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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싼 할머니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46
이옥수 지음, 김병호 그림 / 시공주니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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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아이들은 "똥"이라고 말만 해도 까르르 웃습니다. 똥이라는 말을 할 때의 조그맣고 동그란 입 모양이 말의 느낌과 섞여 웃음을 폭발시킵니다. 다른 이름도 마찬가지이지만, 똥이라는 말은 더욱 빠르고 강렬하게 똥의 실제 모습과 냄새를 끌어당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똥 이야기를 하면 단박에 얼굴 표정이 바뀝니다. 주름이 생길 정도로 찌푸리면서 눈에 띄게 싫어합니다. 재빨리 구역질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이가 어릴수록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른들 가운데에는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는 분이 있지요. 어린이에게 있어서의 똥과 어른들 세계의 똥은 뭔가 다른가 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린이와 어른만이 똥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똥에 대한 생각은 크게 달라서 구분이 되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회사에서 컴퓨터를 다루거나 벼농사를 짓거나, 사람들이 누는 똥은 그다지 다를 게 없을 텐데 왜 그럴까요?
  <똥벼락>(사계절)은 우리 옛날 이야기인데 아주 재미있고도 교훈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사계절)의 두더지는 제 머리에 떨어진 똥이 누구 것인지 알아내려고 동물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물어봤지요. 더러운 똥을 자기 머리에 누었으니 화가 단단히 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똥벼락>에서는 희한하게 똥을 욕심내는 사람이 나옵니다.
  돌쇠 아버지가 김 부자 밑에서 30년 간 일했지만 받은 것은 풀 한 포기 안 나는 돌밭이었습니다. 밭에 뿌릴 거름이 없어 걱정이던 돌쇠네는 죽기살기로 똥을 모았지요. 식구들은 먼 데서 놀다가도 집으로 달려와 볼일을 보고,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도 주워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급하게 볼일을 보던 돌쇠 아버지의 오줌 세례를 그만 산도깨비가 받게 되었습니다. 산도깨비는 돌쇠 아버지를 딱하게 여겨 김 부자네 똥을 돌쇠네로 날라다 주었습니다. 산도깨비가 보내 준 똥거름 덕분에 돌쇠네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돌쇠 아버지가 고구마 밭에서 누런 금가락지를 발견하고는 김 부자네 똥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고 반지를 돌려주러 갔지요. 김 부자는 냉큼 돌쇠 아버지를 똥 도둑으로 몰고 추수한 곡식마저 빼앗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알게 된 산도깨비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주문을 외워 온 세상의 똥을 김 부자 머리 위로 쏟아지게 만든 것이지요. 똥벼락에는 '물찌똥, 된똥, 진똥, 선똥, 피똥, 알똥, 배내똥, 개똥, 소똥, 닭똥, 말똥, 돼지똥, 토끼똥, 염소똥까지' 없는 똥이 없었습니다. 김 부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상상으로도 충분하지요? 그리고 똥이 산을 이루어 마을 사람들 모두 그 해 농사를 풍년으로 지었습니다. 산도깨비의 주문은 마음씨 고약한 사람은 벌주고, 열심히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상을 주는 두 가지 임무를 다 했던 것이군요.
  이 책이 말도 안 된다고 또 지저분하다고 생각한다면 <똥 : 차마 입에 담기 힘든 그것에 대한 숨김없는 이야기>(비룡소)를 읽어보는 게 어떨까요? 더럽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똥이야말로, 우리 몸의 쓰레기를 몸 밖으로 내보내 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토끼가 부족한 영양분을 채우려고 자기 똥을 먹는 것처럼, 많은 동물들이 똥을 재활용한답니다. 그리고 동물의 똥은 길이나 영역을 표시하는 데에도 톡톡한 역할을 하지요. 똥이 식물에 훌륭한 거름이 된다는 것은 <똥벼락>에서 이미 확인했는데, 더 나아가 식물의 씨앗을 널리 퍼뜨려 주기도 한다는군요. 학자들은 어떤가요? 동물들의 똥을 거둬 와서 중요한 자연 현상들을 연구합니다.
