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인간
캐롤 K. 트루먼 지음, 신소영 옮김 / 레디셋고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대부분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 우리는 그 짜증을 유발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도대체 왜 짜증이 나는지 알지 못할 때가 있다. 별로 화가 나는 상황이 아닌데도 불같이 화가 나는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도 생겨난다. 또 어떨때는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나는 안될 거야" "나는 못해"하고 더럭 겁부터 먹어 의기소침하게 돌아서고는 한다. 이렇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짜증과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 캐롤 K. 트루먼은 이러한 짜증의 원인이 내면에 억압되고 숨겨진 부정적 감정들이라고 말한다. 도서 『감정인간』은 부정적 감정에  휘둘리는 원인과, 부정적 감정을 끊어내고 오롯이 본인의 의지대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침서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낯설지 않다. 세계적 영성가 디팩 초프라의 영적 이론과 정신건강을 도입하여 '존재'의 가치를 일깨우며, 부정적 감정을 건강과 인생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로 인식하고 있다. 

 

 

흔히 심리학에서는 본말전도가 일어난 경우를 자주 이야기 한다. 우리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아 불안함과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불안이라는 감정 자체가 과거에 먼저 있었고, 그것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보는 일은 많지 않다. 어떤 상황에 주어졌을 때 짜증으로 반응하는 것,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것. 그 어느 것도 개인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다. 그런데 부정적인 감정은 무의식중에 우리가 그 상황을 짜증과 스트레스로 대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주로 이야기 하는 '부정적인 생각'은 "나는 소중하지 않아", "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생활에서 이런 소극적인 감정을 느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때마다 대범해지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고, 계속해서 그 상황이 짜증나게 생각되기도 한다. 책 속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을 보면,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살, 약물 중독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몸에 한 번 잘못 인식된 부정적인 경험과 감정이 계속 우리 생활에 영향을 주게 하는 원인은, 우리가 그것을 마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과 마주할 필요가 있다. 마치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말그대로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 숨겨진 상처나 부정적인 경험을 들춰내어 스스로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원인은 다양하게 있겠지만, 이 책에서 지적하는 건, 우리 사회가 우리의 치부를 감추고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잘못을 저질렀거나 슬픔을 느끼는 일이 있었을 때, 부모가 그 상처를 멋대로 덮어버리거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거나, 혹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과 같은 인식을 심어준다. 우리는 그렇게 '솔직한 감정'을 가슴 안에 넣고 문을 잠궈 버린다. 그러고는 마치 잊어버린 것 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 "Feelings Buried Alive Never Die"처럼, 그런 경험은 지워지지 않고 삶에 영향을 준다. 궁극적으로는 '솔직함'을 잊고 '거짓된 삶'을 살도록 만든다. 스스로가 스스로일 수 없게 만드는 상황과 선택. 그것이 짜증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심지어 부정적인 생각들은 우리 몸에 병을 가져오기도 한다. 부정적인 생각은 호르몬에 영향을 미치고, 세포 면역력을 떨어뜨려 가벼운 증상부터 암처럼 심각한 질환까지 다양한 증상을 겪게 만든다. 부정적인 감정은 줄곧 긴장하게 만들어 신경증이나 공포증(포비아)을 일으키기도 한다. 요컨대 인간의 육신과 감정을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으며, 그래서 '정신건강'도 챙겨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에서는 재미있게도, 다양한 질환별로 관련되어 있는 부정적인 감정의 종류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병은 어떤 특정한 감정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서 '감정노트'를 제안한다. 일단 자기 자신의 내면을 마주한다. 그렇게 해서 억압되고 숨겨져 있으며 인식하지 못했던 부정적인 감정을 일단 마주하자. 그 다음은 '감정노트'를 쓴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 화, 짜증. 이것들을 숨기지 않고 노트에 적는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과 '반대'되는 긍정적인 감정들을  "나는                  하다."  라는 문장의 빈칸에 적고 되뇌인다. 거짓말 같지만, 이렇게 자기 감정을 솔직히 인식하고 그것과 반대되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화가 가라앉고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겨난다고 한다. 마치 긍정의 주문 "하쿠타마타타" 처럼. 이 책의 좋은 점은 바로 쉽다는 점이다. 노트를 쓰고,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말을 읽어주는 것.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해볼 수 있다는 게 바로 강점이다. 

 

 

 

 

 

'감정노트'를 적을 때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용서, 관용' 을 떠올리며 문장을 적는다. 저자는 계속해서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그 사람에게서 스스로의 싫은 점을 거울처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관계도 마음먹기에 달려있으며, 사랑이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낄수만 있다면 상황은 보다 긍정적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또 우리 주변의 사람들-특히 어린 자녀-과 관계를 하는 데 있어서 관용이 없이 상대방을 멋대로 하려고 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칫하면 상대는 영영 마음의 문을 닫고, 침묵의 관계를 지속하게 될 것이며, 부정적 감정을 내면에 축적해 그것들로하여금 인생을 좌우하도록 만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때로는 '감정'의 형태를 말로 구체화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책에는 다양한 '어휘'로 설명되는 감정의 종류들이 「부록」에 실려있다.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에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부정적 감정들에 대비되는 긍정적인 감정들의 종류 또한 나열해 놓아, 각자에게 필요한 '문장'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목록들은 경험에 의해 생산된 것이고, 그래서 더욱 효과적이고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책 전반에 걸쳐 '말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느끼게 된다. '감정노트'를 쓰고 스스로의 감정과 기분을 컨트롤하다보면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말의 힘을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바꿔나갈 수가 있다. 그 전에 먼저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계속해서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눈을 돌리지 말고 마주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저자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주장하는 부분은 '스스로 변화할 의지'를 깨워주는 데에 큰 계기를 제공한다. 과거나, 혹은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다보면 우리는 짧은 인생을 허무하게 소비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감정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감정노트'를 이용한 감정컨트롤 방법의 요점은 아래와 같다. 

○ 즐겁고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주도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자. 
○ 그리고 긍정적인 '자기 모습'을 그려보고 주문처럼 말로 해보자. 
○ 이 때 무조건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현실과 사람들을 물처럼 받아들이자. 

