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산들의 꼭대기
츠쯔졘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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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룽산 산꼭대기에 서서 뭇 산들에 눈을 돌려 온통 물든 숲들을 바라보면 산속 모든 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꽃나무가 되었다고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서리가 만들어낸 찬란함은 아름다운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그 머리와 꼬리를 얼마 흔들지 못하듯 오래가지 못했다. p.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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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 속 비천한 인물들이 각자 자신만의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견뎌냈다. -작가의 말 중-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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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지기 전 마지막 여유를 부리며 선택한 책이 뭇산들의 꼭대기이다. 도서관에 신청한 책이 평소보다 일찍와서 일찍 읽고 반납하자 싶었다. 집과 투명이 상대적으로 중국의 현재를 보여주는 소설이었다면 뭇 산들의 꼭대기는 사회변혁의 시기에 나타나는 여러 사회문제를. 개인에 끌어내려 그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입체적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등장인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룽산과 겨워강이 흐르는 ‘룽장진’이라는 조용하고 개발이 미치지 못한자연이 보존된 지역을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총 17장의 쳅터를 보다보면,자연스럽게 관점은 각 장속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에게로 온 마음이 다 이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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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지 않은 이야기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사실 한 인물 인물을 따로 때놓게 이야기를 하라고하면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의 상상력을 덧붙여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인물의 등장횟수나 이야기에 할애된 페이지와 상관없이 가장 인상에 남는 인물은 나는 ‘안다잉’과 ‘탕한청’ 정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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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속에는 도축업자, 죽음을 예측하는 비석공예자, 염습사, 그리고 사형장의 네 인물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의례 이들의 직업에서 사람들은피 냄새를 맡고 스치기를 꺼려하지만 그들 나름 자신의 삶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ㅍ사람들과 부대끼는 모습을 작가가 무척 잘 이야기하고 있다. 아래의 인용부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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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으로 만지다 망자의 얼굴을 아프게 긁지는 않을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손을 돌보고 아꼈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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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장의 이야기를 듣고 리쑤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안핑의 손은 사람을 총살한 손이긴 하지만 그들의 원하는대로 가게 해주었으니 덕을 쌓은 것이라 했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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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제 인물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사실적이지만 신화적 묘사를 통해 약간은 구비문학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도 이야기를 하였지만, 사회변혁의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현재에서 과거로 플래시백을 이용해 글을 씀으로써 읽는 독자는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이 얽히고 설켜 전체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한 개개인을 통해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들이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방식, 그것을 고백하는 방식, 그것을 달게 치르는 모습들의 사랑과 질투, 죄책감,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단박에 그려낸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행간사이의 이야기가 너무 많은 소설인 것이다. 탕메이와 천위안의 이야기만으로도 몇 십장은 더 할애가 될 것 같았고 안쉐얼이 정령과 같은 자연에서 한 아이에게로 삶의 중심이 바뀌는 부분도 단편으로 써내려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단편과 장편은 전달하는 방식도 다 다르지만 이 소설은 그야말로 단편이자 장편이 될 수 있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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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막 태어난 지금 시대를 넘어 뛰어난 대작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이정도면 충분했다.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은 단칼을 휘두르듯 표현이 되고 애둘러 표현하는 부분도 없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나머지 이야기는 내가 그려보게 된다는 것이 소설이 내게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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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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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시간 속에서 산다. 어떻게 보면 공간속에 존재하는 삶이지만 인간은 공간속에 산다는 말보다는 시간속에 산다는 말을 하곤 한다. 시간은 한 인간의 바깥에도 존재하고 내적으로도 존재한다. 그로 인하여 인간은 때로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때로는 영원한 시간속에 존재하기도 한다. 한 인간의 삶은 그의 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끝이 있으나 자연은 스스로 죽어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새로운 존재이나 명명을 이어간다. 이로 인하여 인간과는 다른 상대적 시간을 산다. 
