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00세 할머니 약국
히루마 에이코 지음, 이정미 옮김 / 윌마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세 할머니 약국>의 서평단 모집은 창고형 약국의 등장과 이에 대한 약사회의 반발을 접한 시기와 맞물린다. 정당해 보이는 그들의 대의명분을 그들은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 되묻고 싶다. 지난 몇 년 그리고 앞으로도 부득이하게 계속 들락날락할 수밖에 없는 약국이다. 이를 통해 체감한 이미지는 약사라기보다 약팔이였다. 약의 부작용을 묻는 질문에 받은 답변이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다", "의사의 처방을 믿어라"였다. 한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 없지만, 의약 분업 문구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구호는 약은 약사에게 구입하는 선에서 끝났다. 약국의 봉투에 기록된 부작용과 설명이 드라마틱한 변화이다. 이것만으로 약사의 임무는 끝인 건가? 비급여 항목의 약은 봉투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사의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00세 할머니 약국>에 빗대어 국내 약사의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싶었다. 이런 독기를 가지고 약사 히루마 에이코의 에세이를 시작했다. 100세라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책을 펼치고 글귀를 담는 순간, 그냥 할머니의 다정한 조언을 듣는 기분이다. 가슴속의 응어리는 시나브로 흩어지고, 세월은 견디고 살아남은 한 사람의 귀한 철학을 접한다. 


23년생 히루마 할머니는 1945년 도쿄 대공습의 폐허를 눈에 담은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녀가 간간이 들려주는 전쟁의 참상은 80년이라는 시간의 약을 처방받고도 여전히 놀랍고 생생하다.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무게는 달라진다. 히루마 할머니의 말처럼, 노년은 살아남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노화를 인간의 퇴행이 아니라 생존의 승리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깊이 공감한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을 결코 창피한 일도, 미안한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그 일이 가능한 누군가에게 부탁하면서 따뜻한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이로서 새겨듣고 싶다. <100세 할머니 약국>을 읽으면, 할머니 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에 젖어든다. 


출처도 근거도 없는 조언이지만, 이상하게 귀가 솔깃해진다.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에 반항심은 스르르 사라지고,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진다. 유명한 철학서나 자기 계발서에서 볼 수 없는 "나만을 위한 애정"이 느껴진다. 히루마 에이코 할머니의 진짜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표지 속 그림처럼, 백발이 성성한 푸근한 할머니가 애정을 듬뿍 담아 건네는 인생 조언들로 가득한 <100세 할머니 약국>이다. 


약사로서 역시 다정다감한 할머니이다. 파스를 구입한 고객에서 "붙여드릴까요?"라며 제안하는 장면은 신선한 충격이다. 1인 가구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 혼자 산다> 예능 방송에서 샤이니의 키가 홀로 파스를 붙이는 일을 희화한 적이 있지만, 사실 마냥 웃고 넘어갈 수 없는 애환이 담긴 에피소드이다. 창고형 약국의 등장에 규탄할 것이 아니라, 약사의 자기 검열이 필요하다. <100세 할머니 약국>에서 길을 찾아도 무방하다. 할머니의 다정함에 감화된 독자의 독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책장을 덮는다. 앞으로의 삶이 마냥 힘들지 않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나는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지?‘,

‘왜 나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걸까?‘

하고 스스로를 몰아세워 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어요.

‘왜?"라는 질문은 답하기 힘든 질문과

같아서 괴로움만 줄 뿐입니다.

중략



먼저 스스로를 용서하세요.

내가 나의 편이 되어주는 겁니다.

중략



그러니 자신을 향해 던지는 말은

반드시 스스로를 보듬고

격려하는 말로 바꿨으면 합니다. - P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이 스도쿠 스프링북 1~2 세트 - 전2권 - 집중력과 사고력을 키워 주는 두뇌계발 숫자 퍼즐 어린이 스도쿠 스프링북
BRAIN PLAY LAB (브레인 플레이 랩) 지음 / 폴더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브레인 플레이 랩(Brain Play Lab)의 <어린이 스도쿠 스프링북 1·2 세트>를 소개합니다. 스도쿠는 집중력과 논리적 사고력을 길러 주는 대표적인 두뇌 개발 숫자 퍼즐입니다. 즐기면서 풀 수 있도록 구성된 <어린이 스도쿠 스프링북 1·2 세트>는 단계별로 난이도가 조절되어 있어 스도쿠 입문자가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만든 브레인 플레이 랩은 "놀이로 두뇌를 자극하는 실험실"이라는 모토 아래, 아이들의 인지 발달과 창의적 사고 향상을 위한 다양한 두뇌 활동 콘텐츠를 연구·개발하는 그룹입니다.


