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꿍 놀이를 통해 물체에 대한 대상 영속성을 기른다."


둘째 아이의 가정 통신문 속 어린이집 까꿍 놀이의 목표로,

관찰되지 않아도(감각의 수단을 통하지 않아도) 특정 대상은 지속하여 존재한다는 것, 즉 대상 영속성(Object permanence)을 인지시키도록하자는 유아 대상 학습의 저 고고한 목표가 마치 나를 위한 것인 듯,

 

경험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저 날카로운 세계, 어둠에 숨은 술래 그리고 이따금씩 출몰하는 유령들

수없이 분절된 '나'들과 그리고 저 '세계'를 잇는 수없이 자극적인 까꿍 놀이들,


맑스가 까꿍, 베버가 까꿍, 루소가 까꿍, 장자가 까꿍,

러셀이 까꿍, 베유도 까꿍, 고진도 지젝도 저마다 까꿍까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신선하다. 책을 대하는 나의 혹은 우리의 뿌리깊은 관념이나 관습에 대한 금기를 넘어서게 하고 읽지 않은(읽었지만 망각한 것까지 포함하여) 혹은 읽은 책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현재 나의 좌표를 인지함과 동시에 미래에 저 높은 세계(책)의 고도에서 자신있게 비행할 자신감과 자유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읽지 않고도 말할 수 혹은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방법을 비평적 방법으로 보여 주는데, 이 내용을 내가 읽었기에 느낄 수 있었던 감정과 사고의 획기적 트임의 경험이었기에 슬몃 이러한 저자의 주장이 모순처럼 보일 정도다.(분명 내가 읽었기에 가능한 도약이다.)


독자는 내면의 책(내면 도서관)에 입각하여 화면의 책(집단 도서관)과 접점을 찾고 스스로의 생각과 의견을 상상력과 관계 맺는 방법으로 피력하고 또한 그러한 의견을 타자와 상호 교환을 통해 유령의 책(잠재적 도서관)을 만든다. 그 책들의 텍스트는 유동적인 것이기에 우리 기억의 파편과 환상 안에서 끊임없이 그 가치와 유용함을 변형시키며 또한 재탄생하게 한다.

비독서 혹은 탈독서라는 독서 일련의 총체성에 입각하여 독자는 아예 읽지 않은 것, 대충 훝어본 것, 귀동냥한 것, 읽었지만 아예 망각한 것 등 그 경계의 가장자리 혹은 그 틈 사이를 유영하며 책이라는 대상(목적)이 아닌 매개물(수단)을 통해 자기라는 정체성을 찾고 자기 표현을 열어갈 수 있다.


세상의 책은 거의 무한대이며 또한 내가 읽고 싶은 리스트도 무한대로 늘어가고 있으며 내 보관 장서의 수도 전보다 훨씬 늘어가지만 내가 읽어내고 소화하는 혹은 기억하는 수는 극히 일부다. 심지어 리뷰를 남기는 고통의 억압 기제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여 아웃풋보다는 인풋이 늘어나는 때로는 비생산적인 순환의 고리가 연결된다. 그것이 나는 언제나 불만스러우며 부담이 되거나 혹은 욕망의 과잉으로 여러 책을 뒤적거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은 우선 그러한 금기,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죄악시하거나 부끄럽게 만드는 기작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한 오히려 비독서의 형태가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여러 권의 애정 어린 책들을 희생하게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을 막게 하고 책들간의 전체적인 관계, 상황 그리고 그 위치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되려 진실 혹은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임을 역설한다.


