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에밀 아자르(로맹가리),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무미건조한 나날 속의 충동적인 일탈이요, 인식의 변화에 불을 지피는 불타는 지켜보기요, 기존의 통념적인 가치를 도끼로 깨는 파괴이자 공감을 환기하는 일종의 지독한 전염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인상적인 일탈은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열 일곱 살 홀린 콜필드가 바라본 세상과 여정은 이 자기 앞의 생의 여생을 살아가야 하는 열 네 살 모모의 시선과 느낌에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두 작품이 전하는 메세지는 다르더라도)

또한 '그리스인 조르바'의 자유로운 행위, 그 날것의 영혼과 함께 불타 올랐으며, 까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고 더해지는 그 새롭고 얼얼한 감동은 여전히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토마스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통하여는 건강한 시민과 고뇌하는 예술가 사이에서 번민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 속에 나의 바람과 갈등을 투영시키며 어린 시절 한 때 열광적인 감흥에 도취 되었고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속에서 얘기하는 삶에 대한 철학적인 인식과 태도는 가치전복계의 죽지 않은 신(나에게만큼은), 철학자 니체에게로 나를 다시 한 번 인도하는 가교가 되었었다. 그 영겁회귀사상의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쿤데라의 이 도발적인 소설을 나는 보았다.

'자기 앞의 생' 의 경우는 네 번째 정의, 바로 공감에서 촉발한다.

불쌍한 사람들(*소설 속의 모모의 멘토인 하밀 할아버지는 늘 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_'불쌍한 사람들'을 들고 다닌다.)의 절망과 비애 속에서도 종교와 인종과 계급과 가족을 뛰어넘는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그 당위를 아름답게 풀어놓은 이 소년의 이야기와 그 안에 담긴 커다란 메시지는 이 비좁은 가슴으로 오롯이 옮아왔다.

 

사실 지금 읽고 난 소감을 밝히는 자기 앞의 생은 그 자체로 훌륭하지만 내 느낌에 한해서 내가 먼저 언급한 소설들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소설의 총체적인 느낌에 있어서도 그 정도의 감동의 크기로 다가오진 못했다.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의 썩어가는 시체 앞에서 화장을 해주고 향수를 뿌리며 사랑에 대한 순수어린 집착과 광기로 삶의 저 밑바닥까지 그 생생한 죽음(이별)과 생(Re-born)을 마주한 소년의 처절한 사랑과 고통의 이야기는 퍽 감동적이었지만 가슴을 후벼 팔 정도의 감흥은 아니었다.(모모가 손수 안락사를 시키는 등의 조금 더 드라마틱한 사건 구성을 기대한 바가 있었고 죽은 후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지 않으려 인위적인 행위를 하는 장면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식상한 느낌으로 다가와서일 지 모른다.) 되려 내게 더 신선하고 인상적인 장면은 사랑하는 강아지를 단돈 500프랑을 받고 팔지만 더 좋은 집에서 살게 되었음에 대해 안도와 행복감을 느끼고 또 그 받은 돈은 다시 하수구에 버리는 장면과 어느날 갑자기 모모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인 모모를 찾으러 오는데, 그를 통해 모모는 실은 자신이 열 살이 아닌 열 네살임을 알게 되고 또한 그의 아들이 유대교에 세례를 받았다는 로자 아줌마의 거짓 설명에 친부라는 작자는 그 사실을 거부하며 아랍인 아들을 원한다고 절규하며 쓰러지는 장면 등이다. 

 

하지만 내가 참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사실 이런 것이다.

이러한 좋은 소설을 읽음으로 해서 내가 앞에서 처음 제기한 ‘(좋은) 소설을(혹은 책을) 읽는다는 것의 정의에 부응하여 내 삶을 저 극한까지 힘껏 끌어올리거나 저 깊은 심연까지 패대기 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돈 많이 벌어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따위의 저급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타인의 문제, 사회와 인류의 문제까지 나의 시선을 들어올리고 나의 편협하고 옹졸한 가슴을 활짝 펴게 하려는 나의 없던 기개, 의지, 그 사랑의 힘을 찾고 얻고자 하는 자극을 받았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불쌍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편견에 가려 진정 참됨의 가치를 깨우치지 못하거나 불행한 운명 앞에 쉬이 굴종해 버리거나, 조건 없는 사랑의 힘 그리고 그 경계 없는 사랑의 빛을 영영 찾지 못한다면 말이다.

슬몃 이 책을 읽은 후의 결론이 이상할지 모르지만 내 삶의 목적이 내 개인의 안위와 가족의 안녕에게만 머물러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나의 어여쁜 두 딸에게 훗날 좀 더 나은 아빠, 좋은 책으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 지금부터 내 앞의 생,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P.S: 퇴고하지 않고 막 쓴 글을 막 올리고 다시 보니 낯 뜨거워 조금 더 고쳤지만 여전히 낯 뜨겁다. 의식하지 않고 내가 느낀 그대로를 적고자 하는 데 의의를 두며 꾸준하고 성실하게 써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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