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루조당 파효 서루조당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서루조당 파효」가 출간되고 약 8개월. 그리고 내가 그 책을 읽은지 3개월이 지났다. 그 3개월은 「서루조당 파효」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들을 읽기까지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서루조당 파효」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일본 고전문학에 대해 탐구하고 싶게 만들었고, 그 추가적인 공부과정은 다시 「서루조당 파효」의 빛나는 문장들을 찾아보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됐다. 순환하고 순환하는 느낌.



헤르만 헤세는 "진정한 독자라면 누구나 설령 책이 단 한권도 새로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존의 보물을 수십 년 수백 년이라도 더 붙들고 계속 씨름하고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책이라도 거듭하여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다가오고 다르게 이해되며 색다른 울림을 일으키게 마련이다"라고도 말했다. 「서루조당 파효」를 읽는 일은 내게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경험이 된 것 같다. 오늘 [두번째탐서. 발심]을 읽으면서 미소짓는 일이 많았고, 그 기분을 간직하려고 아래 나름대로 정리해두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았고, 아는 만큼 느꼈지만, 욕심이 발동하여 여하튼 적지 않을 수가 없다. 

발심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다리 건너는 것을 좋아해서, 그것만을 위해 돌아다닐 때가 있다. (p. 87)"


그러고는 메이지 유신 후 세워진 요로즈요바시[萬世橋]를 건널 때 썩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 시기에 세워진 니혼바시[日本橋] 다리를 건널 때 이것이 하이칼라인가 하고 느꼈던 것 등을 이어서 이야기한다.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에 1919년에 그려진 니혼바시 주변 풍경 엽서가 실려있다. 이 삽화에는 넓은 도로와 서양식 건물들이 새로운 시대로 가는 일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니혼바시가 어딘가하면, 미쓰코시 백화점이 세워진 곳 근처이다. 미쓰코시가 또 어떤 곳인가 하면, 바로 메이지 시대에 예술, 건축, 유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구적이고 모던한 유행을 지휘한 백화점으로, '문화기관'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기관이다. 사람들은 "도쿄의 유행=미쓰코시"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다. (여담이지만 미쓰코시 백화점 부흥 배경에는 식민지인 조선의 쌀을 싼 값에 들여가 자산을 쌓았다는 사실 또한 있다.)


(책에 실린 삽화는 이것과는 다르다)


책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으로 문명이 개화되었고, 1872년에 이미 최초의 철도가 수도 도쿄에 설치되어 사회적 수준에서의 '이동'이라는 현상이 생겨났다[1].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출세의 수단이 '학문'이라고 하는 교육혁명이 일어나, 청년들은 성공이라는 새로운 꿈을 안고 도쿄로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이런 추세에 가장 태생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무사계급이었다고 전한다. 무사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정치상의 이유로 여러 수도와 영토를 오가며 생활하는 공간적 이동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신분제도 폐지로 인해 몰락 위기에 처해있는 집단이기도 하여 도쿄로 몰려드는 성향이 짙었다고 말한다. 청년들에게 급변하는 도쿄의 풍경은 "신시대"와 "하이칼라", "입신출세의 기회"라는 비젼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기능한 것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에 비해 주인공 '나'의 신분이 본래 무사였다는 사실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러한 배경지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출세를 위한 정열을 불태우는 야욕적인 캐릭터는 아니지만, 아무튼지간에 닥치는대로 '읽는다'.  열정을 불태우는 활동은 독서 뿐이 없는 그가 최근에 읽은 소설이 퍽 마음에 들었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읽은 책은 쓰보우치 쇼요가 하루노야 오보로라는 명의로 쓴 '당세서생기질'로, 열 권이 있었다. 듣자하니 열일곱 권이 나와 있다고 하니 (중략) (p.93)"  

쓰보우치 쇼요의 '당세서생기질'은 1885-1886년에 쓰여졌다. 6-7년 전에 출판되었다고 하면 '지금'은 약 1892년이다. 아직 미쓰코시 백화점이 백화점이 세워지는 1904년 이전인 것이다. 쓰보우치 쇼요는 일본 최초로 소설의 의의와 본질을 밝힌 이론서 「소설신수」를 지은 작가이다. 메이지 초기부터 일본 근대문학에 변혁이 일어나, 이전에는 통속적이고 저속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소설 분야에서도 다양한 시도와 발전들이 이루어졌다. 그러한 과정에서 쇼요는 "소설을 예술의 하나로 정의하고, 그것 자체의 가치를 선언[1]"하였다.  쇼요는 인간 심리를 분석하여 사실대로 묘사하는 것이 소설의 의의라고 말하며, 근대 문학이 이러한 사실주의 방향으로 개량되기를 권장하였다[2]. 그리고 쇼요는 사실주의 이런을 실현하기 위해 「당세서생기질」을 썼는데, 풍속적이고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전개시키는 등 실험적으로 소설을 써나갔다고 한다[1]. 이후로도 쇼요는 실험적으로 몇몇 소설을 냈지만, 한계를 느끼고 글쓰기를 포기하였으며, 연극 분야에서의 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다.