거두절미하고 이 책의 핵심은 끝부분(대처요령)에 집약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인 '자기 얘기를 할 것'에 그 정수가 응축되어 있다. 한 권의 책에 심하게 빠지면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잃게 하고 또한 저자의 생각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 얘기를 하게 되고 동시에 내가 가진 독창적인 생각까지 앗아가게 하는 역효과를 경험하게 될 때가 많다. 이는 비판적 사고 혹은 사유의 힘과 방향을 잃게 하고 책의 세계에 몰입했다 나오면 그대로 현실을 살아내는 독서하고도 변하지 않은 자신을 묵도하게 되는, 마치 영화관에서 스펙터클한 헐리우드 영화를 보고 나와서 무엇인가 공허한 기분을 느끼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 김훈은 "독서 하고서 자신을 혹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독서는 무의미한 것이다"하는 말과 일면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여기서 '비판', 혹은 '비평'이 키워드인데 창조는 비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얘기가 중요하다. 이러한 비판 의식은 결국 비독서에서 오히려 풍요롭고 다채로운 자기 의견을 가질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를 하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자기에 관한 성찰만이 비평 활동을 정당화 하고 비평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데도 그런 이익을 망각한 채 책을 지나치게 주의하여 읽는 행위는 읽는 사람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위험성이 있다는 얘기다"- 228쪽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종의 창작이라면, '역으로, 창작은 기존의 책들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234쪽


"교양 전체는 담론과 그 대상 간의 연관을 끊고 자기 얘기를 하는 능력을 보이는 이들에게 열리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본질적인 것, 즉 창조의 세계를 그들에게 열어주는 것이다."-236쪽


이러한 대목은 마치 책을 지나치게 정독하여 파고들 필요는 없는 것으로 책을 대충 봐도 좋다는 얘기로 오해하게 할 소지가 있는데 저자가 추가로 얘기한 바 비평은 작품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대상으로 하다'라는 전치사를 떼어낼 때 이것이 곧 비평을 그 자체에게, 즉 그의 고독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이요, 또한 그 자체의 창조 능력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했듯이 책을 대상화하고 혹은 우상화하여 자칫 자신에 대한 혹은 (삶의) 본질에 대한 비평정신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책이 대상화 될 때 나라는 주체 의식을 잃고 책에 함몰되어 버릴 때 우리는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읽고 책을 읽는 의미는 퇴색되어 버리고 만다. 

또한 책을 수직으로 깊이 파고드는 것도 때론 아주 필요하나 책들과의 수평적 가로지르기를 통해 그들간의 맥락과 관계를 폭넓게 파악할 때 그 하나 하나의 책에 대한 진정한 심연과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아니 읽었어도 처음부터 읽지 않았었던 책처럼 그것을 자유롭게 사유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깨우기 힘든 잠을 깨워 고속도로를 기어서 나왔습니다.

매 달 누적되는 2月의 Budget 대비 Actual을 확인하고 주어진 과제에 미달함을 반성하고 분석했습니다.

그래프를 그려 무엇이 상승하고 하락했는지를 알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2月의 데이터를 무아의 경지로 마무리하고 주문할 생산량도 분배했지요.

주간보고도 Send 하구요.

어제는 구조주의에 관한 책을 보았습니다. 푸코까지 맛만 보았는데 아찔합니다. 

누워있던 몸을 들어 등허리를 거의 90도까지 세웠지요.

그러고서 쵸콜릿을 먹는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그러한 것들을 선물해야 하는 날이니까요.

하나를 통째로 먼저 주는 아이,

반은 먹고 반만 내어 주는 아이,

함께 놀아주고 뿌듯합니다.

맑게 비치는 세살배기 검은 눈동자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아직 그 감정을 차마 다 헤아리진 못할테지요.


수많은 책 속에 어두워져감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지도요......

똑같은 책을 두 번 사는 신기한 경험도 요 며칠 했었지요.

대학교 도서관에 윤동주의 시를 읽고 대낮에 쏟아지던 별을 보았던 날이 떠오릅니다.

시간은 소멸하고 기억은 아련합니다.

외따로 떨어져 나와 나를 보고 싶은 날이기도 합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무변의 화성에서 저 멀리 나를 씁니다.


