이 르네상스였던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 '출발'은 엔리케 왕자의 프로젝트였다. 그는 무어인에게서 빼앗은 재산을 투입하여 유럽 각지의 과학기술자를 모아 새로운 '배' 건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구시대의 갤리선을 50톤급의 '대양 항해용' 배를 건조하여 혁신하고자 했다. 

에스빠냐에서 프랑스 그리고 마침내 영국으로 옮겨간 제국주의

대략 1420년에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5세기 후반의 역사를 잔혹사로 믈들여갔다. 포르투갈인들의 '프로제트' 자체를 나무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배를 타고 도달한 아프리카 해안에서 '흑인'을 강제로 납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유는 물론 '부불노동'을 위해서다. 결국 식민지 개척과 플랜테이션 농업이 이렇게 강제 납치한 흑인 노예노동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굉장히 수지맞는 장사였다. 흑인을 끌어와서 '판매'할 수 있었고 이들을 부불노동에 투입하여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어서이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그리고 '시장'의 추악한 결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모든일들이 '프로젝트'로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포르투갈 다음 차례는 이웃의 스페인이었다. 더 크고 재정이 풍부했던 스페인은 결국 컬럼버스의 북미대륙 항해와 바스코 다가마의 인도항로 개척 나아가 마젤란의 세계일주까지 이룩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들에 의해 흑인 노예무역은 더 확장되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가담하면서 점점더 강화되어 갔다. 이것이 '제국주의' 경쟁의 출발점이었다.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과학혁명이 진행되었다. 고전 그리스 사상중에서 '어떤 것'들이 취사선택되어 되살아 났다. 새로운 세계관과 우주관이 형성됬다. 지구는 둥글고 유한한 표면으로 되어 있음이 확인된 반면 우주는 무한하게 확장되었다. 그 결과는 '신'의 자리를 인간의 '이성'이 대체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 - 석탄과 증기의 시대 그리고 자본주의 만개와 제국주의

그리하여 최종주자는 영국의 몫이었다. 일찌기 해군을 강화한 것도 있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면서 이제 최종 승자로서 영국이 등장할 차례였다. 여기 산업혁명까지 거들었다. 그리하여 역사는 이제, '흑인'의 '부불노동'이 영국과 유럽 산업혁명 및 잉여의 축적에 의한 자본주의 탄생의 '밑거름'이었음을 보여준다.

강철구 역사학자는 '대서양 무역'이 자본주의 탄생의 잉여축적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계기였음을 밝혔다. 인류사의 비극이다. 흑인들이 노예노동을 했고 그것을 누군가 공짜로 전취했다. 인도인은 거의 200여년간 그러했고 중국인은 100여년간 일부 지역에서 그랬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거의 500여년간을 그랬으니.

이런 모든 것의 배경에는 점점 발전해가는 과학기술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갈릴레이 전기작가들은 그가 '탄도학'에서 운동학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언급하기 꺼려한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언급하는 '무기' 연구로 떼돈을 벌었다는 사실 같은 것은 전기에 올리지 않는다.

이런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엔리케의 프로젝트가 그후 오랫동안 여러 나라에서 확대, 반복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그 절정은 제1차 세계대전시의 영국과 제 2차 세계대전시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반대편의 독일도 그 못지 않았다.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전기와 화학에서 크게 영미를 앞서고 있었다. 가령 농업생산력을 100배 향상시킨 위대한 발명 공중질소를 고정법은 독일인 과학자 하아버가 발명했다. 문제는 이렇게 인류를 살린 바로 그 사람이 인류를 죽이는 독가스를 개발한 과학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화학에서 디졌지만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레이다나 암호해독기를 독일보다 빠르게 개발하여 전쟁에서 이겼다. 사실 그렇게 말하기는 매우 쉽다. 이런 것을 '전략적 선택'으로 할 줄 알았던 정치 지도자를 상찬하기도 쉬운일이다. 하지만 과학기술에 그런 '경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사실이 드러나기를 특히나 꺼려하는 것 같다. 하아버 같은 사람의 있는 그대로 모습이 드러나길 꺼려하는 것이다. 

 

프로젝트로서 과학기술 - 불균형 양날의 칼

역사는 과학기술이 불균형 양날의 칼 임을 보여준다. 특히 그것이 시장원리, 자본주의와 결합하였을때의 문제를 남김없이 드러낸다.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바로 지금' 그렇다. 가장 최근의 '과학기술'은 아마 유전자 지도와 응용으로서 유전자 조작일 것이다. 거의 무한한 생산이 가능할 것 같은 환상이 심어진다.

허나 하아버가 질소 비료를 발명했던 시점에도 그러했다. 인간은 언제나 '비약적' 생산력의 증대를 이룩했다. 허나 그 '잉여'를 가지고 같은 종간에 '절멸' 전쟁을 또 반복하여 벌렸다. 인간의 역사는 어찌보면 '절멸 전쟁'으로 점점 확대되어 가는 역사처럼 여겨질 정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행스럽게 국가간의 대규모 전쟁이 없는 60여년을 보냈다. 허나 가령 우리 한국인에게는 국토 전체가 황폐화되는 '아마겟돈' 전쟁이었던 6.25사변이 있었다. 사실 대량살상의 전쟁은 한국전쟁에 이어서 베트남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그래서 현대 과학기술에 의한 대량살상의 전쟁이 벌어진 곳은 바로 베트남에서 였고 이곳에서 저질러진 인류사의 죄악은 아무리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과학기술은 '양날의 칼'이지만 불균형이다. 생산하고 번영하는 것보다 더 낭비하고 파괴하며 죽이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1945년 일본에 투하된 두 발의 원자폭탄은 어떤 이유를 들이 밀건 '불균형 양날의 칼'이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 입증한 경우이다. 그냥 동경만 앞바다에 떨어 뜨려 위협하는 것으로 긑냈으면 안되었을까? 궂이 도시의 한복판에 떨어뜨릴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실험' 치고는 너무 극단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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