     
낯선 작가를 만났고 낯선 소설을 만났다. 아마도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유사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제목이 주는 웅장함, 태고의 풍경 이미지 덕분에 이 책의 시작에서부터 반전을 겪었다. 첫 시간을 넘기고 난 뒤 나타난 게노페파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시대의 시간을 먼저 인지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등장한다. 그것은 신의 시간에서 시작하여 천사의 시간, 사람들, 땅, 나무, 집과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시간을 다룬다. 책을 읽다보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의 시간들이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처음에는 읽어나가면서 앞에서 다룬 누군가의 시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작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도 혹은 타인과의 전후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으로 독자로 하여금 흥미로움을 유발하게 한다.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책이 얼마나 재밌게 읽어지는지 이 책을 읽는 동안 함께 읽던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못내 끝까지 못 읽은 것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이렇게 돌아가면서 나오는 시간 순서대로 읽고 각각의 시간들을 따로 읽어볼까 하는 맘으로 읽으면 어떻게 읽혀질지 궁금하여 엑셀을 이용해서 그들의 각자의 시간의 흐름을 정리하여 살펴 보았다. 사실 어려운 작가의 이름은 아직 보지 않고는 한 번에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흑백사진 속 웃는 모습은 각인이 되어 있다. 무언가 동화작가 같기도 하고 무언가 나만이 발견한 흥미로움을 간직하고 그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정말 세상의 신비에 경이가 찬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런 그녀가 쓴 소설은 신화적, 환상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님에도 리얼리즘의 요소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시간적 배경의 근간에는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한 1차대전 시작 전 게노페파의 시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손녀 아델카의 시간이 되는 1980년의 시간을 다루지만,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하기 위하여 신이 만든 세상, 자연이 존재하는 시간, 인간의 고통과 영원한 꿈을 꾸는 시간, 그리고 현존을 거듭한 이후 얻은 안식과 같은 다양한 시간을 통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꿈의 시간들을 다루곤 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인간의 눈으로 보여진 세상만이 전부가 아닌 땅을 딛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 하늘을 배경삼아 존재하는 천사와 죽은자의 시간 속에서 삶이 끝난 후 삶에 대한 인식을 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살아간 인간의 생을 다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근간을 이루는 것을 나는 여인들의 삶으로 보았다. 이 소설속에는 삼대에 걸친 이야기가 존재한다. 게노페파와 크워스카의 첫만남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인간적인 삶과 자연의 삶에 가까운 그녀 두 사람의 삶은 여러면에서 대조가 되지만 게노페파의 시간의 물줄기를 따라가다보면 여인으로서 아이를 임신하고 육체적으로 이끌리는 정인을 만나며 이후 그 사람을 잃은 후 영원히 걸을 수조차 없어져버린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크워스카의 삶은 버려진 아이가 삶의 모든 고초를 겪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게노페파가 육체의 삶을 빌어 이루어나가는 모든 것과 달리 동물과 식물과 함께 살아가며 이 책에서 나쁜인간, 익사자 물까마귀와 같이 가장 신화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그리고 남성으로서 포피엘스키의 등장은 모든 것을 가진 물질에 속한 자이나 그 모든 것의 허무와 비관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포피엘스키의 시간은 어디서부터 왔느지를 묻는 질문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으나, 한 랍비를 통해 어디로 가야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받은 다음부터는 그만의 시간(게임의 시간)을 찾아 떠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첫 세대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들은 이후 세대와의 삶의 배경, 시간이 겹치는 순간까지 함께 하지만 그들의 삶의 큰 물줄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다.
     
그러나 다음 게노페파의 딸 미시아의 삶, 미시아 남편의 누나인 파푸가 부인의 삶, 크위스카의 딸 루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어머니들의 삶의 풍경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간의 주인공은 미시아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이 책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굴곡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가장 평탄하게 보이기도 한다. 비록 전쟁을 겪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두 여인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전형적인 가사일을 담당하는 여인으로서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남편이나 자식들에게서 조차 함께할 시간이 없었던 파푸카 부인의 시간을 살펴보다면 시간이 얼마나 자비롭지 않은지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루타의 삶은 한마디로 전쟁이 여자와 아이들에게 있어 얼마나 ‘악’에 속하는 영역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는 전쟁과 그리고 제대로 되지못한 남편으로 인한 억압된 삶에서 태고의 삶을 떠나 경계 밖으로 나간 유일한 여인이기도 하다. 그어느 누구의 삶보다 루타의 삶이 그리고 병사 쿠르트의 삶을 보다보면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희생자임을 알게 된다.