다시 「서루조당 파효」의 이야기이다. 무료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마루젠 서점에 들른 주인공 '나'가 점원에게 책을 추천받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독백이 나온다.


"같은 쓰보우치지만 쓰보우치 유조라는 작가의 '신편부운'이라는 책이 있기에 찾아보니, 유조는 쇼요의 실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1 권이라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재미있다고 한다. 그럼 달라고 말하자, 그것은 명의를 빌려준 것이고 작가는 다른 사람이란다. 후타바테이 어쩌고라는 인물인 모양이다. (p.100)"


여기서 말하는 후타바테이가 후타바테이 시메이로, '신편부운'은 「뜬구름(188-1889)」이 아닌가 생각된다. 후타바테이가 쇼요를 찾아가 자신의 문학론을 밝혀 쇼요가 매우 놀란 일이 있다고 한다. 후타바테이는 단지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모사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허상의 본질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1]. 「뜬구름」은 소신껏 살아가는 사람이 직장과 사랑을 모두 잃는 내용의 소설로, 결국 인간의 내적 욕구가 사회적 논리와 현실에 의해 지배되고마는 현실을 어렴풋이 드러내고자 한 작품이다[2]. 신분사회가 철폐되었어도 실질적으로 현실에서는 과거와 현재, 개인과 사회가 부딪치고 있었다. 「뜬구름」이라는 제목도 이러한 문명의 어두운 면과 위태로운 상황을 상징하는 제목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뜬구름」은 또한 소설의 회화 부분에 실제 말하는 것처럼 구어체를 사용하는 방법인 '언문일치체'를 사용한 일본 최초 근대문학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점원은 신문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저는 좋다고 생각하지만, 언문일치를 싫어하는 분도 많은 것 같고, 한문이나 우아한 문장이 취향인 분도 계시고요. 비묘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분도 많은 것 같더군요. 뭐, 앞으로는 오히려 오자키 고요 같은 사람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문장이 아름답기도 하고. 오자키 고요는 말투가 다듬어진 문어체로 쓰는데도 안의 대화가 요즘 쓰는 말투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게 퍽 괜찮습니다. 신문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는 고다 로한도 좋아합니다. (p. 102)"

오자키 고요가 등장했다. 오자키 고요는 1889년 요미우리 신문사에 입사하여 문예란을 담당했다. 그는 신문기사들이 통속적인 것을 다루는 세태를 깨고 신문소설이라고 하는 보다 명확한 지위를 만들었다. '겐유샤'라고 하는 문학집단을 만들어 문학발전과 후배 양성에도 힘썼으며, <가라쿠타 문고>라고 하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에서는 겐유샤의 멤버 와타나베 오토와가 <박문관>이라는 거대 출판기업 회장 오하시 사헤이의 데릴사위가 된 것을 통해 오자키가 거대기업의 파워를 얻었다고[1] 전하지만 사실 오자키와 거대기업간의 연은 이것만은 아니다. 겐유샤 멤버 중에는 이와야 사자나미와 같이 <박문관>은 물론 미츠코시 백화점의 유행연구회에 소속된 사람들도 많았다. 도쿄의 문예 부흥에 있어서 오자키의 지위는 '지식인', '사회 고급계층'과도 같았다는 것이다. 오자키 고요의 작품  「금색야차(1897-1902)」는 남녀의 사랑과 배신을 그려 큰 히트를 쳤고, 신문, 잡지, 연극이라는 문명 수단을 통해 일본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이른바 국민문학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1]. 「금색야차」가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게 1897년이기 때문에 아직 「서루조당 파효」 의 세계 안에서는 「금색야차」는 없었던 것이 된다. 1892년 무렵 오자키 고요가 발표한 소설에는 「두 여승의 참회(1889)」, 「침향 목침(1890)」, 「세 아내(1892)」 등이 있다. 「서루조당 파효」 의 중간에 서점 주인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분이 있다.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 중인 '삼인처(三人妻)'는 잘 읽고 있습니다. (p.122)" 이로써 「서루조당 파효」의 시기가 1892에 가깝다는 게 거의 확실해 진다.


