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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불의 연회 : 연회의 준비 - 상 ㅣ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이야기의 시작
주인공 세키구치는 미쓰야스라고 하는 남자의 추억 속의 마을을 취재하기 위해 이즈 지방 니라야마 근방으로 떠난다. 미쓰야스라고 하는 남자는 약 십 몇 년전 니라야마 근처의 헤비토 마을이란 곳에서 경찰로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 이윽고 시간이 흐른 현재에 미쓰야스가 헤비토 마을의 주민들을 다시 찾아갔는데, 마을 사람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미쓰야스의 기억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치 미쓰야스가 알고 있는 헤비토 마을이 애초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다. 세키구치는 이 헤비토 마을의 주민이 과거에 전원 몰살되었을지 모른다는 단서를 토대로, 헤비토 마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니라야마로 떠난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전편 '광골의 꿈'에서 등장했던 아케미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케미는 우연히 자살을 시도한 남자 무라카미를 구하고 집에 데려오게 되는데, 무라카미는 이후 두 번이나 더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케미와 무라카미 앞에 종교단체 같은 집단이 접근한다.
이야기는 다시 세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할아버지가 수상한 종교단체에 가입해서 곤란하다고 하는 여성이 추젠지를 찾아온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일 말고도 과거에 여러번 불행을 겪은 여성인데. 추젠지는 의외의 구석을 파고 든다.

(이야기의 배경, 이즈 지역. 누마즈, 시모다, 후지산 등의 지명이 소설에서 언급된다)
유기적이면서도 단편적이고 적절한 수법들로 흥미를 유발한다
미스테리를 이루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이해불가능한 상태가 지속되지만 이성적인 해결이 나지 않는 것. 탐정이 나서서 이성적으로 추리하고 해결을 보는 것. 미스테리라는 말 자체가 수수께끼를 의미하기 때문에 첫번째의 형태만 취해도 미스테리 소설로서의 모양을 갖출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미스테리 소설은 호러소설의 형태를 이루기도한다. 어떤 건 나아가서 탐정소설의 형태를 이루곤 한다. 단연 교고쿠 소설의 묘미는 호러와 추리가 절묘하게 섞여있다는 것이다. 모세혈관이 퍼져있는 것 처럼 밀접하게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개 방식이 놀라울 따름이다.
「도불의 연회 上」은 그 전개방식이 전에 비해 단편적이라 보다 접근하기는 쉽다. 1장부터 3장까지 각각의 이야기는 단일한 미스테리 현상들을 하나씩 갖고 있다. 또 1장과 2장에서는 "해결이 나지 않는 미스테리"를 보여주고, 3장에서는 "미스테리의 전개와 해결"의 구도를 보여준다. 특히나 탐정 추젠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3장은 3장 자체의 사건을 해결시킴과 동시에 1-2장에서 나온 미스테리한 현상들을 한데 엮어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조금씩 내비치면서 다음 下편의 이야기를 기대시키고 있다.

(벌써 上편에서만 요괴를 셋이나 등장시켜, 미친 스케일이 될 거라고 암시한다)
소설 속에서 약장수가 수상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약장수는 안 그래도 무서운 '존재'라고 한다. 정착하지 않고 행방이 묘연하며, 메고 있는 약통은 망태할아버지를 연상시킨다. 요괴와 약장수의 접점을 파고드는 것도 문화적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건 꽤나 무서운 일이다
교고쿠의 「백귀야행」시리즈는 그 동안 충분히 생리적 혐오감을 자극해왔고, 그래서 효과적인 호러 소설로 기능했다.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보고 "무서워서 못 읽겠다" 라고 하던 사람들도 「도불의 연회 上」만큼은 아직 여유있게 읽을 수 있을 수준이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 소설은 생각보다 무섭다.
형이상학적인 관념 중에 유심론(idealism)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유심론에 따르면 인간과 세계를 이루는 물질적인 것들도 모두 인식적인 환상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마음, 영혼, 비물질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내 손목을 자르면 당연히 피가 솟구치고 고통이 수반될 걸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에 유심론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이 유심론이 무서운 건 우리가 단호히 "그럴 리가 없다"라고 완전 부정하기에는 스스로도 미심쩍인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의심이 들면 내면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세계가 실은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살아있다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에 대한 무지상태가 되어, 인간 존재의 뿌리가 위태롭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등장인물 중 하나인 향토사가 도지마 세이켄이 이런 유심론적 세계관을 세키구체에게 내비치는데, 도지마가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상대를 제대로 겨냥했다. 세키구치는 심한 울증을 앓는 사람이다. 존재론적 안전감이 흔들리면 세키구치 같은 인간의 자아는 바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세계가 무너진다" 라든지, "자아가 붕괴한다' 라는 현상에 대한 공포심을 효과적으로 자극 당한 것이다. 세키구치의 시점에서 쓰여진 안절부절 못하는 정신 상태는 어지럽고 유치하고, 적나라하다. 마치 정신이상 상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정제하지 않은 형태로 글을 쓰기라도 한 것 처럼.
과거에 살았던 마을에 십 몇년이 지나 돌아가보니, 자기가 갖고 있는 추억이 모두 왜곡된 것이고,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는 상황 설정. 이 그로테스크한 설정 안에서 도지마의 유심론은 보다 호러의 힘을 발휘한다. 여기에 더해 고개를 내미는 '누벳포'라는 요괴의 존재 또한 그로테스크에 그로테스크를 더해서 호러적인 분위기를 강화시킨다. 그래서 깜짝 놀래키기 라든가, 핏빛 이미지 같이 호러 영화에서 사용할 법한 수단이 없이도 더할나위 없이 이 소설은 생각보다 '무섭다'.
주인님이 궁금해하셔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감정의 소유자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고서점 주인 추젠지가 "궁금하다" 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내비친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자. 그 동안 주인공들은 사건을 둘러싸고 추젠지를 찾아와 조언을 구했고, 추젠지는 귀찮은 듯이(그러면서도 술술 막힘도 없이) 지식을 방대하게 쏟아냈었다.

(아니 대체 뭘 모르겠단 겁니까,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알려드리리다 하는 태도랄까)
큰 일 터지기 전엔(?)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설명만 늘어놓는 스타일이라 "엉덩이가 무겁다"는 말을 듣는 그이지만, 이번 편에서 그가 마미코라는 등장인물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저는 그것이 신경쓰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추젠지가 이렇게 열렬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던 것만 같다. 이 안락의자 탐정을 신경쓰이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전반에 걸친 미스테리한 사건의 정체가 꽤나 궁금해진다.
탐정이 문제인 건가
소설이 띄엄띄엄 나오니 느끼기 어렵지만, 소설 속의 시간 배경은 꽤나 촘촘하다. 「도불의 연회 ~연회의 준비~」는 「광골의 꿈」 사건과는 거의 일 년의 간격을 두고 있고,「무당거미의 이치」사건이 일어난지 몇 달 되지 않은 시점에 있다. 등장인물들의 상태를 보아 추측하자면 「도불의 연회」 종료 시점이 「백기도연대 ~나리가마~」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사건이 쉬지않고 연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명탐정 코난 만큼은 아니라도, '사건을 부르는 힘'이 작용하는 게 분명하다고 웃게 만든다. 시리즈물은 역시 이런 흐름을 읽어내려가는 것도 제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