     
최근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전쟁과 평화, 적과 흑 등 전쟁이 남긴 많은 이야기에 관련하여 책을 읽었다. 마가렛 미철이 쓰는 전쟁에 관한 역사소설이 주는 의미는 그간의 역사소설들과 좀 다른 면이 있었는데 올카 토카르추크의 소설도 읽다보면 그녀가 죽은자들의 행렬, 이반 무크타의 나 쿠르트의 삶 등을 통해 아주 강렬하게 그 모습을 각인시켜 준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아직 언급하지 않은 이지도르나, 미하우, 파베우 보스키 등의 삶 또한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길게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태고의 시간은 결국 이들의 삶이 하나의 공간속에 모여진 시간이다. 태고는 비록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공간이지만 그곳이 어디즘인지 우리는 읽는 동안  그려낼 수 있다. 그곳이 어디이든 우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가장 중심지의 삶이고 각자 시간의 흐름속에서 자신들만의 의미를 찾기도 하고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가상의 공간일지라도 우리는 폴란드의 어느 마을을 그려낸다. 세계대전의 가장 직접적이고 큰 피해를 겪은 나라이기도 하고, 이후 사회주의 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또다른 감시의 세상을 살아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끝의 삶에는 오래전 마을을 떠난 아델타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결국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델타의 삶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언제나 소중히 간직했던 커피 그라인더는 그녀는 가고 없지만 그녀들이 소유한 그라인더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의 삶보다 때로는 더 영속성을 갖는 이 사물을 작가는 우리에게 왜 등장을 시킨 것일까. 왜 작가는 창조를 한 신이 그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외면 당해 파괴하는 순간에 이르기 까지 도대체 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것만 같다. 나는 그녀가 이 소설에서 많은 등장인물의 삶을 다루면서도 순간순간 등장한 보리수의 시간, 버섯균의 시간 등을 통해서 죽음의 생 까지도 다르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시간 속에서 물질적 부, 야망을 향한 꿈을 꾸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과거의 시간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책의 곳곳에 죽음을 배치하였다.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시간을 작가는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지도 이야기하고, 그런 인간의 시간과 대조되게 자연을 통해 인간이 시간을 소유해야 하는 방식 등을 버섯균을 통해서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기에 우리에게 시간은 삶으로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까지. 이책에서 시간에 관하여 어떤 의미를 더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야기를 조합할때마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 무의식속의 원형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작가의 다른책도 바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이번기회를 통해 만나게 되길 희망한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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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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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적기 위해 다시 읽은 ‘빛의과거’.. 이번엔 그 때보다 좀더 ‘비관’에 대한 부분이 더 확실하게 보였다. 처음 읽었을 때는 사람들의 면면을 읽고 이 사람은 이렇구나 저사람은 저렇구나라고 읽었고,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 섞여 살아가면서 겪게되는 일, 현상에 집중되어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읽은 책에서 그 현상너머 작가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결국 왜 사람마다 다른 삶의 태도를 형성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보이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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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주어진 동일한 과제를 수행하는 예로 들어보자. 표면적인 경우만 봤을 경우 어떤사람은 아무일 없이 그 일을 해낸다. 어떤사람은 순간순간 그 일이 힘들어 죽겠다고 징징된다. 어떤사람은 정말 쥐어 짜듯 자기는 너무 힘이 든다고 이야기를 한다. 나는 사실 그게 너무도 궁금했다. 왜 동일한 일을 하는데 누군가는 그것이 정말 힘들지 않아서 힘들다 소리를 안하는 것인지, 누군가는 정말 힘들다면 그것이 힘든 이유는 무엇인지.. 이것은 과연 그러면 일을 처리내 해는 역량의 차이인지,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오롯이 나만의 몫이었다. 십년을 함께 일해온 동료들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그것은 그들의 살아온 방식, 경험과 모든 것을 영향을 미치고있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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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작가님의 ‘빛의 과거’는 삶에서 정점을 찍은 후 하강곡선을 타고 묵묵히 내려가는 삶을 보고 있는 김유경이라는 화자와 끝내 정점이 어딘지도 모른 채 오르고자 하는 또다른 화자 김희진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때 젊음의 시기를 지나온 인간 군상,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 젊음의 시기를 지나 60이라는 시절이 오기 전까지의 과거의 삶이 우리 앞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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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무력감, 소외감, 지의식, 두려움, 자괘감, 무시, 비굴함, 수치심, 자기위안, 박탈과 결핍, 상실과 비교... 그리고 이러한 말들과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는 것들, 그리고 그 사이의 것들은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이러한 감정들은 고독과 가난, 지인들로부터 받은 모욕, 차벽, 폭력 등으로 형성되어 온 것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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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궁금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똑같이 경험한 삶을 파괴적으로 혹은 비관적으로 이끄는 누군가, 그것을 삶의 근간을 이루어 간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왜 낙관적으로 생산적으로 살아내는가, 그러니까 누군가는 이러한 모든 것을 손톱밑에 박힌 가시처럼 아픔을 느끼고,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을 사소함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관과 자기외면의 다른 면 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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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삶의 