이 책을 통해 그 동안 알 수 없던 짜증과 불안의 원인을 마주하고 긍정적인 자기 모습을 그려본다면 인생의 활력을 되찾고 성취감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될 거라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루조당 파효 서루조당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서루조당 파효」가 출간되고 약 8개월. 그리고 내가 그 책을 읽은지 3개월이 지났다. 그 3개월은 「서루조당 파효」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들을 읽기까지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서루조당 파효」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일본 고전문학에 대해 탐구하고 싶게 만들었고, 그 추가적인 공부과정은 다시 「서루조당 파효」의 빛나는 문장들을 찾아보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다. 순환하고 순환하는 느낌.



헤르만 헤세는 "진정한 독자라면 누구나 설령 책이 단 한권도 새로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존의 보물을 수십 년 수백 년이라도 더 붙들고 계속 씨름하고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책이라도 거듭하여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다가오고 다르게 이해되며 색다른 울림을 일으키게 마련이다"라고도 말했다. 「서루조당 파효」를 읽는 일은 내게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경험이 된 것 같다. 오늘 [두번째탐서. 발심]을 읽으면서 미소짓는 일이 많았고, 그 기분을 간직하려고 아래 나름대로 정리해두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았고, 아는 만큼 느꼈지만, 욕심이 발동하여 여하튼 적지 않을 수가 없다. 

발심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다리 건너는 것을 좋아해서, 그것만을 위해 돌아다닐 때가 있다. (p. 87)"


그러고는 메이지 유신 후 세워진 요로즈요바시[萬世橋]를 건널 때 썩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니혼바시[日本橋] 다리를 건널 때 이것이 하이칼라인가 하고 느꼈던 것 등을 이어서 이야기한다.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에 1919년에 그려진 니혼바시 주변 풍경 엽서가 실려있다. 이 삽화에는 넓은 도로와 서양식 건물들이 새로운 시대로 가는 일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니혼바시가 어딘가하면, 미쓰코시 백화점이 세워진 곳 근처이다. 미쓰코시가 또 어떤 곳인가 하면, 바로 메이지 시대에 예술, 건축, 유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구적이고 모던한 유행을 지휘한 백화점으로, '문화기관'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기관이다. 사람들은 "도쿄의 유행=미쓰코시"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다. (여담이지만 미쓰코시 백화점 부흥 배경에는 식민지인 조선의 쌀을 싼 값에 들여가 자산을 쌓았다는 사실 또한 있다.)


(책에 실린 삽화는 이것과는 다르다)


책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으로 문명이 개화되었고, 1872년에 이미 최초의 철도가 수도 도쿄에 설치되어 사회적 수준에서의 '이동'이라는 현상이 생겨났다[1].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출세의 수단이 '학문'이라고 하는 교육혁명이 일어나, 청년들은 성공이라는 새로운 꿈을 안고 도쿄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이런 추세에 가장 태생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무사계급이었다고 전한다. 무사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정치상의 이유로 여러 수도와 영토를 오가며 생활하는 공간적 이동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신분제도 폐지로 인해 몰락 위기에 처해있는 집단이기도 하여 도쿄로 몰려드는 성향이 짙었다고 말한다. 청년들에게 급변하는 도쿄의 풍경은 "신시대"와 "하이칼라", "입신출세의 기회"라는 비젼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기능한 것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에 비해 주인공 '나'의 신분이 본래 무사였다는 사실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러한 배경지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출세를 위한 정열을 불태우는 야욕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아무튼지간에 닥치는대로 '읽는다'.  열정을 불태우는 활동은 독서 뿐이 없는 그가 최근에 읽은 소설이 퍽 마음에 들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읽은 책은 쓰보우치 쇼요가 하루노야 오보로라는 명의로 쓴 '당세서생기질'로, 열 권이 있었다. 듣자하니 열일곱 권이 나와 있다고 하니 (중략) (p.93)"  

쓰보우치 쇼요의 '당세서생기질'은 1885-1886년에 쓰여졌다. 6-7년 전에 출판되었다고 하면 '지금'은 약 1892년이다. 아직 미쓰코시 백화점이 백화점이 세워지는 1904년 이전인 것이다. 쓰보우치 쇼요는 일본 최초로 소설의 의의와 본질을 밝힌 이론서 「소설신수」를 지은 작가이다. 메이지 초기부터 일본 근대문학에 변혁이 일어나, 이전에는 통속적이고 저속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소설 분야에서도 다양한 시도와 발전들이 이루어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쇼요는 "소설을 예술의 하나로 정의하고, 그것 자체의 가치를 선언[1]"하였다.  쇼요는 인간 심리를 분석하여 사실대로 묘사하는 것이 소설의 의의라고 말하며, 근대 문학이 이러한 사실주의 방향으로 개량되기를 권장하였다[2]. 그리고 쇼요는 사실주의 이런을 실현하기 위해 「당세서생기질」을 썼는데, 풍속적이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전개시키는 등 실험적으로 소설을 써나갔다고 한다[1]. 이후로도 쇼요는 실험적으로 몇몇 소설을 냈지만, 한계를 느끼고 글쓰기를 포기하였으며, 연극 분야에서의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다.

다시 「서루조당 파효」의 이야기이다. 무료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마루젠 서점에 들른 주인공 '나'가 점원에게 책을 추천받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독백이 나온다.