<어린이 스도쿠 스프링북 1·2 세트>의 구성은 초급과 중급을 위한 1권, 중급과 고급을 위한 2권, 그리고 특별 부록인 배틀 스도쿠 게임북으로 이루어져, 체계적인 학습과 놀이를 제공합니다. 초급부터 고급까지 난이도별 스도쿠를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는 완전판 세트로, 4X4 초급부터 6X6 중급, 9x9 고급까지 폭넓은 난이도의 총 321문제가 남녀노소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세트 전용 특별부록 배틀 스도쿠 게임북은 친구나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스도쿠 대결 게임 2회분이 실려 있어, 혼자만의 퍼즐 학습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스도쿠 놀이의 재미를 더해줍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펼쳐볼 수 있는 스프링북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책장을 완전히 펼쳐놓고 문제를 풀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 안성맞춤입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휴대용 사이즈 덕분에, 가정은 물론 외출이나 여행 중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두뇌 놀이 도구입니다.


<어린이 스도쿠 스프링북 1·2 세트>는 스도쿠의 정의와 역사, 기본 규칙은 물론 푸는 방법까지 상세한 설명서를 제공합니다. 스도쿠를 처음 접하는 어린이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아이들은 스도쿠와 자연스럽게 친숙해질 뿐 아니라, 집중력과 논리적 사고력, 문제 해결 능력, 기억력 향상 등 다양한 두뇌 발달 효과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놀이처럼 즐기며 두뇌를 자극하는 최고의 숫자 퍼즐 입문서로, 스도쿠의 재미와 교육적 가치를 동시에 누릴 수 있습니다.


수학적 사고력과 집중력은 어린이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학교를 떠난 많은 성인들은 일상에서 숫자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수리력 둔화를 경험합니다.


최근 스마트폰 과다 사용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 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입니다. 실제로 스마트폰의 장시간 사용은 주의력 감소, 감정 조절 어려움, 수면 장애, 사회적 소통 부족 등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하며, 두뇌 활동 저하에 직결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성인 또한 꾸준한 두뇌 자극과 사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린이 스도쿠 스프링북 1·2 세트>는 남녀노소 누구나 논리력과 집중력 향상, 기억력 자극, 정신 건강 유지에 효과적인 두뇌 활동을 제공합니다. 스마트폰 대신 손에 쥔 작은 스도쿠 한 권이 삶의 리듬을 되찾는 건강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책을 선물해야 한다면, <어린이 스도쿠 스프링북 1·2 세트>를 추천합니다. 누구에게나 부담 없고 유익한 이 책은 선물 받은 사람의 일상에 소소하지만 똑똑한 재미를 더해 줄 것입니다.


한 번 시작하면, 책장이 술술 넘어갑니다. 푸는 시간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정 풀리지 않는다면, 답지 찬스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어 고전 필사 노트 - 하루 한 장 일상이 빛이 되는
용윤아 지음 / 솜씨컴퍼니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의 깊이를 사랑하는 영어 교육자 용윤아 작가는 "고전은 읽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희로애락이 넘실거리는 순간, 저자는 책을 읽고 문장을 필사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작가의 생각 속으로, 그들의 시대와 삶 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랐던 문장은 시나브로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의 한 축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루 한 장 일상이 빛이 되는 영어 고전 필사 노트>는 고전 애호가인 저자가 엄선한 10편의 고전에서 100개의 명장면을 담아, 하루 한 장씩 필사의 여정으로 안내합니다. 고전의 울림이 내 삶에 천천히 스며들도록 도와주는 소소하지만, 꾸준한 루틴의 필사 노트입니다.