근간에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에 대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그것들을 경험한 것 자체가 인생에 드러워진 장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과정에서 자기연민이나 자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자기인식을 명확히 해서 전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만이 진정 삶의 승자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은희경 작가님의 소설이 나에게 준 메시지는 결국 그러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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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이 소설에서 세세하고 디테일한 이야기의 조각들, 한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삶의 경험,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누구도 일부러 준 사람은 없지만 박탈을 경험하는 김희진과 같은 사람, 누구도 자신의 삶에서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가진 약점으로 인해 살아갈 방법을 택한 김유경과 같은 사람, 그리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았던 그녀들의 이야기들 속에서 나 자신의 면면도 들여다 보게 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슬픈 건 담담하게 살아온 그 삶에 스며든 체념과 이른 포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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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은희경 작가님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첫 장편소설과 가장 최근 장편 소설을 읽고 그녀를 영원히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누군가를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이해를 하려고 하는 일 조차 그건 어디까지나 내 해석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금 새겨본다. 피드에 밑줄 그어 옮겨놓은 문장이 가득하지만 다시 읽으면서 또 옮기고 싶은 글들이 가득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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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일러스트 특별판, 양장)
브램 스토커 지음, 페르난도 비센테 그림,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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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이렇게 선물같이 일러스트판으로 나왔다. 2도 인쇄도 너무 맘에 들고 내용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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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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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의 사전적 정의는 품성이 어질고 착한이고, ‘차별주의자’에 대한 정의는 개인과 개인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동등하지 못한 대우나 권리를 인정하며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말은 역설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형용 모순이다. 그럼에도 갑자기 왜 난데없이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선량한 이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우리사회 혐오와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과는 반대의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썼는지도 모르겠다. 사회 구조적 차별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차별에 무감한 사람들이 갑자기 차별주의자로 소환이 되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차별주의자와는 달리 이들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차별이 만연한 세상 속에 살다보니 그렇게 된 선량한 시민들의 의식저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읽은 이 책을 잘 읽었다고 하니 차별에 대하여 인식 전환을 일으킨 것만으로 이 책은 의미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선량한과 차별주의자를 엮어 새로운 용어가 나타난 것이 약간은 불편한 마음이 든다. 내용적 측면에서는 구심점이 없이 사실 산만하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내가 도대체 이 책에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뭐가 있어서 이렇게 정신이 없나 싶었는데, 무언가 이야기를 하다 말고 전환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을 책을 마치는 순간까지 하게 되었다. 이 책을 다 본 후 ‘이상한 정상가족’을 연이어 보고 있는데 앞문맥과 뒷문맥의 연결이 말끔하지만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사실 툭툭 던지는 문장들이 너무 많고 성소수자, 다문화, 장애인, 여성, 인종 등 많은 부분을 섞어 다루다보니 사회의 구조적 측면, 제도적 측면, 인간의 인식적 측면, 교육적 측면 등 구분되어 제시를 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의 변화와 태도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이 책이 그 단계마다 깊이를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왜 법으로 제정 될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실질적 평등에 이르는 길에 대한 부분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나는 솔직히 기대만큼 아쉬운 부분이 많은 책이었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하여 저자가 말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일 자체가 향후 어떻게 인간의 행동변화까지 이끌어 내게 될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야기를 하였고 그로 인하여 단 한명이라도 변화가 된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서있는 곳이 달라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그 일을 한 편에서는 법과 제도로 해결되기를 바라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법리적 해석과 교육과 인문학적 사고의 향상을 바라는 마음을 저자와 다르지 않다.

인간의 마음을 다루고 싶었다면 우리의 마음을 좀 더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깊이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몇 해 전 시설에서 나온 장애인이 원룸에 입주를 하려고 하는데 원룸에 사는 사람들이 자보까지 붙여가며 입주를 막은 일이 있다. 자신의 주거권은 권리이고 타인의 주거권을 막는 것은 무슨 짓인지, 그러나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지칭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을 위해서 글을 썼다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처럼, 조금 간명하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핵심을 이야기를 하는 책이었으면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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