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정의 기판이 푸른도서관 34
강정님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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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페이지가 넘는 결코 읽기 쉽지 않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손에서 책을 놓기 힘들었다. 다 읽고 난 후 느낌이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아쉬움... 
   
 책장을 열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구수하면서도 정감있는 전라도 사투리를 만나볼 수 있다. 친정엄마가 전라도 사람 이었어도 서울 사람이나 다름 없었기에 사투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지만, 시댁 어른들이 전라도 분들이라 이젠 구수한 사투리가 전혀 어색함이 없다. 서울 토박이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해보라면 그래도 흉내정도는 낼 수 있고, 조금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책 속에선 상당히 고난위도의 걸쭉한 사투리를 만나볼 수 있다. 뚜꺼운 이 책을 지루하다는 생각없이 읽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밤나무정마을의 어느 밤 고향을 떠났던 기판이가 피 투성이가 되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 되지만, 곧바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며 기판이의 조부모님, 부모님, 형제들, 친구들, 이웃사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안촌 마을로 안내한다. 기판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부터 과부의 신세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의 고된 하루 하루가 아프게 다가왔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오로지 자식의 앞날만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 시절 뿐 아니라 어느 시절을 막론하고 자식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한다.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안골댁, 바로 기판이의 어머니이다. 시집 간 언니들을 대신해 아버지와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키 작은 김쪼간네가 둘째 아들의 색시감으로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윗 동서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자신은 딸을 낳고 형님이 아들을 낳으면서 한층 더 수위를 높여 몹쓸 짓을 도맡아 한다. 지성을 들인 끝에 낳은 아들 기판이를 향한 그릇 된 모정은 그야말로 남아선호, 남존여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만들었다. 기판이는 어머니의 과잉보호의 당연한 결과물인냥 소심함의 전형을 보여준다. 친구들의 놀림으로 불리기 시작한 판철이라는 이름조차도 안골댁은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세상을 판치고 살라는 뜻으로 급기야 아들의 이름을 판철이라 부르기까지 이르지만, 기판이는 엄마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지금 이 세상에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판철이를 길러내고 있는지... 나는 판철이 엄마의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늘 친구들에게 끌려 다니고, 무시 당하고 조롱 당하던 기판이가 우연한 싸움에서 그동안 참아 왔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기판이로 변하게 된다. 자신을 이제 기판이가 아닌 판철이라 불러달라는 이야기에선 왠지 서늘해졌지만, 기판이의 소심하고 그늘진 모습 이면에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 예감이 맞았던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고 결국 기판이는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판철이로 살기로 작정하고 불행한 인생으로 뛰어 들게 되면서 아쉬움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결과를 몰고온다.  

 구수한 사투리와 더불어 알콩달콩 살아가는 이야기, 기판이 부모님의 혼인을 앞두고 함을 가지고 옥신각신 하는 풍경, 신랑 발바닥에 매질하는 풍경,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등 지금 아이들에겐 생소한 옛 모습들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읽는 재미와 더불어 알아가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이렇듯 정겹고 따뜻하기 까지 한 이야기 속에서 만나게 되는 기판이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할수만 있다면 거부하고 싶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프고 아픈 이야기이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자신의 의지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판철이로 살아야 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지극히 평범한 결말을 꿈 꿔 보기도 했다. 지극히 평범한 것이 가장 어렵기도, 그래서 행복하다는 말이 왜 떠오르는 것인지.... 그래서 책장을 덮으며 한없이 아쉽고 또 아쉬워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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