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인생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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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일은 어떠신가요?

기시미 이치로, 전경아 옮김, 『일과 인생』(을유문화사, 2023)




‘잘’ 살기 위한 노동을 위하여


 기시미 이치로의 『일과 인생』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미움받을 용기』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는 이번 책에서 직장에 대한 의문, 노동에 대한 의문을 철학과 문학의 텍스트를 이용하여 해소하고자 한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 취준하고 있지만, 항상 평생 할 수 있는 직업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즐기면서 일하는 삶을 막연하게 꿈꾸면서 즐길 수 없는 일을 해야 하거나 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에 분노하며 슬퍼했다. 결국 사람은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톱니바퀴처럼 사용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보며 측은함이 들면서도 나도 저렇게 될까 두려움을 품었다.

아빠는 항상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처럼 살려면 일을 해야 한다고, 그건 아마도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큰 이유 중에는 돈이 있지만, 그것과 견줄 수 있는 건 어떤 루틴이 있는 생활과 그것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감각 혹은 마음이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을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과 함께 부대끼는 생활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들은 사회생활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근원적이고 커다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왜 나는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가? 기시미 이치로는 『일과 인생』에서 그것에 대한 답변을 문학으로, 철학으로 혹은 자신의 생활로 비유하여 답한다.


책에서는 네 가지 장으로 구성하여 여러 질문 혹은 생각을 짧게 단문으로 풀어낸다. 1장 우리는 왜 일하는 걸까?, 2장 당신의 가치는 ‘생산성’에 있지 않다, 3장 직장 내 인간관계 개선을 위하여, 4장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일해야 할까? 와 같은 큰 카테고리를 통해 기시미 이치로는 삶을 바라본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인 1장은 사람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말한다. ‘공헌감’이라는 가치를 느끼기 위함이고 그 가치를 통해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 1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고 그것을 이탈한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이 근원적인 상황에 대한 납득 가능한 이유가 필요하고 기시미 이치로는 그것을 여러 질문에 답변하며 해답을 내놓는다. 어차피 인간을 부품으로 생각하는 건 사회이며 부품인 인간은 그렇기에(그렇다고 저자가 인간을 부품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는다)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잘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인생의 큰 과제를 버려가면서까지 일에 미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러나 자신의 일을 사랑할 순 있다는 것을 동시에 말한다.

2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일에 관해 말한다. 2장과 3장은 직장 내에서 왜 사람이 이렇게 일을 통해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일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등을 말한다. 1장에서 말하던 기시미 이치로의 철학적 관점들을 기반으로 일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말하며 그러한 직장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4장에서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언급한다. 일의 동기를 파악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으로 두는 것.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저자는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철학과 문학의 텍스트를 이용하여 그리고 자신의 일화를 꺼내어 말한다. 어쩌면 기시미 이치로가 말하는 일과 인생은 조금 더 스마트하게 살아가라는 어떤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우선시하면서도 일에 프로가 되는 것. 프로는 마음가짐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에 매료됨과 동시에 저자의 일화와 철학 등을 만났다. 어쩌면 취준생인 내가 조금 더 관심 있게 살펴보고 집중해야 할 건 아닌가 싶다. 어딘가 막힌 것 같으면 그저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직진하는 태도도 중요하겠지. 멀리 돌아갈수록 더 멀리 가버리게 된다. 어쩌면 문은 눈앞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저자라면 어떻게 할까. 그냥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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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의 섬 읻다 시인선 13
미즈노 루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읻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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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미로 속으로

미즈노 루리코, 『헨젤과 그레텔의 섬』(읻다, 2022)