(오자키 고요)


이제 「서루조당 파효」의 장면에서 오자키 고요의 문하생이 등장한다. 그가 스승 오자키 고요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하는 처음 문장은 다음과 같다.

"소설이라는 것의 힘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글은 조루리의 말투에 속어의 대화문을 섞는 독특한 것으로,

(중략), 읊어 보면 아름답고, 판면도 조화롭고 새로워요. (중략)

언문일치라기보다 새로운 쓰기말을 만들어내셨습니다. (p.106)" 

오자키 고요가 새로운 문체를 창조하고자 힘쓴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그가 요미우리 신문에 입사하기 이전 신문기사라고 하는 것은 최대한 빨리 사건을 전달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문장이 저속한 수준이었다. 게사쿠(통속 오락 소설) 역시 저속한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자키는 근대의 소설이 이런 저속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양적 근대 소설과 같이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의 계기가 된 것도 쓰보우치 쇼요의 「소설신수」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 발전의 수단으로 문장 표현법의 개혁을 생각해냈다. 그가 시도한 문장은 고전적인 스타일도 갖고 있었지만, 기호나 활자가 사용되는 등 참신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1]. 그는 문장에 굉장히 집착했고,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문장을 완성할 생각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  그가 지나치게 문장 만들기에만 급급했던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도 있지만, 오자키는 "호들갑스럽게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다른 장르에 맡겨두면 된다." 라고 자기 작품 「작가 고심담(1897)」에서 말했을 정도이다. 이 단 하나의 사실만 알아도 「서루조당 파효」에 나오는 오자키 고요의 제자가 하는 다음의 말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현재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문학운동에도 가세하지 않는,

실로 요괴 같은 무언가를 저는 스승님으로부터 멋대로 배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p.117)" 


이제 장면을 한참 넘어가서, 주인공 '나'와 오자키 고요의 제자, 이른바 '하타케노 이모노스케'라고 하는 두 사람이 조당에서 조당 주인과 대화를 한다. 아래의 대화에서도 여전히 오자키 고요에 대한 설명, 내지는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타케노: 자연주의가 생겨나고, 러시아나 유럽의 문학이야말로 문학의 정통이 되고, 그 흐름 속에서 새로운 표현으로서의 언문일치만이 도마 위에 올려지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게사쿠 소설은 취할 점이 없다고 버려지고 있지요. 제 스승이신 오자키 고요는 이하라 사이카쿠를 더없이 사랑하는 아인이기도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의고전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p. 140)

주인: 모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라는 뜻이군요.

여기서 나오는 의고전주의라고 하는 건 메이지 시대의 문예사조가 서양화 하는 것에 반발하여 고전적인 것의 가치를 중요시한  흐름이다. 의고전주의 작품들은 고전적인 한문체와 테마를 유지하면서도 근대적인 것을 그리려고 했다[1]. 대표적인 작품에 고다 로한의 「오층탑(1891-1892)」이 있다. 고다 로한이라는 이름은 마루젠 점원의 입에서도 언급된 그 이름이다. 점원이 "저는 고다 로한도 좋아합니다." 라고 한 것은 고다 로한의 작품이 바로 의고전주의적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층탑」은 일한혼용체로 쓰여진 작품이며, 무사와 같이 강인한 장인이 탑을 완성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문명 개혁과 근대 문학」에서는 오자키 고요의 작품이 사실주의, 여성적이었던 것에 비해 고다 로한의 작품이 이상주의, 남성적이었다고 평한다[1].

대중문학 형성 시기에 문예인들 사이에 소설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써야 하기에 내용적인 면을 추구해야하고, 형식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은 과거의 기술이라고 하는 사조가 생긴다. 이런 사조는 고전적 문체를 중시하는 문인들의 사조와 대립 구조를 이루게 된다. 문학이 지식인 중심에서 벗어나 대중화 되면서 그 전달 방식도 변화해야 했다. 그래서 대중소설에서는 일상적인 문장들이 도입되어야 했고, 여기서 작가에 따라 다양한 문어체들이 시도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오자키 고요 또한 소설을 대중화 하기 위해 일상문체를 사용한 사소설을 쓰고자 했는데, 그의 경우 그 문체가 매우 실험적이어서 도마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유난히 "문장" 에 집착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그가 집착한 "문장" 이라는 것도 결국 격식, 형식의 한 요소이다.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신문체라고 하는 새로운 형식미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형식을 중요시 하는 고전주의와 내용을 중요시하는 자연주의 등이 분리되어 있던 시기에,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하다." 고 하여 형식과 내용을 융합한 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다. 애초에 이 둘이 반드시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자키 고요의 사조에 대해 의고전주의이다 아니다 하는 견해는 모두 옳지도 틀리지도 않고,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보고자 하는 시선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타케노 이모노스케가 말하는 "새로운 쓰기말을 만들어내셨습니다" 라는 견해는 오자키의 형식적 예술성을 극찬한 것이리라.