  동물들은 먹었기 때문에 똥을 내보냅니다. 똥이 몸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똥이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것임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똥이 하는 말을 들어 보자구요. <똥 싼 할머니>(시공주니어)는 원래 치매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치매 노인과 가족이 갈등에 빠지고 그 갈등을 풀어가면서 피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되었지요. 할머니의 이상한 말과 행동, 그리고 할머니가 갓난아기처럼 아무렇게나 아무 때나 누고 마는 똥이 가족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백과사전이나 인터넷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똥의 목소리가 드디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똥에게 말을 시키네요. 아프다고,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그런데 가족들이나 주위 사람들은 할머니의 똥을 그저 똥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내보내서는 안 되는 것으로요.
  내가 소중하다면 내 몸 속을 지나간 똥도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냄새 고약하고 예쁘지 않다고 여기겠지만, 그 똥도 처음엔 향기롭고 먹음직스러웠던 음식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말,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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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산의 마녀 초등 저학년을 위한 책동무 3
글로리아 세실리아 디아즈 지음, 에밀리오 우르베루아가 그림, 남진희 옮김 / 우리교육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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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뿔 달린 도깨비가 있다면, 유럽에는 매부리코에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마녀가 있었습니다. 마녀들은 성의 첨탑처럼 뾰족한 모자를 쓰고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다녔습니다. 또 혼자 외롭게 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고약한 심술을 부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법을 걸어 사람들을 깊은 잠에 빠뜨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거나 못마땅한 누군가를 짐승이나 괴물로 만들기도 했답니다. 그렇다면 마녀는 뭔가 엉뚱하기도 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것 같지 않나요?
  마녀는 어린이들이 글자를 익히자마자 처음 만나는 동화의 단골 손님이기도 합니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이 삼총사 동화부터 시작해서 유럽에서 전해지는 동화들에는 마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심지어 바다의 마녀가 등장하는 <인어공주>도 있습니다. 유럽의 옛날 이야기는 마녀가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마녀가 도와줘서 해결하는 식의 이야기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과연 마녀는 사람일까요, 괴물일까요? 분명 겉모습은 사람인데 도저히 사람이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다니니, 친해지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몇 백 년 전 유럽에서는 혼자 사는 여자들, 똑똑한 여자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시킨 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마녀가 세상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 가지 동화 속에서 마녀가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마녀가 사람인지 아닌지 따져보아야겠군요.
  <라푼첼>의 마녀는 딸을 남한테 빼앗기기 싫어하는 부모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웃이 자신의 상추(라푼첼)를 허락도 없이 먹고 딸을 낳자, 그 여자아이(라푼첼)를 데려다가 높은 탑에 가두어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했지요. 마녀는 매일같이 라푼첼을 만나러 탑에 갔습니다. 탑에는 문도 계단도 없어서 라푼첼이 내려 주는 황금색 긴 머리카락을 타고서야 탑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지요. 그러나 아무리 완벽하게 가둬 놓아도 라푼첼의 사랑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답니다. 라푼첼이 도망갈까 봐 탑 꼭대기에 가두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만났던 마녀가 왠지 측은하지 않나요? 라푼첼이 왕자에게 마음이 빼앗겨서 자기에게 거짓말 한 것을 알고 분노에 떨었던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마녀의 지나친 자식 사랑이 느껴집니다.
  <헨젤과 그레텔>을 볼까요? 여기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활한 마녀가 나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부모가 산 속에 버린 헨젤과 그레텔. 그 당시엔 이렇게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들을 손쉽게 잡아들이기 위해 마녀는 과자로 만든 집을 지어 놓고 기다렸지요. 마치 덫을 놓고 짐승이 걸려들기를 바라는 사냥꾼처럼요. 그런데 이 마녀가 아이들을 유괴해 놓고 살을 찌워 잡아먹는 잔인한 사냥꾼이었던 것입니다. 오누이가 슬기롭고 침착하게 해결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만약 실패했을 경우에는 헨젤과 그레텔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에 버려진 모든 굶주린 아이들에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동화에서는 마녀가 그렇게 어둡고 포악하게 그려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마법사로서의 엉뚱함과 괴상한 취미는 여전하지만. <깜찍이와 복잡마녀>(문학과지성사)에서 복잡마녀는 홀로 집에 남게 된 깜찍이를 잡아먹으려고 갖은 작전을 다 펼쳤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상상을 뛰어넘는 기발함으로 깜찍이가 복잡마녀를 잡았지요. 깜찍이를 이기려고 열심히 아이디어를 짜내는 복잡마녀가 오싹하기는커녕 은근히 귀엽기만 합니다.