유년의 기억이 가득한 외딴섬으로

이어지다가 기어이 멀어지는 기억을 말하다

읻다 출판사 시인선에서 출간된 일본의 시인 미즈노 루리코의 『헨젤과 그레텔의 섬』이 2022년에 출간되었다. 시인은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나 세계대전을 유년에 겪고 오랜 시간이 흘러 쉰이 될 무렵에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공포와 슬픔을 「헨젤과 그레텔의 섬」으로 형상화했다. 그렇게 탄생한 시집 『헨젤과 그레텔의 섬』은 어딘가 쓸쓸하면서도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있고 화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에서 독자는 미즈노 루리코가 마련한 판타지적인 세계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작고 투명한 유리잔 같은 여름”(「헨젤과 그레텔의 섬」 중에서)이 환하게 열리는 세계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 외국 시는 한국 시보다 조금 더 직관적이고 크고 어딘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내겐 영미 시가 그랬고 한동안 멀리했다가 제임스 테이트의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창비, 2019)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뒤로 외국 시를 종종 보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이것도 어쩌다 보니 읻다에서 출간된 것이긴 하지만) 사가와 치카의 『계절의 모노클』(읻다, 2022)이었다. 맑고 투명한 모노클을 엿보는 느낌이었고 원래 일본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일본 시의 매력도 있다는 걸 이때 알게 되었다.

이번 서포터즈 활동 도서 중 하나인 『헨젤과 그레텔의 섬』은 『계절의 모노클』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판타지적인 느낌이 강했고 시인이 유년의 기억을 기반으로 시를 쌓은 만큼 감각적인 요소가 많았다. 기억으로 만든 동화를 읽은 느낌. 하지만 유년의 기억은 다 자란 지금에서 찾으려고 해도 찢겨 있거나 사라져 찾을 수 없다. 일부의 기억으로 잠시 엿보았다가 바로 사라지는 것을 눈앞에서 스스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러한 행위를 반복해서 하지 않았을까. 신비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아픈 기억을 꺼내 남은 것들이라도 제대로 보려고 상처에 상처를 더 낸 건 아닐까. 상처에서 가지가 돋는다는 건 이후의 이야기. 독자인 나는 그 경로를 따라 걸어본다. 예측할 수 없는 동화의 미로 속으로.

어두운 그림이구나 어머니가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회색빛 나무」 중에서

시집에 나오는 화자는 유년 시절의 시인처럼 보인다. 화자는 죽은 자신의 오빠와 함께 어머니나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어디론가 떠나기도 하고, 도라를 찾기도 하고(「도라의 섬」), 거대한 새인 모아가 있던 하늘을 생각하기도 하면서(「모아가 있던 하늘」) 무언가가 있던 자리를 계속해서 생각하거나 찾으러 간다. 훼손되었거나 이미 사라진 것들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시인은 자신의 유년에 잃어버렸던 기억을 찾으려는 행위를 거듭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판타지적인 세계를 기억하려는 시인의 행위는 자신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년의 기억에 두고 온 무언가를 다시 한번 만나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추억을 되새기며 “번역도 통역도 할 수 없는 침묵의 세계”(「시인의 말」)를 들여다본다. 동화적인 요소는 어쩌면 자신이 겪었던 전쟁과 끔찍한 기억을 자신도 모르게 순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아픈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힘들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혹은 경험한 감각적인 현상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치환하여 스스로 계속 들여다볼 수 있게 치장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기억의 알맹이를 찾기 위해, 여러 생명을 화자와 동등한 위치에 두며 망가진 기억을 선명하게 바라보기 위함이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렵고 힘든 기억 앞에서 한 사람은 지극히 작아진다. 하지만 기억을 바라보고 어떤 것으로든 표현하려 한다면 두려움은 뜻이 되고 무언가가 된다. 그 무언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 독자의 입장으로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귀한 어떤 기억을 잠시 관람한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게 시인이 가진 기억의 거리감이 스며들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 부르는 작고 투명한 여름이 『헨젤과 그레텔의 섬』을 펼치는 순간 독자를 환하게 비추고 조금 따가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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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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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자전거 페달을 밟는 마음으로

장류진, 『연수』(창비, 2023)

아득하고 두려운 미래의 직전에서

손등을 어루만지는 응원의 이야기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성공적으로 출간하면서 첫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를 연이어 흥행시킨 장류진의 두 번째 소설집 『연수』가 출판사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청춘의 생활을 정밀하게 반영하면서도 삶의 환한 면면을 드러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장류진은 이번 소설집에서 표제작이자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연수」를 포함한 여섯 가지의 단편소설로 독자들에게 막강한 재미를 선사한다.