다시 대화로 넘어간다.


하타케노: 제가 좋아하는 것은 에도의 꽃. 낡아빠진, 잘라내야 할 구폐인, 게다가 얼토당토 않은 소일거리. 그런 것을 위해서 사용하는 기교는 낭비가 아닌가 싶어서요. (p. 141)


「서루조당 파효」만 읽어서는 메이지 시대에 일어난 문예부흥 현상이 어떠한 배경을 갖고 있는지, 그당시의 작품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충분히 알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오자키 고요에 대한 하타케노의 칭송도, 점원의 감탄도 그다지 크게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와 오자키 고요의 사상에 대해 이해하고 나서야, 이 하타케노의 고민이 왜 이다지도 강렬한 것인지 공감할 여지를 얻게 된다. 조금더 덧붙이자면 메이지 후반기 「소설신수」 이후 전개된 근대문학 사조에는 의고전주의, 낭만주의(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조. 이상을 추구하는 관념성을 가짐[2]), 자연주의(과학적 실증법으로 진실된 인간의 본성을 그리고자 한 사조, 주로 성욕과 관련된 작품이 많음[2]), 관념주의(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모순과 인간 삶의 목적에 중시) 등 다양한 것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흐름 속에서 문하생 하타케노는 자신이 여전히 요괴와 같이 비과학적이고 토속적인 것에 매료되고 마는 것에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하타케노를 서점 주인이 다음과 같이 독려한다.  


주인: 아니 어째서 괴담이 쓸데없는 것이란 말입니까? 사람은 수상한 존재. 세상은 항상 이치로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만은 합리에서 삐져나와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그리려면 괴(怪)를 버리는 것은 편파. 당신이 말하는 요괴 또한 이 세상의 일부, 아니 세상의 절반입니다. (p. 142) 


본문에서 하타케노가 추구하는 것은 '관음력'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불도와 관련된 용어에서 풍겨지듯이 그것은 무언가 신성한 것이다. 그가 오자키 고요에게 이끌리는 것은 본문에도 나와있듯이 "스승님의 신구융합의 문체가 갈고 닦이어서 관음정토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p. 139).  그런데 그가 말하는 '관음력'이라는 건 특히 석가모니의 어머니라고 하는 '마야 부인'과 관련된 것으로 설명된다. 즉 관음력의 '여성성'에 이끌리고 있는 것인데, 이는 하타케노가 어릴 적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으로 인해 애절한 감정을 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타케노가 '요괴'나 '귀신'에 매료되면서도 그것을 배척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은 이러한 귀신, 즉 요사스러운 '여성성' 이미지가 '모성'에 대한 내적 가치와 충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조당 주인은 이에 대해 또 다음처럼 말한다.


주인: 귀신력은 뒤집어보면 관음력. 아까 저는 표리는 일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p. 147)  (중략) 불도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목적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그 자체가 깨달음인 것입니다. 도착한 거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냥 계속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길을 잃어도 걷는 것이야 말로 불도의 수행입니다. (p. 149)


하타케노: 그렇다면 저는 항상 관음력과 함께 있고, 그저 스승님의 등을 표식으로 삼아 문학의 길을 걷기만 하는- 그걸로 충분한 것이군요. (p. 150)


이렇게 해서 하타케노는 자신이 꺼려하면서도 매료되었던 '괴(怪)' 에 대해 쓰기로, 그리고 그 길이 길고 험난하고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아 보여도 꾸준히 걸어나갈 것을 다짐한다. 이 하타케노 이모노스케라는 캐릭터가 바로 훗날의 이즈미 교카이다.