16.3.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에밀 아자르(로맹가리),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무미건조한 나날 속의 충동적인 일탈이요, 인식의 변화에 불을 지피는 불타는 지켜보기요, 기존의 통념적인 가치를 도끼로 깨는 파괴이자 공감을 환기하는 일종의 지독한 전염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인상적인 일탈은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열 일곱 살 홀린 콜필드가 바라본 세상과 여정은 이 자기 앞의 생의 여생을 살아가야 하는 열 네 살 모모의 시선과 느낌에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두 작품이 전하는 메세지는 다르더라도)

또한 '그리스인 조르바'의 자유로운 행위, 그 날것의 영혼과 함께 불타 올랐으며, 까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고 더해지는 그 새롭고 얼얼한 감동은 여전히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토마스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통하여는 건강한 시민과 고뇌하는 예술가 사이에서 번민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 속에 나의 바람과 갈등을 투영시키며 어린 시절 한 때 열광적인 감흥에 도취 되었고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속에서 얘기하는 삶에 대한 철학적인 인식과 태도는 가치전복계의 죽지 않은 신(나에게만큼은), 철학자 니체에게로 나를 다시 한 번 인도하는 가교가 되었었다. 그 영겁회귀사상의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쿤데라의 이 도발적인 소설을 나는 보았다.

'자기 앞의 생' 의 경우는 네 번째 정의, 바로 공감에서 촉발한다.

불쌍한 사람들(*소설 속의 모모의 멘토인 하밀 할아버지는 늘 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_'불쌍한 사람들'을 들고 다닌다.)의 절망과 비애 속에서도 종교와 인종과 계급과 가족을 뛰어넘는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그 당위를 아름답게 풀어놓은 이 소년의 이야기와 그 안에 담긴 커다란 메시지는 이 비좁은 가슴으로 오롯이 옮아왔다.

 

사실 지금 읽고 난 소감을 밝히는 자기 앞의 생은 그 자체로 훌륭하지만 내 느낌에 한해서 내가 먼저 언급한 소설들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소설의 총체적인 느낌에 있어서도 그 정도의 감동의 크기로 다가오진 못했다.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의 썩어가는 시체 앞에서 화장을 해주고 향수를 뿌리며 사랑에 대한 순수어린 집착과 광기로 삶의 저 밑바닥까지 그 생생한 죽음(이별)과 생(Re-born)을 마주한 소년의 처절한 사랑과 고통의 이야기는 퍽 감동적이었지만 가슴을 후벼 팔 정도의 감흥은 아니었다.(모모가 손수 안락사를 시키는 등의 조금 더 드라마틱한 사건 구성을 기대한 바가 있었고 죽은 후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지 않으려 인위적인 행위를 하는 장면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식상한 느낌으로 다가와서일 지 모른다.) 되려 내게 더 신선하고 인상적인 장면은 사랑하는 강아지를 단돈 500프랑을 받고 팔지만 더 좋은 집에서 살게 되었음에 대해 안도와 행복감을 느끼고 또 그 받은 돈은 다시 하수구에 버리는 장면과 어느날 갑자기 모모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인 모모를 찾으러 오는데, 그를 통해 모모는 실은 자신이 열 살이 아닌 열 네살임을 알게 되고 또한 그의 아들이 유대교에 세례를 받았다는 로자 아줌마의 거짓 설명에 친부라는 작자는 그 사실을 거부하며 아랍인 아들을 원한다고 절규하며 쓰러지는 장면 등이다. 

 

하지만 내가 참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사실 이런 것이다.

이러한 좋은 소설을 읽음으로 해서 내가 앞에서 처음 제기한 ‘(좋은) 소설을(혹은 책을) 읽는다는 것의 정의에 부응하여 내 삶을 저 극한까지 힘껏 끌어올리거나 저 깊은 심연까지 패대기 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따위의 저급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타인의 문제, 사회와 인류의 문제까지 나의 시선을 들어올리고 나의 편협하고 옹졸한 가슴을 활짝 펴게 하려는 나의 없던 기개, 의지, 그 사랑의 힘을 찾고 얻고자 하는 자극을 받았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불쌍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편견에 가려 진정 참됨의 가치를 깨우치지 못하거나 불행한 운명 앞에 쉬이 굴종해 버리거나, 조건 없는 사랑의 힘 그리고 그 경계 없는 사랑의 빛을 영영 찾지 못한다면 말이다.