"같은 쓰보우치지만 쓰보우치 유조라는 작가의 '신편부운'이라는 책이 있기에 찾아보니, 유조는 쇼요의 실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1 권이라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재미있다고 한다. 그럼 달라고 말하자, 그것은 명의를 빌려준 것이고 작가는 다른 사람이란다. 후타바테이 어쩌고라는 인물인 모양이다. (p.100)"


여기서 말하는 후타바테이가 후타바테이 시메이로, '신편부운'은 「뜬구름(188-1889)」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타바테이가 쇼요를 찾아가 자신의 문학론을 밝혀 쇼요가 매우 놀란 일이 있다고 한다. 후타바테이는 단지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모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허상의 본질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1]. 「뜬구름」은 소신껏 살아가는 사람이 직장과 사랑을 모두 잃는 내용의 소설로, 결국 인간의 내적 욕구가 사회적 논리와 현실에 의해 지배되고마는 현실을 어렴풋이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다[2]. 신분사회가 철폐되었어도 실질적으로 현실에서는 과거와 현재, 개인과 사회가 부딪치고 있었다. 「뜬구름」이라는 제목도 이러한 문명의 어두운 면과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하는 제목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뜬구름」은 또한 소설의 회화 부분에 실제 말하는 것처럼 구어체를 사용하는 방법인 '언문일치체'를 사용한 일본 최초 근대문학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점원은 신문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저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언문일치를 싫어하는 분도 많은 것 같고, 한문이나 우아한 문장이 취향인 분도 계시고요. 비묘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분도 많은 것 같더군요. 뭐, 앞으로는 오히려 오자키 고요 같은 사람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문장이 아름답기도 하고. 오자키 고요는 말투가 다듬어진 문어체로 쓰는데도 안의 대화가 요즘 쓰는 말투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게 퍽 괜찮습니다. 신문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는 고다 로한도 좋아합니다. (p. 102)"

오자키 고요가 등장했다. 오자키 고요는 1889년 요미우리 신문사에 입사하여 문예란을 담당했다. 그는 신문기사들이 통속적인 것을 다루는 세태를 깨고 신문소설이라고 하는 보다 명확한 지위를 만들었다. '겐유샤'라고 하는 문학집단을 만들어 문학발전과 후배 양성에도 힘썼으며, <가라쿠타 문고>라고 하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에서는 겐유샤의 멤버 와타나베 오토와가 <박문관>이라는 거대 출판기업 회장 오하시 사헤이의 데릴사위가 된 것을 통해 오자키가 거대기업의 파워를 얻었다고[1] 전하지만 사실 오자키와 거대기업간의 연은 이것만은 아니다. 겐유샤 멤버 중에는 이와야 사자나미와 같이 <박문관>은 물론 미츠코시 백화점의 유행연구회에 소속된 사람들도 많았다. 도쿄의 문예 부흥에 있어서 오자키의 지위는 '지식인', '사회 고급계층'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오자키 고요의 작품  「금색야차(1897-1902)」는 남녀의 사랑과 배신을 그려 큰 히트를 쳤고, 신문, 잡지, 연극이라는 문명 수단을 통해 일본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이른바 국민문학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1]. 「금색야차」가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게 1897년이기 때문에 아직 「서루조당 파효」 의 세계 안에서는 「금색야차」는 없었던 것이 된다. 1892년 무렵 오자키 고요가 발표한 소설에는 「두 여승의 참회(1889)」, 「침향 목침(1890)」, 「세 아내(1892)」 등이 있다. 「서루조당 파효」 의 중간에 서점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분이 있다.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 중인 '삼인처(三人妻)'는 잘 읽고 있습니다. (p.122)" 이로써 「서루조당 파효」의 시기가 1892에 가깝다는 게 거의 확실해 진다.


(오자키 고요)


이제 「서루조당 파효」의 장면에서 오자키 고요의 문하생이 등장한다. 그가 스승 오자키 고요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하는 처음 문장은 다음과 같다.

"소설이라는 것의 힘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글은 조루리의 말투에 속어의 대화문을 섞는 독특한 것으로,

(중략), 읊어 보면 아름답고, 판면도 조화롭고 새로워요. (중략)

언문일치라기보다 새로운 쓰기말을 만들어내셨습니다. (p.106)" 

오자키 고요가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고자 힘쓴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그가 요미우리 신문에 입사하기 이전 신문기사라고 하는 것은 최대한 빨리 사건을 전달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문장이 저속한 수준이었다. 게사쿠(통속 오락 소설) 역시 저속한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자키는 근대의 소설이 이런 저속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양적 근대 소설과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의 계기가 된 것도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신수」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 발전의 수단으로 문장 표현법의 개혁을 생각해냈다. 그가 시도한 문장은 고전적인 스타일도 갖고 있었지만, 기호나 활자가 사용되는 등 참신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1]. 그는 문장에 굉장히 집착했고,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문장을 완성할 생각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  그가 지나치게 문장 만들기에만 급급했던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있지만, 오자키는 "호들갑스럽게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다른 장르에 맡겨두면 된다." 라고 자기 작품 「작가 고심담(1897)」에서 말했을 정도이다. 이 단 하나의 사실만 알아도 「서루조당 파효」에 나오는 오자키 고요의 제자가 하는 다음의 말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현재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문학운동에도 가세하지 않는,

실로 요괴 같은 무언가를 저는 스승님으로부터 멋대로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p.117)" 


이제 장면을 한참 넘어가서, 주인공 '나'와 오자키 고요의 제자, 이른바 '하타케노 이모노스케'라고 하는 두 사람이 조당에서 조당 주인과 대화를 한다. 아래의 대화에서도 여전히 오자키 고요에 대한 설명, 내지는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타케노: 자연주의가 생겨나고, 러시아나 유럽의 문학이야말로 문학의 정통이 되고,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표현으로서의 언문일치만이 도마 위에 올려지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게사쿠 소설은 취할 점이 없다고 버려지고 있지요. 제 스승이신 오자키 고요는 이하라 사이카쿠를 더없이 사랑하는 아인이기도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의고전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p. 140)

주인: 모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라는 뜻이군요.

여기서 나오는 의고전주의라고 하는 건 메이지 시대의 문예사조가 서양화 하는 것에 반발하여 고전적인 것의 가치를 중요시한  흐름이다. 의고전주의 작품들은 고전적인 한문체와 테마를 유지하면서도 근대적인 것을 그리려고 했다[1]. 대표적인 작품에 고다 로한의 「오층탑(1891-1892)」이 있다. 고다 로한이라는 이름은 마루젠 점원의 입에서도 언급된 그 이름이다. 점원이 "저는 고다 로한도 좋아합니다." 라고 한 것은 고다 로한의 작품이 바로 의고전주의적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층탑」은 일한혼용체로 쓰여진 작품이며, 무사와 같이 강인한 장인이 탑을 완성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문명 개혁과 근대 문학」에서는 오자키 고요의 작품이 사실주의, 여성적이었던 것에 비해 고다 로한의 작품이 이상주의, 남성적이었다고 평한다[1].