가끔 정말 잘 사는지 모를 때가 있다. 이 길이 맞는지, 무엇을 삶에 우선으로 두고 생활하려 하는지 몰라서 어지럽다. 가끔 아주 우울하고 자주 지루하다. 생활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단조로워지면서도 그림자가 짙은 오후로 변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주변의 사람으로 인해 살아나기도 한다. 일상의 평범함을 묻는 대화나 피부를 맞대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농담이 내일을 기대하게 할 때도 있다. 이러한 특별함은 아주 사소하지만 빛난다. 해변의 모래처럼 가벼우면서 아름답다.

장류진의 『연수』에서는 단조로운 생활에 약간의 변주를 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용감하면서도 어딘가 불안함이 있는데 다른 인물들과 만났을 때의 시너지로 용감함을 표출하는 인물로 변화한다. 그들은 주인공들 옆에서 주인공이 못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초반에는 신경을 자극해서 주인공의 일상을 뒤흔든다. 흔들린 일상은 이전의 일상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거나 좋지 못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장류진만의 변주는 무작정 위로를 건네거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아서 독자에게 만족을 준다. 여성의 문제나, 사회의 문제 등 시의성이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독자에게 건네는 용기는 어딘가 조금 때가 탔지만 단단하고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다. 작가도 그런 것들을 노리지 않았을까?

나는 그럴 때마다 겨우 이런 일이, 결국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되어버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기쁜 순간씩이나 되는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연수」 중에서

표제작인 「연수」는 운전공포증을 앓는 주연의 이야기다. 주연은 살면서 실패를 해본 경험이 없고 열심히 삶을 사는 여성이다. 하지만 실패해 본 적 없는 주연에게도 단 하나의 실패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운전이다. 언제까지고 운전을 하지 않을 순 없어서 주연은 맘카페에 가입해 엄마 나이대이면서도 ‘일타강사’로 소문난 여성 운전 강사를 만나게 된다. 둘이서 운전을 시작하면서부터 서사는 시작된다.

나는 운전을 정말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주연과 비슷하지만 나는 남성이어서 운전을 못 한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더 큰 단점으로 보이곤 했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저렇게 사랑으로 배운 운전이라면 정말 운전을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운전 강사는 어딘가 드세면서도 따뜻해서 주변의 따뜻한 어른 한두 명 정도를 떠올리기도 했다. 동시에 이 소설은 운전 강습만을 이야기하지 않아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주인공인 주연의 엄마와 주연과의 서사 또한 눈여겨볼 부분이었는데, 엄마는 주연의 성취를 기쁨으로 삼는 사람이었고 주연은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신은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조금 의아했다. 누군가의 성취가 자신의 기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안위보다 더 아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삶의 축복 중 하나 아닐까. 이 대목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할 관계라는 포인트는 어딘가 기이하면서도 너무 따뜻하다. 아주 따뜻해서 떨어지고 싶을 만큼.

장류진의 소설은 여러 지점을 건드린다. 이번 소설에서는 격려하는 마음을 중심으로 서사를 이어가지만, 서사의 주변에는 사회의 문제를 건드리기도 하고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독자는 단편을 읽으면서 많이 사랑받고 답답해하며 슬퍼할지도 모른다.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모든 것이 기쁨으로 느낄 수는 없다는 것. 하지만 장류진은 독자의 자전거 안장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부분을 잡아준다. 독자가 이 이야기를 다 훑고 혼자서 서사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말이다. 어느새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있을 게 분명하다. 장류진의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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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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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살아있는 이야기

가이 대븐포트, 박상미 옮김, 『스틸라이프』(을유문화사, 2023)


방대한 예술의 세계가

단 하나의 사과 속에 있다

가이 대븐포트의 『스틸라이프』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정물화로 그려진 정물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 정물이라는 소재가 등장한 고대에서 중세, 현대까지를 아우르고, 미술사와 자연사, 고대 그리스 문학부터 대중소설 등에 나타난 정물을 탐색한다.