필사는 단순히 베껴 쓰는 행위가 아닙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깊이 새겨진다"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작가의 문장을 마음속에 고요히 새기는 일입니다. 문장을 따라 쓰며 구조와 어휘, 리듬을 세심하게 관찰하다 보면, 작품의 의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나아가 작가가 전하려는 의미에 공감하고, 그 울림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용윤아 저자는 필사를 마친 뒤 책을 바로 덮지 말고, 오늘 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볼 것을 권합니다. 문장의 의미를 곱씹고,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끄적입니다.하루하루 쌓인 기록은 100일의 필사 여행이 끝난 뒤에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소중한 선물로 남을 것입니다. 


<하루 한 장, 일상이 빛이 되는 영어 고전 필사 노트>는 인생의 세 가지 중요한 테마인 사랑, 성장, 행복을 담은 100개의 명장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 <작은 아씨들>, <노인과 바다>, <데미안> 등 누구나 들어봤을 고전 문학 작품들 속에서 선별한 가장 아름답고, 삶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주옥같은 문장들입니다. 


간략한 작가 소개가 담긴 장을 넘기면, 왼쪽 페이지에는 원문 문장과 간결한 해석, 어휘와 표현에 대한 안내가 담겨 있습니다. 오른쪽 페이지는 문장을 직접 따라 쓸 수 있는  필사 공간입니다. 여백에 그어진 필기선은 집중과 몰입을 유도하며, 심리적 안정은 물론 문장 감각의 향상까지 도와줍니다. 단순하지만 치밀하게 설계된 이 배치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 없이 쓰기’가 아닌 ‘의미를 곱씹으며 쓰는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100일간의 필사 여행은 단순히 영어 문장을 따라 쓰는 것을 넘어, 그 시대를 살아간 작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문장 속에 스며든 감정과 숨결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필사하는 손끝을 따라 깊어지는 사색은 고요한 성찰의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일상을 지키는 일분일초가 쌓여, 결국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하루 한 장, 일상이 빛이 되는 영어 고전 필사 노트>는 작고 꾸준한 루틴을 통해 자신의 인생 문장을 만날 기회를 제공합니다. 영어로 만나는 특별한 문장들 속에 숨은 우리네 삶을 지탱하는 길잡이가 술래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느리고 명랑하게, 매일 하는 심신단련 - 소란한 세상에서 나만의 리듬이 필요할 때
신미경 지음 / 서사원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미경 작가의 에세이 <느리고 명랑하게 매일 하는 심신 단련>은 디지털 디톡스의 해법을 염탐하고자 읽었다. 번아웃과 무기력에 시달린 저자는 삶의 의욕을 찾기 위한 100일간의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느리고 명랑하게 매일 하는 심신 단련>은 여정의 기록이자 결과물이다. 디지털 디톡스 100일, 밀가루 단식 80일, 낙관주의 연습 30일, 새로운 삶의 질서를 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저자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내적 친밀감이 급격히 높아졌다가 수직 하강하는 롤러코스터를 경험했다. 소란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찾기 위해선, "비교"는 금물이지만, 본인과 비슷하다는 공감은 착각이며 작가는 어나더 레벨이었다!


저자가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지인들이 "너야말로 도파민 프리인데 무슨?"이라는 반문의 의미를 두 번째 장에서 완벽하게 이해했다. 하루에 자몽 두 개도 아니고 두 조각을 먹는 절제력의 소유자이다. 여름에 매가리 없는 본인과 달리, 여름에 힘이 나는 유형이다.


J형답게 꼼꼼한 계획과 그보다 더 철저한 실천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목표를 향한 걸음은 완벽 대신 치열한 사색이 특징이다. 가장 부러운 점은 자신의 신체와 마음에 대한 파악을 저자는 이미 끝냈다는 점이다. 몸과 정신의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저자의 말처럼 소란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아도 된다.

전반적인 어조가 담담하다. 치열한 자기 탐색의 과정을 엿본 느낌이다. 내적 친밀감은 없지만, 좋아하는 것이 같지 않아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지를 만난 느낌이다.


저자가 실천한 영역은 남일이 아니다. 세상의 소음 대신 나에게 귀를 기울이며, 건강을 유지하고 마음을 챙기면서 자신만의 일상을 꾸려가는 일은 개인의 궁극적인 자아실현이 아닐까!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시대에 기다림은 귀한 태도가 되었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사람을 앞에 두고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세태를 그토록 경계했음에도 그렇게 되고 말았지만, 나도 나만의 리듬을 찾기 위한 소소한 시도를 해야 한다.


