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舊勢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쁘라도 미술관이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케스나 고야를 바라보고있는 중에 이 간단치 않은 이해를 무조건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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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하더라도 가령 만인이 다 아는 명화라 할망정 필요 여하에 따라서는 단속이나 말썽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않는 암우(暗愚)한 감성이 그곳에서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니! 그 말은 곧 이 그림에 그려진 살육과 저항 모두가 그곳. 다시 말해서 나의 조국에 현실적으로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위대한 예술은 동시에 위대한 선전물이다. 거의 2세기 전에 그려진 한장의 그림이 그 작가하고는 아무런인연이 없는 극동의 한 나라의 관헌들로 하여금 자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부당하고도 잔혹한 일들을 연상케 하고, 그래서불안한 기분을 일으키게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그림의위대함을 증명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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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라도 미술관에는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군의 시민학살을 고발한 고야(Francisco Jose de Goya)의 1808년 5월 3일, 쁘린시뻬 삐오 언덕의 총살」이 있다. 삐까쏘는 이 그림의 구도(構를 빌려, 조선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곧 내가 태어나던 그해에 조선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그것은 지금 빠리의 삐까쏘 미술관에 있다.
멀리 마드리드에까지 달려와서 게르니까」를 마주하고 선 그때나의 가슴에 되살아나는 것은 아직도 생생한 ‘광주 사건‘의 기억이었다. 이때로부터 불과 3년 전, 1980년 5월 한국 광주시에서는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다수의 학생과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학살되었던 것이다.
굴욕을 당하고, 수탈을 당하고, 살육을 당해온 우리 민족은 과연 우리들 자신의 게르니까」를 산출해냈는가, 군국 스페인 5백년의 공포와 중압이 삐까쏘를 낳았다고 할 때, 우리 민족에게 가해지고 있는 고통은 아직 가볍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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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자전거 도둑 같았어, 하고 누이가 말한 것은 데 씨까 감독(Vittorio De Sica : 2차대전 후 이딸리아에서 네오레알리슴을 주도한 감독이자 배우 「자전거 도둑」은 대표작의 하나-옮긴이)의 이딸리아 영화 얘기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누구나 암표라도 사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할 도리도 없어서 어머니와 누이는 두시간 뒤에 있을 열차를 타기 위해 다시긴줄서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고 누이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유람하러 다니는 외국여행에서 당하는 얼마간의 고생 따위는 어머니가 겪은 회한과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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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내 삶이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고, 나의 미래를 자신의 현재라 여긴다. 어른들은 학생을 만나면 사람으로 보지 않고, 어떤 시절이라고 믿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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