우리는 정물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흔히 정물이라는 단어의 어감을 서양화의 정물화를 생각하면서 어렵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앉기 위해 사용하는 의자도 정물이고 학교나 천장에 매달린 조명도 정물이다. 가만히 있는,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는 무정물이 바로 정물이다. 삶에서 흔히 포착되는 물건이기에 정물은 많은 예술품으로 활용되었다. 사람들은 사물에 이야기를 붙이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예술 작품에 접목하여 새로운 세계의 포문을 열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방식으로 많이 활용된다. 그만큼 정물은 우리의 삶에 친숙하면서도 무궁무진한 세계를 품는다.

많은 이야기를 품은 정물을 그림으로 표현한 정물화의 역사는 고대 신석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서양 정물화에서 가장 번성하였다. 이렇게 오래된 장르인 정물화는 많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다. 다른 추상적이고 강렬한 장르와 비교하였을 때 가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서도 평범한 정물(정물은 영어로 still life, 프랑스어는 nature morte로 직역하면 ‘부동의 생물체’, ‘죽은 자연’ 정도로 해석된다)이기에 그것을 재현하는 정도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가이 대븐포트는 이러한 입장에 반론이라도 내놓듯 아주 넓게 정물을 탐색한다. 정물이 표현하는 아주 사소하고도 복잡한 서사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서사가 정물이라는 한 점으로 수렴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정물의 가치를 책으로 내놓는다.

역사를 통해 한 정물화가 다른 정물화에 대해 갖고 있는

일종의 혈연관계는 다른 장르들,

즉 풍경화가 풍경화에 대한,

초상화가 초상화에 대한 관계보다 훨씬 두텁다.

이게 정물화가 지니는 본질적인 미스터리다.

「여름 과일 광주리」 중에서

책에서 주장하는 정물의 의미는 인드라망에 가깝다. 무언가 연결되어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는 저것을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다. 말하자면 정물은 인간적이면서도 삶을 축소한 것과 같다. 저자는 이러한 정물의 세계를 피카소의 큐비즘, 과일 바구니에 든 잘 익은 사과, 에드가 엘런 포의 고딕 작품 등을 통해 다방면으로 살펴본다. 저자가 보여주는 정물의 서사는 흥미롭다. 정물을 말하고 있지만, 정물 이후의 세계를 살피면서 정물을 더욱 흥미로운 이미지로 변환한다. 이러한 작업은 예술과 문학의 아름다움을 확장하는 하나의 예시로 보인다. 정물은 어떤 단서가 되기도 하면서도 앞장서서 무언가를 말하는 등불이 되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덮자 집의 풍경은 조금 이상하고 신비로워 보인다. 아무렇게나 쌓인 책과 나의 침대에는 어느새 내가 밝혀내야만 하는 서사가 숨어있는 듯하다. 저자는 이러한 점들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보여주는 정물의 세계를 통해 독자의 가장 가까운 보금자리에는 어떤 서사가 있는지 스스로 밝혀내게끔 한다. 이러한 행위는 예술과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이다. 어느새 『스틸라이프』 또한 나의 이야기가 담긴 하나의 정물이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 무슨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나. 가끔 이야기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에 가까울 때가 있다. 이미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그것을 발견하고 내 손에 쥐었을 때 이야기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어떤 정물이다. 정물은 변하지 않기에 여러 방향으로 빛을 비출 수 있다. 그것의 등 뒤로 그림자가 여러 방향으로 쏟아지는 오후를 생각한다.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상당히 흥미로운 과거들이 숨어있어 그것을 발견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지만, 꺼낸다면 쉴 새 없이 쏟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 한 권을 내놓는다. 당신이 그것을 연다면 정물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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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서 만나요
이유리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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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으로 여는 사랑의 미래

이유리, 『좋은 곳에서 만나요』(안온북스, 2023)