대중문학 형성 시기에 문예인들 사이에 소설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써야 하기에 내용적인 면을 추구해야하고, 형식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은 과거의 기술이라고 하는 사조가 생긴다. 이런 사조는 고전적 문체를 중시하는 문인들의 사조와 대립 구조를 이루게 된다. 문학이 지식인 중심에서 벗어나 대중화 되면서 그 전달 방식도 변화해야 했다. 그래서 대중소설에서는 일상적인 문장들이 도입되어야 했고, 여기서 작가에 따라 다양한 문어체들이 시도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오자키 고요 또한 소설을 대중화 하기 위해 일상문체를 사용한 사소설을 쓰고자 했는데, 그의 경우 그 문체가 매우 실험적이어서 도마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유난히 "문장" 에 집착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그가 집착한 "문장" 이라는 것도 결국 격식, 형식의 한 요소이다.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신문체라고 하는 새로운 형식미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고전주의와 내용을 중요시하는 자연주의 등이 분리되어 있던 시기에,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하다." 고 하여 형식과 내용을 융합한 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다. 애초에 이 둘이 반드시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자키 고요의 사조에 대해 의고전주의이다 아니다 하는 견해는 모두 옳지도 틀리지도 않고,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보고자 하는 시선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타케노 이모노스케가 말하는 "새로운 쓰기말을 만들어내셨습니다" 라는 견해는 오자키의 형식적 예술성을 극찬한 것이리라.


다시 대화로 넘어간다.


하타케노: 제가 좋아하는 것은 에도의 꽃. 낡아빠진, 잘라내야 할 구폐인, 게다가 얼토당토 않은 소일거리. 그런 것을 위해서 사용하는 기교는 낭비가 아닌가 싶어서요. (p. 141)


「서루조당 파효」만 읽어서는 메이지 시대에 일어난 문예부흥 현상이 어떠한 배경을 갖고 있는지, 그당시의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알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오자키 고요에 대한 하타케노의 칭송도, 점원의 감탄도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와 오자키 고요의 사상에 대해 이해하고 나서야, 이 하타케노의 고민이 왜 이다지도 강렬한 것인지 공감할 여지를 얻게 된다. 조금더 덧붙이자면 메이지 후반기 「소설신수」 이후 전개된 근대문학 사조에는 의고전주의, 낭만주의(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조. 이상을 추구하는 관념성을 가짐[2]), 자연주의(과학적 실증법으로 진실된 인간의 본성을 그리고자 한 사조, 주로 성욕과 관련된 작품이 많음[2]), 관념주의(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모순과 인간 삶의 목적에 중시) 등 다양한 것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흐름 속에서 문하생 하타케노는 자신이 여전히 요괴와 같이 비과학적이고 토속적인 것에 매료되고 마는 것에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하타케노를 서점 주인이 다음과 같이 독려한다.  


주인: 아니 어째서 괴담이 쓸데없는 것이란 말입니까? 사람은 수상한 존재. 세상은 항상 이치로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만은 합리에서 삐져나와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그리려면 괴(怪)를 버리는 것은 편파. 당신이 말하는 요괴 또한 이 세상의 일부, 아니 세상의 절반입니다. (p. 142) 


본문에서 하타케노가 추구하는 것은 '관음력'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불도와 관련된 용어에서 풍겨지듯이 그것은 무언가 신성한 것이다. 그가 오자키 고요에게 이끌리는 것은 본문에도 나와있듯이 "스승님의 신구융합의 문체가 갈고 닦이어서 관음정토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p. 139).  그런데 그가 말하는 '관음력'이라는 건 특히 석가모니의 어머니라고 하는 '마야 부인'과 관련된 것으로 설명된다. 즉 관음력의 '여성성'에 이끌리고 있는 것인데, 이는 하타케노가 어릴 적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으로 인해 애절한 감정을 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타케노가 '요괴'나 '귀신'에 매료되면서도 그것을 배척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은 이러한 귀신, 즉 요사스러운 '여성성' 이미지가 '모성'에 대한 내적 가치와 충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조당 주인은 이에 대해 또 다음처럼 말한다.


주인: 귀신력은 뒤집어보면 관음력. 아까 저는 표리는 일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p. 147)  (중략) 불도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목적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그 자체가 깨달음인 것입니다. 도착한 거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냥 계속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길을 잃어도 걷는 것이야 말로 불도의 수행입니다. (p. 149)


하타케노: 그렇다면 저는 항상 관음력과 함께 있고, 그저 스승님의 등을 표식으로 삼아 문학의 길을 걷기만 하는- 그걸로 충분한 것이군요. (p. 150)


이렇게 해서 하타케노는 자신이 꺼려하면서도 매료되었던 '괴(怪)' 에 대해 쓰기로, 그리고 그 길이 길고 험난하고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아 보여도 꾸준히 걸어나갈 것을 다짐한다. 이 하타케노 이모노스케라는 캐릭터가 바로 훗날의 이즈미 교카이다.