  그리고 마녀는 이제 완벽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꼬마 산의 마녀>(우리교육)에서 꼬마 산에 사는 마녀 알리나는 빗자루 비행이 너무 서툴러 산의 나무와 새들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산에 사는 생물들이 슬픔에 빠지자 이를 보다 못한 다른 마녀들이 나서서 알리나에게 빗자루 비행을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손끝에서 호박이 마차로 바뀌고 누더기가 공주 드레스로 바뀌는 마법은 마녀가 태어나자마자 갖게 되는 능력이 아니란 말인가요? 마녀도 노력하지 않으면 마법을 쓸 수가 없다는 말일까요?
  마녀는 사람일까요? 괴물일까요? 처음에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태권도나 합기도를 하듯 오랫동안 혼자서 몰래 연습을 했기 때문에 마법을 사용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누군가의 미움을 받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혼자 고생하고 그러다가 마법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이쯤 되면 마녀가 사람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마녀의 판단과 행동이 중요하지요. 동화에 나타나는 것처럼 마녀는 이제 깊고 깊은 산중에 숨어 살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웃에 마녀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히거나 마음이 약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만약에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면 그 틈을 파고들 것입니다.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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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렁덩덩 새선비 네버랜드 우리 옛이야기 20
이상권 그림, 엄혜숙 글 / 시공주니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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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제해야 할 시간에 밖에 나가서 놀았다고 혼을 내는 어머니를 보며 엉뚱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분명 나를 낳은 어머니가 아니다, 나를 괴롭히러 온 구렁이 늑대 호랑이 뭐 이런 짐승일 거다, 밤만 되면 원래대로 돌아가 옆집 개를 잡아먹을 거다……. 워낙 공상에 빠져 살았던 시절이었지만, 밤에 둔갑하기는커녕 나를 꼭 안아 주고 뽀뽀해 주던 어머니를 둔갑한 짐승으로 여겼다니, 너무하지요?
  조금 비겁하기는 하지만 옛이야기와 그 책임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렁이 각시>와 <미녀와 야수> 같은 이야기책을 보면 앞을 다투듯 변신한 주인공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사람들은 이전 세상에서는 동물이었다가 어찌어찌하여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또 어찌어찌하면 죽어서 동물이든 식물이든 별이든 바람이든 다시 태어나는 것이고, 또 그러다가 계속해서 무엇으로든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상상의 날개를 펼쳤었지요. 그렇게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은, '착하게 잘 살자!'였습니다. 그러니 또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책상머리에 앉았겠지요?
  <구렁덩덩 새 선비>(시공주니어)의 주인공은 구렁이입니다. 구렁이는 우리 옛이야기 속의 단골 손님이지요. 자식이 없어 외로워하던 할머니가 난데없이 아기를 낳았는데 사람이 아니라 구렁이였던 것이지요. 할머니는 망측스러워서 구렁이를 뒤꼍에 두고 삿갓으로 덮어 놓았습니다. 모두가 징그럽다고 침을 뱉었을 때 이웃집 셋째 딸만이 '구렁덩덩 새 선비'라고 하며 삿갓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구렁이는 셋째 딸에게 장가를 가겠다고 떼를 썼고, 마음씨 고운 셋째 딸은 구렁이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혼례를 올리던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구렁이가 허물을 벗고 멋진 사람으로 변신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언니들이 질투에 눈이 어두워, 구렁덩덩 새 선비가 셋째 딸에게 맡긴 허물을 태워 버리는 바람에, 구렁덩덩 새 선비는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셋째 딸은 온갖 고생 끝에 구렁덩덩 새 선비를 만나 그 동안의 오해를 풀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옛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 가운데 단연 으뜸은 여우입니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미녀로 둔갑한 꼬리 아홉 달린 여우나 백 년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해치며 TV 드라마를 휩쓸고 다녔습니다.