살기 위해서, 느리지만 명랑하게 매일은 못해도 꾸준히 하는 심신 단련의 작은 실천이 궁금하다면, 신미경 작가의 에세이 <느리고 명랑하게, 매일 하는 심신 단련>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탁영
장다혜 지음 / 북레시피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탁영>은 넷플릭스 드라마 <탄금>의 원작자 장다혜 작가의 세 번째 소설이다. 작가의 두 번째 작품 <이날치, 파란만장> 또한, TV 드라마 제작 중이다. 이야기꾼으로서 인정받는 작가이다. 소설의 재미는 개인의 취향이 좌지우지한다. 본인이 "재미있다"라고 우겨도, 읽는 이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장다혜 작가의 글솜씨는 독자 추천의 중요한 명분이다. <탁영>의 재미는 각자의 몫이지만, 읽는 내내 귀하디귀한 우리말의 향연이다. 시대극의 작가는 이래야 한다. 한국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탁영>의 시작은 신분으로 인격을 판단하는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죽음이 평등할지라도,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철저하게 불평등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탁영>의 배경은 조선 후기이다. 혼란의 시대는 인간의 야만성과 불평등을 부채질한다.


수어의 최승렬과 아들 최장헌의 만행을 보면, 오늘날 의료계의 민낯이 스쳐간다. 주인을 향한 충성심은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의 신념이 된다. 이들은 적정선을 훌쩍 넘는다. 인간다움을 잃었으니, 아귀이다.


장례조차 치를 여력이 없는 백성의 사체는 인간이 아니다. 전염병의 매개체이며 짐승과 다름없다. 모두가 기피하는 매골(埋骨)의 일을 하면서 자란 이가 백섬이다. 매골승은 전염병에 부모를 잃은 다섯 살배기 고아를 거둔다. 아이는 매골승의 일을 대신하면서 노동력을 착취 당한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비수처럼 날아올지 모르니, 오늘 하루를 정갈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18살의 백섬은 수어의 최승렬의 집안으로 팔려온다. 복순 어멈을 제외하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구곡재에서 종답지 않는 호화 반찬과 의복을 누린다. 최씨 집안의 인간 부적답게 바깥출입을 삼가한 어느 날, 운명처럼 동갑의 여인과 사내를 만난다. 그들은 윤희제의 강압에 의해 얼떨결에 동무가 된다. 천하디천한 매골노 출신의 백섬, 의관 출신 양반 최장헌, 그리고 상인 출신이지만 공명첩으로 신분을 산 윤희제. <탁영>은 그들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섬은 자신의 죽음 그림자가 무덤의 뗏장이 아니라 꽃그늘이 되길 바랐던 사내이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부처"같다는 생각을 한다. 십여 년간 온갖 시체를 파묻으면서 살아온 남자아이의 마음이 이토록 순수할 수 있을까? 의문은 <탁영>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시나브로 소멸된다. 백섬의 탈속 분위기는 오히려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기에 가능하다. 반전의 매력은 윤희제의 심동(心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작가의 캐릭터 설정에 탄복하는 순간이다.


최장헌의 빠른 변심은 "업(業)은 인품과 무관하다"라는 작가의 주제 의식을 확고하게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적지 않게 놀란 것은 결국 본인 역시 "의술과 양반 교육"이라는 선입관에 젖은 탓이다.


<탁영>의 결말은 입을 델 수가 없다. 앗아간 희망이 아쉽지만, 은연중에 희망의 현실화는 개연성을 해친다는 생각을 했던 터라 반발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윤희제의 완벽한 복수에 찬사를 보낸다. 곁에 남자를 두지 않은 것은 작가가 윤희제의 바람을 들어준 까닭이다. 장다혜 작가의 매력은 시대의 부조리를 타파하는 영웅주의 노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탁영>의 혼란은 여전히 물살을 타고 흐른다. 다만, 윤희제의 복수만큼은 완벽한 응징이다. 윤희제 이후, 또 한 명의 윤희제가 나타날 것이다. 또 한 명의 백섬이, 또 한 명의 복순 어멈이, 또 한 명의 칼두령이 등장할 것이다. 민초가 움직여야 시대의 부조리도 사라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