(이즈미 교카)


이즈미 교카(1873-1939)의 대표작인 「고야히지리(1900)」에 대해 드디어 이야기할 때가 왔다. 「고야히지리」는 주인공 '나'가 귀향길 차안에서 알게 된 승려와 나눈 대화를 담고 있다. 승려는 행각 중 어느 고개에 이르렀고, 자기보다 먼저 온 어느 약장수가 산속에 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길을 따라 고개를 오르니, 아름다운 여자와 백치청년이 살고 있는 외딴집이 있었고, 승려는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한다. 승려가 몸을 치료하려고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고 여자가 등을 씻어주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폭포 근처에서 마주친 할아범이 말 한 필을 시장에 팔러 나가고 있었다. 그 날밤 승려는 귀신의 기운을 느끼고 무서워져 경을 외며 아침을 맞았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마을로 내려온 승려는 마을 근처에서 어제의 할아범을 만나는데, 가 할아범이 말하길 외딴집의 여자에게는 남자를 짐승으로 둔갑시키는 마력이 있으며, 시장에 팔린 말은 먼저 간 약장수였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고야히지리 공연 그림 간판, 1904)


(여자와 말. 아마노 요시타카[天野喜] 작 )


승려가 등장하는 점에서 불교의 색체를 띠고 있는 작품인데, 소설의 마지막에는 승려가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고 표현함으로써 승려를 '신성한 것'으로 승화시킨다[1].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에서 이 소설에서 부인은 관음력과 마력을 아울러 가진 존재라고 평하고 있다[1]. 산속 이계(異界) 속의 아름다움과 무서움을 아울러가진 요염한 미녀. 이것이 「고야히지리」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즈미 교카의 '미'가 항상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지만 동시에 그 '미'는 문명이나 문화가 쫓아낸 자연으로 발현한다. 교카가 그리는 이계의 환상이 근대를 비추는 비판성을 가지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1]" 라고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대의 평가'에 기초하여 교고쿠 나쓰히코가 관음력과 귀신력의 역학 관계를 소설 안에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고야히지리」 에서는 관음력과 귀신력이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교카의 내면에서는 관음력과 귀신력 추구에 대한 내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만든 것 아닐까. 본문에서 구시대의 것에 대한 애착과 관심 또한 결국은 글로 표현하여 '현재' 읽는다면 '현재'의 것이 된다고 표현한 것도 위의 인용구와 크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서루조당 파효」에서 하타케노가 "스승의 등을 표식삼아" 라고 한 말도 또한 재미있다. 이즈미 교카의 대표작 중에는 「노래초롱」, 일본말로 가행등(歌行燈)이란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문예사조가 부흥하는 시기에 그 이즈미 교카 역시 「외과실(1895)」이나 「야행순사(1895)」 같은 관념주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1]. 그러나 그는 끝까지 환상문학장르를 포기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길을 외로이 걸어나갔다. 미시마 유키오라고 하는 사람은 '일본의 근대 문학에서 우리를 타계로 데려가 주는 문학은 그밖에는 없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 「나쓰메 소세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에서는 이즈미 교카를 크게 다루지 않았지만, 그 역시 자연주의에 대항하는 문인 집단에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람들이 알고 있고 안주하고 있는 일상의 틈에, 초현실이 얼굴을 내미는 '그 눈깜박할 사이'에 바로 이즈미 교카의 세계가 존립하는 근거가 있다. [1]" 


위에 썼던 조당 주인의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주인: 아니 어째서 괴담이 쓸데없는 것이란 말입니까? 사람은 수상한 존재. 세상은 항상 이치로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만은 합리에서 삐져나와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그리려면 괴(怪)를 버리는 것은 편파. 당신이 말하는 요괴 또한 이 세상의 일부, 아니 세상의 절반입니다. (p. 142)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 에서 말한 "일상의 틈에서 나타나는 초현실세계의 존립 근거"라는 것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합리하고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조당 주인이 구사하는 문장 또한 이즈미 교카의 문학 세계의 가치를 지지하고 있다. 결국 이즈미 교카의 괴(怪) 또한 쓰보우치 쇼요나 스승 오자키 고요가 '인간의 이야기'를 그리고자 한 것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긴 과정을 거쳐왔는데. 나에게 일어난 변화라고 한다면. 메이지 시대와 그 시절 작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그 문학가들에 대한 애정을 솟아나게 했고, 고전작품들을 읽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들게 했다는 점일까. 그리고 또한 「서루조당 파효」의 가치와 매력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심]이 이즈미 교카의 이야기였다면, [궐여]는 메이지 후반기 아동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의 이야기이다. 앞에서 내가 읽었다고 한 네 권의 책에서 이와야 사자나미 역시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고 있다. 마찬가지이다. 「서루조당 파효」 때문에 이와야에게 관심이 생겼고, 네 권의 책은 이와야를 다루는 「서루조당 파효」 를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궐여]에 대해 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1]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 웅진지식하우스. 2011.

[2] 「나쓰메 소세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글로세움. 2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불의 연회 : 연회의 준비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이야기의 시작


주인공 세키구치는 미쓰야스라고 하는 남자의 추억 속의 마을을 취재하기 위해 이즈 지방 니라야마 근방으로 떠난다. 미쓰야스라고 하는 남자는 약 십 몇 년전 니라야마 근처의 헤비토 마을이란 곳에서 경찰로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 이윽고 시간이 흐른 현재에 미쓰야스가 헤비토 마을의 주민들을 다시 찾아갔는데, 마을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미쓰야스의 기억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치 미쓰야스가 알고 있는 헤비토 마을이 애초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세키구치는 이 헤비토 마을의 주민이 과거에 전원 몰살되었을지 모른다는 단서를 토대로, 헤비토 마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니라야마로 떠난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전편 '광골의 꿈'에서 등장했던 아케미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케미는 우연히 자살을 시도한 남자 무라카미를 구하고 집에 데려오게 되는데, 무라카미는 이후 두 번이나 더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케미와 무라카미 앞에 종교단체 같은 집단이 접근한다.


이야기는 다시 세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할아버지가 수상한 종교단체에 가입해서 곤란하다고 하는 여성이 추젠지를 찾아온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일 말고도 과거에 여러번 불행을 겪은 여성인데. 추젠지는 의외의 구석을 파고 든다.



(이야기의 배경, 이즈 지역. 누마즈, 시모다, 후지산 등의 지명이 소설에서 언급된다)



유기적이면서도 단편적이고 적절한 수법들로 흥미를 유발한다


미스테리를 이루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해불가능한 상태가 지속되지만 이성적인 해결이 나지 않는 것. 탐정이 나서서 이성적으로 추리하고 해결을 보는 것. 미스테리라는 말 자체가 수수께끼를 의미하기 때문에 첫번째의 형태만 취해도 미스테리 소설로서의 모양을 갖출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미스테리 소설은 호러소설의 형태를 이루기도한다. 어떤 건 나아가서 탐정소설의 형태를 이루곤 한다. 단연 교고쿠 소설의 묘미는 호러와 추리가 절묘하게 섞여있다는 것이다. 모세혈관이 퍼져있는 것 처럼 밀접하게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개 방식이 놀라울 따름이다.