  <여우누이>(사계절)도 비슷한 분위기입니다. 아들 셋을 둔 부자가 딸을 갖고 싶어 비는 모습을 늙은 여우가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부자가 딸을 얻게 되자 괴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밤마다 소나 말이 한 마리씩 죽었던 것입니다. 부자는 세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라고 명령했습니다.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잠을 자느라 지켜보지 못했지만, 셋째 아들은 가축들을 잡아먹는 게 누구인지 목격했습니다. 바로 누이동생이었습니다.(출판사에 따라 첫째·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의 입장이 바뀌어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딸을 싸고돌던 부자가 셋째 아들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셋째 아들은 착한 마음 덕분에 신통한 색시와 혼인했고, 병 세 개를 받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우누이가 그 사이에 식구들을 다 잡아먹었고 셋째 아들마저 잡아먹으려 달려들었습니다. 결국 병 세 개의 힘으로 셋째 아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늙은 여우가 둔갑한 누이동생 때문에 가족들을 잃었지요.
  그렇다면 이런 변신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만 있을까요? 물론 다른 나라에도 아주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옛날이야기에서만 즐겨 나오는 게 아닙니다. 네덜란드의 <개구리 선생님의 비밀>(푸른나무)은 학교를 무대로 선생님들의 변신 이야기를 펼칩니다. 프란스 선생님은 조상으로부터 개구리가 되었다가 사람으로 되돌아오는 유전을 물려받았습니다. 개구리 생각만 하면 갑자기 개구리로 변하고, 파리를 잡아먹으면 사람으로 돌아왔던 것이지요. 마침 그 학교에는 프란스 선생님과 아이들을 몹시 싫어하고 못살게 구는 교장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교장선생님은 개구리를 잡아먹어야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황새였지요. 그렇다면 프란스 선생님이? 그렇지요. 교장선생님과 프란스 선생님은 원수였습니다. 아이들은 개구리로 변한 프란스 선생님이 황새로 변한 교장선생님에게 잡아먹힐까 봐 파리를 잡고 동물협회에 황새를 보내버리는 등,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동화를 읽으면 벌레를 함부로 잡고 말 못하는 짐승을 괴롭히던 일이 양심을 콕콕 찌르게 됩니다.
  사람으로 또는 다른 동물로 변신하는 것은 앙심을 품어서이기도 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기도 하는 등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 읽고 나면 뭔가 끊임없이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변신 이야기가 주변의 사물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부추기는 것이지요. 꿈속에서처럼 하늘을 날고, 물 속을 헤엄치며, 으르렁거리기도 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꾸로 새들이나 물고기나 호랑이도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다른 생명을 존중해 주는 것이 변신 이야기의 마무리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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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학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 - 2단계 문지아이들 8
수지 모건스턴 지음, 김예령 옮김, 미레유 달랑세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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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꽃들의 잔치가 잠잠해지면서 그늘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때가 왔습니다. 어른들도 나들이에 설레고 즐거운데 어린이들은 오죽할까요? 땀이 쏟아지든 옷이 더럽혀지든 콩콩 뛰어다닐 수만 있다면 신나게 용수철처럼 튀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요? 날마다 숙제는 그칠 줄을 모르지요, 학교에서 선생님 눈치 보랴 집에서는 부모님 눈치 보랴. 놀아도 노는 게 아닙니다. 요즘 어린이들, 특히 도시의 어린이들이 불안감 없이 완전히 자유롭게 놀 수 있을까요? 