슬몃 이 책을 읽은 후의 결론이 이상할지 모르지만 내 삶의 목적이 내 개인의 안위와 가족의 안녕에게만 머물러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나의 어여쁜 두 딸에게 훗날 좀 더 나은 아빠, 좋은 책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 지금부터 내 앞의 생,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P.S: 퇴고하지 않고 막 쓴 글을 막 올리고 다시 보니 낯 뜨거워 조금 더 고쳤지만 여전히 낯 뜨겁다. 의식하지 않고 내가 느낀 그대로를 적고자 하는 데 의의를 두며 꾸준하고 성실하게 써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2015년이 저물어 간다. 활짝 갠 서늘한 날들이 온다...

(젝일, 또 이렇게 나이를 먹는구나!)


어김없이 알라딘에서 올해 나의 독서결산을 해주었다. 가장 사랑하는 작가는 '김영하' 라고 나왔다.

거의 맞다. 최근에 돌아보면 그의 영향을 받았고 받고 있다.

아이폰의 신세계에 발을 들이고 팟캐스트의 유용함을 받아 들이기 시작했을 때 김영하라는 소설가가 그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어떤 책 얘기를 해주고 책을 직접 읽어주던.

가끔 보는 TED에서 김영하가 우리말로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되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책을 또한 사고 싶어졌다.

단편 소설집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를 읽었다. 약간 별로였지만 무언가 심오하고 심플하게 단박에 나를 끌어들여 그것을 거의 한 번에 읽게 했다.

'말하다'도 마찬가지다. 유명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강연했던 내용이 들어가 있었고, 그의 의견과 말의 내용들에 끄덕이던 부분 등 매력을 많이 느끼게 했다.

'읽다'도 역시 본인이 고전이라 불리는 명작들에 관해 읽고 그 메시지와 감흥에 대해 독자들에게 강연을 해준 내용을 편집하여 나온 책이다. 그는 고전의 얼개를 좋아하고 그 또한 그것들의 영향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소설 형식이 어디로부터 또는 무엇으로부터 빌어 왔는지 분명히 밝힌다. 끝까지 설득력있고 유려한 글솜씨로 굉장히 재미지게 했다.

이탈로 칼비노를 그를 통해 알았다. 이름도 얼마나 멋진가, 이탈로 칼비노라니! 

'왜 고전을 읽는가'의 서문을 그가 아이폰에서 읽어 줬었다.

나도 바로 매료되어 그의 책을 샀다. 이탈로 칼비노의 그 고전 평론집(에세이)을 이따금씩 열심히 읽고 있으며, 그의 저작 '보이지않는 도시들' 등 많은 전집을 구매할 계획이다.

김영하 작가는 미드 '소프라노스'도 끌어들인다. 소프라노스를 고전 속의 캐릭터들과 결부시켜 설명했는데 소프라노스가 보고 싶어졌다. 영어 공부도 더불어 하고 얼마나 좋은가!


그의 영향으로 다른 책 관련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으며 네이버의 지식인의 서재도 거의 모두 보고 업데이트 되기를 매 달 기다린다. 이탈로 칼비노를 알았고 오에겐자부로도 알았다.(만엔원년의 풋볼도 그가 지식인의 서재에서 내인생의 책으로 소개했던 책이다.) 소프라노스 시즌1을 모두 다운 받아 1회를 이미 봤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 취향 저격꾼.


그는 달변이고 이지적이다. 

아 하나를 빼먹었다. 그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 영화도 함께 봤으니 올 한 해 그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을 수 없었다.

알라딘이 제법 정확했다.


다음 리뷰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2'

다음 페이퍼는 '도덕의계보/이사람을 보라', '폭력이란 무엇인가', '불평등의 대가' 패키지다.


15.12.1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12-01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학 오디세이 2> 리뷰가 기대됩니다. 저는 이 책을 재미있게 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