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어본 리베카 솔닛의 첫 책이다. mansplain 이라는 단어를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이 단어가 맘에 들어 찾아보니 솔닛의 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길지 않은 분량에 여러 매체에 투고 한 글을 모은 것이라 조금씩 중복된 내용도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명확하게 주장이 드러나 있고 문체도 간략 명료하여 읽기에 시원시원했다.
얼마나 많은 수의 여성이 성폭행, 성희롱,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단지 소수의 정신이상자 남성에 의한 것이 아닌 시회 전반의 ‘강간문화’라고 증명하고 있다. 통계자료는 실로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남성에 의한 폭력이 마치 여성이 잘못하여 당해도 싸다는 피해자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사회적 시선들 또한 소름끼친다. 사실 그러한 논리들이 여성인 나 자신 속에도 숨어있음을 문득문득 느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유년기부터 학습되어온 결과일 듯하다. 내 딸에게는 이런 말도 안되는 학습이 안 되어 있길 빈다.
리베카 솔닛의 글쓰기 스타일 왠지 맘에 들어서 최근에 출판된 ‘오웰의 장미’라는 책과 그녀가 이 책에서 소개한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라는 책을 주문했다. 빨리 읽고 싶다.
p. 14 나는 이런 종류의 사건을 좋아한다. 평소에는 은밀하고 모호한 힘들이 풀밭에서 스르르 기어나와, 소를 삼킨 아나콘다나 카펫에 떨어진 코끼리 똥처럼 우리 눈에 뻔히 들어오고야 마는 순간을.“
p. 15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 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확신을 키운다.
p. 54 요즘도 강간에 대해서는 강간범이 아니라 피해자를 단죄하려는 경우가 많다. 마치 완벽한 처녀만이 성폭행을 당할 수 있다는 듯이, 또는 완벽한 처녀의 말만 믿을 수 있다는 듯이.
p. 57 이때 ‘생식권’이란 물론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권리를 말한다. 앞에서 내가 여성에 대한 폭력은 통제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p. 92 최근에 많은 미국인들은 ‘동성결혼(same-sex marriage)’이란 어색한 용어를 ‘평등결혼(marriage equality)’으로 바꾸었다. 원래 이 용어는 동성 커플도 이성 커플이 누리는 권리를 전부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결혼이란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전통적 결혼은 그렇지 않았다. 서구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에, 법은 결혼을 통해서 남편이 사실상 아내의 소유자가 되고 아내는 사실상 남편의 소유물이 된다고 규정했다.
p. 95 같은 성의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평등한 관계이다. 한쪽 파트너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좀 더 힘을 지닐 순 있겠지만, 대개의 측면에서 그들은 서로 평등한 위치에 선 사람들끼리의 관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자기들 마음대로 규정할 수 있다.
p. 122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p. 123 ”계획은, 즉 미래의 기억은 현실이 자신에게 맞는지 시험 삼아 걸쳐본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 두가지가 합치하지 않는 듯할 때 사람들은 현실이 주는 경고를 무시한 채 계획에 매달림으로써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p. 129 앎이 감정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마비시키기도 한다.
p. 131 우리에게는 미래의 기억이 없고, 미래는 정말로 어두운데 그것이야말로 미래로서는 최선의 형태이고, 우리는 결국에는 늘 어둠 속에서 행동하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p. 135 ”특히 문학적 성취를 거두는 사람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대번에 떠올랐어. ... 그건 소극적 능력이야. 사실과 이성을 찾아서 초조하게 헤매는 대신에 불확실성, 미스터리, 의문을 수용할 줄 아는 능력이지.“
p. 그는 새로운 종을 찾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그가 밝힌 요령은 밀림에서 길을 잃는 것, 자신이 아는 지식과 방법을 넘어서는 것, 경험이 지식을 압도하도록 허락하는 것, 계획이 아니라 현실을 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p. 156 히스테리라는 단어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 감정적으로 격한 상태를 뜻하는 그 현상이 몸속을 돌아다니는 자궁 때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p. 157 말을 꺼내는 것, 말과 말하는 사람이 주목받고 존중받게끔 만드는 것은 여전히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이다.
p. 178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수는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여러 척도로 볼 때 광기는 불평등, 만족을 모르는 탐욕, 생태파괴와 더불어, 또한 비열함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핵심에 자리한 속성이지 주변부에만 있는 속성이 아니다.
p. 178 인도에서 정신불열증 환자들이 환청을 들을 때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집 청소를 하라고 말하곤 하는 데 비해 미국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p. 213 혁명은 사실 특정 체제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주가 되는 사건이 아니고, 그보다는 파열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탄생하고 그 충격이 퍼지는 사건이었다.
p. 225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구속은 또 있다. 경쟁과 냉혹함과 단기적 사고와 가혹한 개인주의를 높이 사는 체제, 환경파괴와 무제한 소비를 너무나 잘 뒷받침하는 체제, 한마디로 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한 체제이다. 이런 체제는 최악의 마초성을 현실로 구현하고 지구에 존재하는 최선의 것들을 파괴한다.