삶의 저편에서 바라보는

무너질 수 없는 사랑의 미래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으로 등단하여 『브로콜리 펀치』(문학과지성사, 2021)로 첫 소설집을 출간한 이유리 소설가의 첫 연작소설집 『좋은 곳에서 만나요』가 안온북스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따뜻한 상상력과 독특한 낙관적 태도를 통해 보여주었던 이유리는 이번 연작소설에서 긴 호흡으로 각각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순간을 죽음이라는 현상을 통해 보여준다.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의 이전을 삶이라 부르지만 이후는 무엇이라고 확실히 부를 만한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용어가 없다는 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추상적인 현상에 어떤 생각을 더하거나 상상한 적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죽음과 삶을 생각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과연 죽음 이후의 나는 어떤 존재로 남아있을까, 나의 존재가 세계에 어떤 영향을 줄 수나 있을지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결론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나를 제외한 나의 주변에 남은 나의 흔적이 나머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귀결되곤 했다.

이유리의 『좋은 곳에서 만나요』는 여섯 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이전에 수록된 소설에 등장한 화자와 아주 잠시 스쳤거나 얽힌 인물이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스스로 생을 마무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죽음이라는 현상은 비통하고 슬픔으로만 읽힐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이유리는 특유의 낙관으로 이러한 시선을 뒤엎는다. 슬픔은 더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그곳에서 발생하는 사랑과 기쁨, 스스로 발견하는 희망을 허투루 넘기지 않으며 그것을 확실히 바라본다. 그리고 기꺼이 희망의 곁으로 향한다. 희망의 옆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슬픔과 비통함을 모두 겪어야 해도 말이다.

그러나 수억만 분의 일의 확률로, 무작위로 내달리던 두 갈래의 빛이

어딘가에서 다시 겹쳐지는 찰나가 있다면,

나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 찰나를 붙잡아두는 방법을,

그저 소중하고 소중하게 누리는 방법을.

「아홉 번의 생」 중에서

이유리의 소설은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말하려고 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화자들이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희망과 사랑을 얻는 내용을 이유리의 시선으로 재해석한다. 마치 앞으로만 보면서 가던 길을 뒤를 돌아서 뒤로 걷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화자가 겪었던 찰나를 다시 돌아보며 급하지 않게 결론에 도달하려 한다. 심지어 결론에 도달하지 않아도 화자가 직접 두 눈으로 희망을 보게끔 하여 그 희망이 미래에 닿을 것이라는 확신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나는 이유리의 언어가 단언하지 않아서 좋았다. 확실한 건 없다고, 찰나와 과정이 합쳐져 복잡하고 다채로운 세계를 재현하는 능청스러움도 좋았다. 이러한 이유리만의 소설은 당혹스럽고 어두운 세계에 사라져가는 희망과 사랑의 자리를 마련하고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래를 낙관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 해답은 내버려두는 일,

다만 그것뿐이었다는 사실을.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한발 물러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불완전함에서 완전해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다만 애정 어린 눈으로 끝까지 지켜보는 것.

「이 세계의 개발자」 중에서

이유리는 불완전한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는 세계의 개발자가 되어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짓고 부수며 사람을 살게 하는 걸까. 계속해서 오류가 발생하고 그것을 고치는 신의 입장을 게임 개발자인 화자의 모습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준다. 완전함에 다다르는 길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사건을 통해 보여주며 이유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려준다.

이는 나라는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삶의 먼 미래까지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과 같다. 조금 더 가벼워지기.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깊은 방파제로 빠져드는 것처럼 가볍게 오르는 일만이 전부일 때는 그것을 행하기. 단순한 삶의 태도가 어쩌면 영원하지 않은 세계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이유리는 자신만의 낙관적인 태도로 그것을 시도하려 한다.

유령의 모습이나 다른 존재의 모습으로 사랑을 직접 확인하려는 이유리의 태도는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계속해서 냉소적이고 딱딱한 태도가 기저에 깔리게 되는 세계에서 영원을 쫓고 사랑을 하겠다는 고백은 낭만을 넘어 어떤 의지로도 읽힌다. 영원히 영원을 찾아 사랑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용기는 세상의 그 어떤 냉소보다 더 단단하고 깨지지 않을 것만 같다. 이러한 태도는 독자들에게도 영원과 사랑을 믿을 수 있게끔 도와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유리가 행하고 입증하려는 사랑의 미래가 좋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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