(이즈미 교카)


이즈미 교카(1873-1939)의 대표작인 「고야히지리(1900)」에 대해 드디어 이야기할 때가 왔다. 「고야히지리」는 주인공 '나'가 귀향길 차안에서 알게 된 승려와 나눈 대화를 담고 있다. 승려는 행각 중 어느 고개에 이르렀고, 자기보다 먼저 온 어느 약장수가 산속에 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 길을 따라 고개를 오르니, 아름다운 여자와 백치청년이 살고 있는 외딴집이 있었고, 승려는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한다. 승려가 몸을 치료하려고 계곡물에서 목욕을 하고 여자가 등을 씻어주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폭포 근처에서 마주친 할아범이 말 한 필을 시장에 팔러 나가고 있었다. 그 날밤 승려는 귀신의 기운을 느끼고 무서워져 경을 외며 아침을 맞았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마을로 내려온 승려는 마을 근처에서 어제의 할아범을 만나는데, 가 할아범이 말하길 외딴집의 여자에게는 남자를 짐승으로 둔갑시키는 마력이 있으며, 시장에 팔린 말은 먼저 간 약장수였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고야히지리 공연 그림 간판, 1904)


(여자와 말. 아마노 요시타카[天野喜] 작 )


승려가 등장하는 점에서 불교의 색체를 띠고 있는 작품인데, 소설의 마지막에는 승려가 마치 구름을 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고 표현함으로써 승려를 '신성한 것'으로 승화시킨다[1].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에서 이 소설에서 부인은 관음력과 마력을 아울러 가진 존재라고 평하고 있다[1]. 산속 이계(異界) 속의 아름다움과 무서움을 아울러가진 요염한 미녀. 이것이 「고야히지리」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즈미 교카의 '미'가 항상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지만 동시에 그 '미'는 문명이나 문화가 쫓아낸 자연으로 발현한다. 교카가 그리는 이계의 환상이 근대를 비추는 비판성을 가지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1]" 라고도 언급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대의 평가'에 기초하여 교고쿠 나쓰히코가 관음력과 귀신력의 역학 관계를 소설 안에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고야히지리」 에서는 관음력과 귀신력이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교카의 내면에서는 관음력과 귀신력 추구에 대한 내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만든 것 아닐까. 본문에서 구시대의 것에 대한 애착과 관심 또한 결국은 글로 표현하여 '현재' 읽는다면 '현재'의 것이 된다고 표현한 것도 위의 인용구와 크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서루조당 파효」에서 하타케노가 "스승의 등을 표식삼아" 라고 한 말도 또한 재미있다. 이즈미 교카의 대표작 중에는 「노래초롱」, 일본말로 가행등(歌行燈)이란 작품도 있기 때문이다.


문예사조가 부흥하는 시기에 그 이즈미 교카 역시 「외과실(1895)」이나 「야행순사(1895)」 같은 관념주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1]. 그러나 그는 끝까지 환상문학장르를 포기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길을 외로이 걸어나갔다. 미시마 유키오라고 하는 사람은 '일본의 근대 문학에서 우리를 타계로 데려가 주는 문학은 그밖에는 없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 「나쓰메 소세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에서는 이즈미 교카를 크게 다루지 않았지만, 그 역시 자연주의에 대항하는 문인 집단에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람들이 알고 있고 안주하고 있는 일상의 틈에, 초현실이 얼굴을 내미는 '그 눈깜박할 사이'에 바로 이즈미 교카의 세계가 존립하는 근거가 있다. [1]" 


위에 썼던 조당 주인의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주인: 아니 어째서 괴담이 쓸데없는 것이란 말입니까? 사람은 수상한 존재. 세상은 항상 이치로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만은 합리에서 삐져나와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그리려면 괴(怪)를 버리는 것은 편파. 당신이 말하는 요괴 또한 이 세상의 일부, 아니 세상의 절반입니다. (p. 142)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 에서 말한 "일상의 틈에서 나타나는 초현실세계의 존립 근거"라는 것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합리하고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조당 주인이 구사하는 문장 또한 이즈미 교카의 문학 세계의 가치를 지지하고 있다. 결국 이즈미 교카의 괴(怪) 또한 쓰보우치 쇼요나 스승 오자키 고요가 '인간의 이야기'를 그리고자 한 것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것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긴 과정을 거쳐왔는데. 나에게 일어난 변화라고 한다면. 메이지 시대와 그 시절 작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그 문학가들에 대한 애정을 솟아나게 했고, 고전작품들을 읽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들게 했다는 점일까. 그리고 또한 「서루조당 파효」의 가치와 매력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발심]이 이즈미 교카의 이야기였다면, [궐여]는 메이지 후반기 아동문학가 이와야 사자나미의 이야기이다. 앞에서 내가 읽었다고 한 네 권의 책에서 이와야 사자나미 역시 중요한 인물로 다뤄지고 있다. 마찬가지이다. 「서루조당 파효」 때문에 이와야에게 관심이 생겼고, 네 권의 책은 이와야를 다루는 「서루조당 파효」 를 더 좋아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궐여]에 대해 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1] 「문명 개화와 일본 근대 문학」 웅진지식하우스. 2011.

[2] 「나쓰메 소세키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글로세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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