「도불의 연회 上」은 그 전개방식이 전에 비해 단편적이라 보다 접근하기는 쉽다. 1장부터 3장까지 각각의 이야기는 단일한 미스테리 현상들을 하나씩 갖고 있다. 또 1장과 2장에서는 "해결이 나지 않는 미스테리"를 보여주고, 3장에서는 "미스테리의 전개와 해결"의 구도를 보여준다. 특히나 탐정 추젠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3장은 3장 자체의 사건을 해결시킴과 동시에 1-2장에서 나온 미스테리한 현상들을 한데 엮어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조금씩 내비치면서 다음 下편의 이야기를 기대시키고 있다. 



(벌써 上편에서만 요괴를 셋이나 등장시켜, 미친 스케일이 될 거라고 암시한다)


소설 속에서 약장수가 수상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약장수는 안 그래도 무서운 '존재'라고 한다. 정착하지 않고 행방이 묘연하며, 메고 있는 약통은 망태할아버지를 연상시킨다. 요괴와 약장수의 접점을 파고드는 것도 문화적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건 꽤나 무서운 일이다


교고쿠의 「백귀야행」시리즈는 그 동안 충분히 생리적 혐오감을 자극해왔고, 그래서 효과적인 호러 소설로 기능했다.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보고 "무서워서 못 읽겠다" 라고 하던 사람들도 「도불의 연회 上」만큼은 아직 여유있게 읽을 수 있을 수준이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 소설은 생각보다 무섭다.


형이상학적인 관념 중에 유심론(idealism)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유심론에 따르면 인간과 세계를 이루는 물질적인 것들도 모두 인식적인 환상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마음, 영혼, 비물질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내 손목을 자르면 당연히 피가 솟구치고 고통이 수반될 걸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에 유심론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이 유심론이 무서운 건 우리가 단호히 "그럴 리가 없다"라고 완전 부정하기에는 스스로도 미심쩍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의심이 들면 내면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세계가 실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살아있다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에 대한 무지상태가 되어, 인간 존재의 뿌리가 위태롭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등장인물 중 하나인 향토사가 도지마 세이켄이 이런 유심론적 세계관을 세키구체에게 내비치는데, 도지마가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상대를 제대로 겨냥했다. 세키구치는 심한 울증을 앓는 사람이다. 존재론적 안전감이 흔들리면 세키구치 같은 인간의 자아는 바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세계가 무너진다" 라든지, "자아가 붕괴한다' 라는 현상에 대한 공포심을 효과적으로 자극 당한 것이다. 세키구치의 시점에서 쓰여진 안절부절 못하는 정신 상태는 어지럽고 유치하고, 적나라하다. 마치 정신이상 상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정제하지 않은 형태로 글을 쓰기라도 한 것 처럼.  


과거에 살았던 마을에 십 몇년이 지나 돌아가보니, 자기가 갖고 있는 추억이 모두 왜곡된 것이고,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는 상황 설정. 이 그로테스크한 설정 안에서 도지마의 유심론은 보다 호러의 힘을 발휘한다. 여기에 더해 고개를 내미는 '누벳포'라는 요괴의 존재 또한 그로테스크에 그로테스크를 더해서 호러적인 분위기를 강화시킨다. 그래서 깜짝 놀래키기 라든가, 핏빛 이미지 같이 호러 영화에서 사용할 법한 수단이 없이도 더할나위 없이 이 소설은 생각보다 '무섭다'. 





주인님이 궁금해하셔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감정의 소유자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고서점 주인 추젠지가 "궁금하다" 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내비친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자. 그 동안 주인공들은 사건을 둘러싸고 추젠지를 찾아와 조언을 구했고, 추젠지는 귀찮은 듯이(그러면서도 술술 막힘도 없이) 지식을 방대하게 쏟아냈었다. 


(아니 대체 뭘 모르겠단 겁니까,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알려드리리다 하는 태도랄까)


큰 일 터지기 전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설명만 늘어놓는 스타일이라 "엉덩이가 무겁다"는 말을 듣는 그이지만, 이번 편에서 그가 마미코라는 등장인물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저는 그것이 신경쓰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추젠지가 이렇게 열렬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던 것만 같다. 이 안락의자 탐정을 신경쓰이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전반에 걸친 미스테리한 사건의 정체가 꽤나 궁금해진다. 



탐정이 문제인 건가 


소설이 띄엄띄엄 나오니 느끼기 어렵지만, 소설 속의 시간 배경은 꽤나 촘촘하다. 「도불의 연회 ~연회의 준비~」는  「광골의 꿈」 사건과는 거의 일 년의 간격을 두고 있고,「무당거미의 이치」사건이 일어난지 몇 달 되지 않은 시점에 있다. 등장인물들의 상태를 보아 추측하자면 「도불의 연회」 종료 시점이 「백기도연대 ~나리가마~」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사건이 쉬지않고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명탐정 코난 만큼은 아니라도, '사건을 부르는 힘'이 작용하는 게 분명하다고 웃게 만든다. 시리즈물은 역시 이런 흐름을 읽어내려가는 것도 제맛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없어도 당당하게 빚 많아도 떳떳하게 - 갈수록 가난해지는 99%의 빈곤 탈출 경제학
김철수 지음 / 밥북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현재 우리나라 서민들은 높은 가계 부채와 실업률, 빈부격차 증대 현상으로 허덕이고 있다. 재테크 관련 서적과 강의, 종편 방송들이 넘쳐나는 건 이렇게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 직면한 개개인들이 일확천금의 희망을 갖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지 않을까. 재테크의 노하우를 아는 것이 어느새 교양과 지식의 정도를 가늠하는 것이 된 듯하다. 개개인이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적 수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가치 혼란의 시대에, 지금 어느 것에 투자를 해야 최대한의 이익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쉽지가 않을 것 같다. 