  <잔소리 해방의 날>(온누리)의 푸쉘은 어느 날 부모님의 잔소리에 불만을 쏟아 놓으며 하루 동안만 자신의 일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한 마디로 '잔소리 해방의 날'을 지정한 것이지요. 푸쉘의 부모님은 놀랍게도 선선히 허락할 뿐만 아니라 푸쉘이 무엇을 하든지 진짜로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루 동안의 자유가 주어지자 푸쉘은 그동안 귀찮아했던 일들에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이를 닦지 않고 딸기잼을 실컷 먹는 등 작은 일은 물론이고요. 학교를 조퇴하기도 하고 처음 보는 노숙자를 집에 데리고 와서 파티를 했습니다. 더구나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위험천만한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나고 즐거워야 할 야영은 뜻밖에도 싱겁게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의 보호 없이 어두움과 낯선 동물과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깨달았던 것이지요.
  <조커, 학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 >(문학과지성사)에서는 아이들이 보다 영리한 방법으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새로 온 위베르 노엘 선생님 덕분이었지요. 위베르 노엘 선생님이 선물이라며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한 묶음씩의 조커 카드였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지각하고 싶을 때 쓰는 조커, 숙제한 것을 잃어버릴 때 쓰는 조커, 떠들고 싶을 때 쓰는 조커, 벌을 받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등 위기가 올 때마다 내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는 조커들이었지요.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요? 조커 카드 때문에 오히려 즐거움을 찾은 아이들이 학교 가는 것을 너무나 행복하게 여기게 될 줄이야…….
  그러나 아이들과 노엘 선생님의 이런 행복한 수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앵카르나시옹 교장 선생님이었지요. 노엘 선생님이 조커를 통해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아이들이 조커를 가지고 더욱 자유와 여유를 느끼게 될수록 교장 선생님의 노여움은 커졌습니다. 결국 노엘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이 때 아이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노엘 선생님에게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을 때 쓰는 카드'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삐딱하게 굴거나 떼를 쓰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커를 만들어 줄만큼 마음의 여유를 얻은 것입니다.
  두 작품에는 공통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먼저 자유롭고 싶어하는 아이들이지요. 온 세상 아이들은 이 점에서 모두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뿐만이 아니지요.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는 어른들이 나옵니다. 푸쉘의 부모님과 노엘 선생님입니다. 이 분들은 주인공이나 다름없습니다. 스스로 결정하거나 행동하기에 어리고 불안한 아이들이었지만, 이 분들이 믿고 자유를 주었으니까요. 솔직히 푸쉘의 부모님은 아이들에게서 상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위험한 일을 거리낌없이 하는 푸쉘을 그냥 지켜봐 주었던 분들이니까요. (물론 공원에서 야영을 한다니까 걱정이 돼서 몰래 따라가기는 했습니다.) 노엘 선생님은 어떻고요? 교장 선생님의 어떤 눈총에도 꿋꿋하게 아이들의 조커를 받아 준 분입니다.
  노엘 선생님의 말이 옳습니다. 아이들에게 준 자유는 어디까지나 선물이지요.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자유는 365일 항상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유라는 말도 사라지게 될 겁니다. 자유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 하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일들을 비로소 할 수 있게 풀어 주는 열쇠인데, 만약 늘 자유롭다면 그것 또한 재미없는 규칙이 아닐까요? 늘 자유롭다는 것은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1년 내내 똑같은 자유라면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런 자유는 모든 것을 아이들이 책임져야 하는 무서운 규칙을 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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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아이들 사계절 아동문고 52
노경실 지음, 김호민 그림 / 사계절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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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사촌'이란 말을 아시나요?
  지금처럼 고층 아파트가 동네마다 들어서기 전에는,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경비원 아저씨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까지 가는 세상이지만, 그 전에는 집을 나오면 길, 길을 따라 총총 걸어가면 ○○네 집, 또 걸어가면 □□네 집 이랬지요. '∼아파트 몇 동 몇 호'가 아니라 '쌀집 골목에서 세 번째 빨간 대문 집'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이웃사촌은 멀리 떨어져 사는 친척들보다도 가깝게 지내는 이웃을 말합니다. 이웃끼리 얼마나 의좋게 살았으면 이런 말이 생겼을까요? 장독대에 널어놓은 빨래나 담을 타고 들려 오는 두런두런 말소리만으로도 그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훤히 꿰뚫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웃 간에 사이 좋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웃사촌이란 말은 뭐니뭐니해도 집집마다 지붕이 있고 조각 땅에서 어깨동무하듯 나란히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지내던 시절에 잘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사람들 마음이 집의 모양을 닮는가 봅니다.
