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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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살아있는 이야기

가이 대븐포트, 박상미 옮김, 『스틸라이프』(을유문화사, 2023)


방대한 예술의 세계가

단 하나의 사과 속에 있다

가이 대븐포트의 『스틸라이프』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정물화로 그려진 정물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 정물이라는 소재가 등장한 고대에서 중세, 현대까지를 아우르고, 미술사와 자연사, 고대 그리스 문학부터 대중소설 등에 나타난 정물을 탐색한다.

우리는 정물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흔히 정물이라는 단어의 어감을 서양화의 정물화를 생각하면서 어렵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앉기 위해 사용하는 의자도 정물이고 학교나 천장에 매달린 조명도 정물이다. 가만히 있는,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는 무정물이 바로 정물이다. 삶에서 흔히 포착되는 물건이기에 정물은 많은 예술품으로 활용되었다. 사람들은 사물에 이야기를 붙이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예술 작품에 접목하여 새로운 세계의 포문을 열었다. 물론 지금도 이러한 방식으로 많이 활용된다. 그만큼 정물은 우리의 삶에 친숙하면서도 무궁무진한 세계를 품는다.

많은 이야기를 품은 정물을 그림으로 표현한 정물화의 역사는 고대 신석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서양 정물화에서 가장 번성하였다. 이렇게 오래된 장르인 정물화는 많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다. 다른 추상적이고 강렬한 장르와 비교하였을 때 가치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서도 평범한 정물(정물은 영어로 still life, 프랑스어는 nature morte로 직역하면 ‘부동의 생물체’, ‘죽은 자연’ 정도로 해석된다)이기에 그것을 재현하는 정도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가이 대븐포트는 이러한 입장에 반론이라도 내놓듯 아주 넓게 정물을 탐색한다. 정물이 표현하는 아주 사소하고도 복잡한 서사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서사가 정물이라는 한 점으로 수렴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가면서 정물의 가치를 책으로 내놓는다.

역사를 통해 한 정물화가 다른 정물화에 대해 갖고 있는

일종의 혈연관계는 다른 장르들,

즉 풍경화가 풍경화에 대한,

초상화가 초상화에 대한 관계보다 훨씬 두텁다.

이게 정물화가 지니는 본질적인 미스터리다.

「여름 과일 광주리」 중에서

책에서 주장하는 정물의 의미는 인드라망에 가깝다. 무언가 연결되어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는 저것을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다. 말하자면 정물은 인간적이면서도 삶을 축소한 것과 같다. 저자는 이러한 정물의 세계를 피카소의 큐비즘, 과일 바구니에 든 잘 익은 사과, 에드가 엘런 포의 고딕 작품 등을 통해 다방면으로 살펴본다. 저자가 보여주는 정물의 서사는 흥미롭다. 정물을 말하고 있지만, 정물 이후의 세계를 살피면서 정물을 더욱 흥미로운 이미지로 변환한다. 이러한 작업은 예술과 문학의 아름다움을 확장하는 하나의 예시로 보인다. 정물은 어떤 단서가 되기도 하면서도 앞장서서 무언가를 말하는 등불이 되기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덮자 집의 풍경은 조금 이상하고 신비로워 보인다. 아무렇게나 쌓인 책과 나의 침대에는 어느새 내가 밝혀내야만 하는 서사가 숨어있는 듯하다. 저자는 이러한 점들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보여주는 정물의 세계를 통해 독자의 가장 가까운 보금자리에는 어떤 서사가 있는지 스스로 밝혀내게끔 한다. 이러한 행위는 예술과 문학만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이다. 어느새 『스틸라이프』 또한 나의 이야기가 담긴 하나의 정물이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 무슨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나. 가끔 이야기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에 가까울 때가 있다. 이미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그것을 발견하고 내 손에 쥐었을 때 이야기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어떤 정물이다. 정물은 변하지 않기에 여러 방향으로 빛을 비출 수 있다. 그것의 등 뒤로 그림자가 여러 방향으로 쏟아지는 오후를 생각한다.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상당히 흥미로운 과거들이 숨어있어 그것을 발견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지만, 꺼낸다면 쉴 새 없이 쏟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 한 권을 내놓는다. 당신이 그것을 연다면 정물은 이야기를 할 것이다.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야기를.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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