여기 <돈 없어도 당당하게 빚 많아도 떳떳하게> 라는 경제 서적이 있다. 책 제목이나 출판사 서평을 얼핏 보면 이 책이 위에서 한 질문에 대답을 해줄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주식이 답이라거나, 부동산이 정답이다 하는 식의 애널리스트식 해답을 제공할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책 본문을 까보면 이 책이 결국은 "잡아야 할 물고기"를 알려 주는 책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 책은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경제 문제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파악하고 앞으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역사, 철학, 경제학 등을 넘나들며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고 개개인으로 하여금 진실을 분간하는 시민으로의 계몽이라는 소극적 실천과 투표권 행사를 통한 참여라는 적극적 실천을 할 것을 주장한다. 

현재 우리가 처한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일부 부를 독점한 특권 계층들이 경제적 원리의 진실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는 어렵고 복잡한 것이기에 부를 독점한 인간들이 쓰는 교활한 속임수를 일반 대중이 알아차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화폐, 노동, 부동산, 부채 이 4 가지 주제를 가지고서 전 세계 경제가 흘러가는 논리를 설명한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쓰는 미국은 달러 발행과 환율 조정을 통해 전 세계 경제권을 좌지우지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화폐를 실제 발행하는 미국 연방 은행이 그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각 국가의 소수 부자와 권력계층들은(우리나라에선 대부분 정경유착이 되어 있다) 미국 경제 흐름에 맞춰 자국의 경제도 최대한 자신들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주무른다. 무역, 물가상승, 노동비, 실업율, 부동산 가격, 금리 등 주요 경제 요소들이 모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거대한 경제 조절 흐름의 영향을 받는다. 소수 권력자들이 주도적으로 경제를 끌고 가는 과정에서 늘 손해를 입는 것은, 시스템 구조상 일반 대중이자 서민들이라는 것이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가 밝히고자 하는 내용들을 읽다보면 '무엇을 알지 못했는지'를 깨닫게 되고, '알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후회가 생겨난다.

책에서 밝히는 견해들을 모두 접하고 나면 비로소 <돈 없어도 당당하게 빚 없어도 떳떳하게>라는 제목의 의미가 가깝게 와닿는다. 현재 늘어난 가계 부채는 정부가 개개인으로 하여금 빚을 지면서까지 소비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발생한 측면도 있다. 높은 전세값과 낮은 금리는 어쩔 수 없이 빚을 져서라도 집을 구매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자금 대출도 예외는 아니다. 빚진 자가 진정 탐욕적이고 무능하여 빚을 진 것은 아닐 수 있다는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 정치인들의 선거 공략과 국가 정책들로 인해 진정 이득을 보는 건 누구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것. 일개 시민의 비판적 시각을 길러주는 것이 이 책이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책을 다 읽고나서 그 시선이 향하는 먼저 향하는 곳은, 일단 작가 자신이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내력에 대해서 면밀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런 통찰력있는 주장을 책에 써내려간 사람이 일개 논객인지 권위있는 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난데없이 궁금해질 정도로 이 책은 자기주장과 논조가 뚜렷하다. 과거 및 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견해 또한 매우 솔직하다. 외부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이념이나 주류 경제학에 맞서서 당당하게 외치고자 책은 써내려져 갔을 것이다. 소신적 삶과 자아를 관철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 이 책 <돈 없어도 당당하게 빚 없어도 떳떳하게>라고 느껴졌다면, 저자의 의견이 내게도 잘 이해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떠한 요란한 마케팅도 없고 저자 또한 유명인이 아니지만, 이 책의 내용물은 겉 보기보다 값지고 알차다. 사회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에너지를 이 책이 생산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해본다.


** 이 리뷰는 출판사의 증정본을 읽고 자발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화 보기 좋은 날 - 내 가방 속 아주 특별한 미술관
이소영 지음 / 슬로래빗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학창시절의 미술시간의 90%는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거나, 그리거나 하는 실기시간으로 채워져있었다. 나머지 10%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에 대비하여 벼락치기 식으로 미술사를 주입시키는 시간들이었다. 인상파, 낭만파 등등, 암기식으로 미술을 대해왔으니, 미술이 다 뭐다냐, 미술작품이 다 뭐다냐. 미술과목 같은 실기과목이 입시열풍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쓴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 미술시간이 그렇다고 해서 지켜져야 한다고 옹호해줄 만큼 질적으로 충만했던 것 같지도 않다. 여전히 그건 주입식이었고, 실기작품을 내놓아야 점수가 매겨지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를 못했으니까. 결국 미술작품과 작품대 감상자로서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작품을 통해 작가와 감상자가 되어 교감할 기회 또한 당연히 없없던 것 같다.


내 주변엔 어찌저찌해서 미술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왠지 그들 사이에 껴있으면 나만 이질적인 것 처럼 느껴져 미술, 디자인 이런 것들을 더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내게 이론적인 것들은 사실은 지루하고 낯설다. 그래서 가까이하지도 멀리하지도 못하고 있는 '미술'이라는 것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해준 책이 있다. 그게 「출근 길 명화 한 점」이었다.

 

「출근 길 명화 한 점」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라는 것을 알려준 책이다. 이 책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사람의 변화하는 기분에 따라 감상하면 좋을 그림들을 싣고 소개한 작품인데,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보는 사람의 요일별 감정과 공명 함으로써 감성 넘치게 그림을 보는 방법을 알려준 그런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명화 보기 좋은 날」은 「출근 길 명화 한 점」의 후작이다. 「출근 길 명화 한 점」의 제목이 '시간'+'그림'의 순서인 것과, 「명화 보기 좋은 날」의 제목이 '그림'+'시간'의 순서인 것. 별 것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발견.

 

이번「명화 보기 좋은 날」의 테마는 '감정'이다. 책을 구성하는 다음의 part들만 보아도 느낌이 오지 않는가.