  <상계동 아이들>(사계절)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판자촌이었던 상계동 풍경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부자도 없고 문제 없는 집도 없습니다. 병든 기옥이 엄마, 말썽만 피우는 광철이, 어릴 적부터 글도 익히지 못한 채 중학교에 다니는 형일이, 엄마 아빠 언니까지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은주네, 무당을 하면서 걸핏하면 매를 휘두르는 깐돌이 엄마 등등. 모두가 주인공이면서 단 한 사람도 걱정거리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계동 아이들>을 읽고 가슴이 따뜻해지기는 해도 화가 나거나 답답해지지 않는 것은, 이 책이 이웃사촌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깐돌이는 아이들이 형일이를 놀리면 나서서 맞섭니다. 동네에서 이기적이며 잔인하다고 소문 난 종칠이 할머니는 종칠이 때문에 다친 형일이에게 병원비를 대 주지요.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깐돌이 엄마는 종칠이 할머니와 싸우고 나서 깐돌이에게 잘해 주게 됩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평소에 시큰둥했던 사람들까지 한 마디씩 거들며 도움의 손길을 보냅니다. 그 도움이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거나 듣기 좋은 말로 다가가지는 않습니다. 작고 소박하며 투박하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때깔 좋은 말이나 물건보다 훨씬 더 서로에게 힘이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상계동 아이들>처럼 다 같이 가난했던 날의 한 동네 이야기는 아니지만, 집 주인과 우정이나 사랑을 나누게 된 이야기도 있습니다. <벌렁코 하영이>(사계절)의 초등학교 1학년 하영이는 아빠 병원비 때문에 이사간 집 주인이 애들을 싫어하는 할머니라서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2층에 살고 있는 집 주인 할머니가 잃어버렸던 딸을 그리워하며 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동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할머니가 고양이를 잡아먹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낸다고 했지요. 고양이처럼 아웅다웅하던 집 주인 할머니는 하영이와 정이 들어서 친할머니처럼 잘해 줍니다. 예전에는 이처럼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 집 주인과 한집에서 살며 다투기도 하고 억울한 일도 당하고 또는 한가족처럼 지내기도 했답니다.
  얼마 전 어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소음 때문에 주민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각 가정의 자녀들이 실내에서 뛰어 놀지 못하도록 주의해 주십시오.'라는 글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아파트나 이런 글이 한 번도 붙지 않은 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뛰어 놀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아이들은 뛰어 놀아야 건강하게 클 수 있으니까요. 눈치 보느라고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야 하고, 집안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다녀야 한다니 아파트는 아이들에게 영 재미없는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왕 소음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당탕탕, 할머니 귀가 커졌어요>(비룡소)를 빼 놓을 수가 없군요. 위층에 아이들이 새로 이사오자 아래층 할머니는 툭하면 시끄럽다고 올라옵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은 살금살금 기어다니고 말할 때에도 귓속말로 작게 속삭입니다. 그러자 아래층 할머니는 웬일인지 귀를 쫑긋 세우고 위층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다가 '못 들어서 생기는 병'에 걸려 귀가 커지게 됩니다. 결국 의사의 처방대로 위층 가족들은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즐겁게 웃을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아래층 할머니 귀도 예전처럼 되돌아오지요.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위층 아이들과 아래층 할머니를 통해 이웃 간에 가져야 할 예의와 배려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웃사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아파트, 컴퓨터, 의심 같은 것들이 더욱 부채질하고 있지요. 그러나 모두가 나와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웃사촌은 금세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아직 이웃은 여전히 많고도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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