Part 1. 마음이 피곤한 날에 Part 2. 열정을 찾고 싶은 날에 Part 3. 누군가 그리운 날에
Part 4. 자신감이 필요한 날에 Part 5. 혼자 있고 싶은 날에 Part 6. 사랑하고 싶은 날에
Part 7. 감성을 키우고 싶은 날에


동일한 감정선상에서 보기 좋은 그림들이 소개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출근길 명화 한 점」에 이어 「명화 보기 좋은 날」을 읽고 드는 생각은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본문의 내용보다도 먼저 실려있는 그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거기서 '무언가를' 느껴보려고 애쓰고 있는 나를 보면서, "참 감수성 없다." 하고 새삼 느끼게 됐다.

그러고나서 본문을 보면서 저자가 그림과 어떻게 교감했는지를 생각해봤다. 저자는 나이를 먹고 그림을 알게되면서 점점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 감정들을 솔직하고 따뜻한 에세이 형식으로 담아냈다.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림을 읽는 데에도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가 필요한 거였다. 이 두 책을 읽고나서 이제서야 그림을 '읽어주는 데'있어서 화자의 감수성과, 또 그것을 맛있게 풀어내는 문장력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인가 느끼게 되었다. 그림과 글이 만난 인문학의 장이 공감력을 이끌고 사람을 감동 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 그 위력을 한 권의 책 안에서 발견한다. 멋진 시도이고, 가치있는 도전이다.

"일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순간은 제가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게 하고,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하며, 미래의 나를 꿈꾸게 합니다. (저자. 프롤로그에서)"


이 책이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그림 초짜인 사람한테 그림과 친근해지고 일상에서 그림을 즐길 수 있는 법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실려있는 작품을 만든 작가의 배경이나 작품 탄생 비화 등의 지식도 무겁지 않게 들려주는 점이 인상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게도 인상적으로 다가온 작품들은 아래와 같다. 아래의 작품들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 자체가, 나를 규정짓고, 나의 본질을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감상'이 가지는 의미는 또한 그런 것이기도 한가보다.

 

클로드 모네. 루엘 풍경. 1858.


모네의 루엘 풍경은 저자의 말처럼 사진을 보는 것 같이 매끄러운 묘사력이 감탄스러운 작품이다. 굉장히 깊고 성숙한 듯 보이는 그림이지만, 인상파 화가 모네가 18살 청소년 시절에 그린 그림이라고 하니 왜인지 풋사과가 연상되는 그림이다. 저자는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누구나 스타트업 시기엔 개성을 찾기 어렵지만 노력과 열정이 차츰 쌓여 자신만의 개성이 확고해질 날이 올 것이라고 격려하는 문장까지 덧붙여 놓았다.

 

에드먼드 찰스 타벨. 나의 가족, 코튀트에서. My family at Cotuit. 1900.


고흐가 해바라기 그리기를 좋아했던 것에서 보이듯, 작가들은 어떤 하나의 소재에 애정을 갖고 거듭해서 작품으로 창조해내곤 한다. 에드먼드에게는 그 소재가 가족이었다고 한다.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는 것도, 창작을 해야 하는 이유도 가족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족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으려 한 에드먼드에게서 애정과 애환이 느껴진다.

 

애니쉬 카푸어, 클라우드 게이트 Cloud Gate. 2006.

이 작품을 처음 본 건 영화 '소스코드'의 한 장면이다. 소스코드에서 주연 제이크 질렌할이 이 클라우드 게이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품에 그를 촬영하고 있을 카메라가 비치지 않는다. 영화 촬영 후 편집을 해서 없앤 걸까, 아니면 금속면의 굴곡이 카메라맨을 교묘히 화면 밖으로 밀어낸 것일까. 실제로 클라우드 게이트 앞에 서본 일이 없으니, 아직도 그건 내게 미스터리다. 만일 시카고 도심에 설치된 이 구름문을 실제로 볼 기회가 생긴다면, 금속면에 반사된 카메라 들이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반드시 사진으로 남기고 말겠지.

 

 

 

앨리자베스 키스. 새해 첫 나들이. New years Sopphing, Seoul. 1921.


동양의 아름다운 세계를 만끽하고 싶다는 열정을 갖고 있던 앨리자베스라고 하는 젊은 여성이 1920년 초기 식민지 시기의 한국을 찾아 그 아름다움에 반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건축물, 일상적인 풍경들은 심플하면서도 알록달록한 화폭에 담아낸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일본의 괴담을 유려한 문장으로 아름답게 그려냈던 서양인 라프카디오 헌의 문학작품들이 생각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서양인이 바라보는 동양의 모습은 우리에게 새로운 감각을 전해준다. 있던 것도 다시 되돌아보게 하고 가치를 재조명하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고 새삼스럽게 감탄하게 된다. 동양인이 표현하는 서양세계도 그들에게 그런 묘한 느낌으로 느껴지는 거려나.

책 안에서 가장 나에게 울림을 준 사람은 다름아닌 헤르만 헤세이다. 나는 이미 「수레 바퀴 아래서」로 인해 그에게 절대적인 영혼의 지지를 보내고 있는 팬이기도 했다만. 책에 실린 그가 했다는 말이 나를 또 다시 흔들었다.


"내가 화가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상세계에 몰두한 가운데 나 자신을

까맣게 잊게 된다는 것은 특이한 체험입니다.

여러 날 동안 나 자신과 세상을 잊고 전쟁과 다른 모든 것을

완전하게 잊었던 것은 1914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알프레트 슐랭커에게 보낸 편지, 「화가 헤세」 중에서)



 

헤세의 문장은 체념도 아니고, 절망도 아닌, 즐거움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마음인 것 같다.그런가. 나도 내가 이제와서 미술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즐기고, 그것에서 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괜찮다는 것을 헤세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됐다. 왠지 목구멍에 무언가 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저 문장이 내게 전달해준다.

마지막으로. 「출근 길 명화 한 점」과 「명화 보기 좋은 날」 두 책 모두에 실린 작품이 있지 않은지 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다.같은 그림을 두고 어떤 글이 오고갔을까. 어떤 테마가 되었든 그림 읽고 싶은 날에 꺼내어 그림과 글의 힘을 느껴보는 시간을 자주 갖고 싶다고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